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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217: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2009.02.15(주일)

오늘은 성천교회 최종환목사 취임예배 설교를 했다.
이 설교문을 여기 올린다.

설교제목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오늘 본문 고전 15장 51절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비밀을 열어 보여주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전 15장이 말하는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먼저 일으키심을 받을 것이며, 그 후에는 살아있는 자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5-49절까지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답변이고, 오늘 읽은 본문 50-58절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광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내일에 서서 오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죽음의 권세도 사라질 것임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는 에덴과 골고다에서의 사탄의 일시적 승리를 십자가에서 역전시키시고, 부활로 그 승리를 입증하신 그리스도의 사망을 이긴 권능을 힘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사망을 이길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궁극적 소망을 이룰 것입니다. 이 같은 교리적 접근 이후, 바울은 실제적 교훈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 58절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상의 가르침에 굳게 서서, 거짓 교사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라(엡4:14) 권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열심히 주를 섬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도 큰 사망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여기서 말하는 그 큰 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당한  아시아는 어디이고, 그 고난은 무엇일까요?

하나, 그 아시아는 에베소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언급된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사나운 맹수와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데메드리우스와 그의 동료 은장색들에 의해 야기된 다툼을 암시하는 것입니다.(행19:23-41) 그러나 그 본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입었는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 20세기 주경신학자들은 그 아시아를 아시아 이외의 지역이라 여깁니다. 그곳을 리쿠스계곡이라 지칭합니다. 바울을 이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아(참조 고후 11:24) 거의 죽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바울은 무서운 병으로 인해 죽을 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정리해 보면 바울이

1.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2.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 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고난이 극심했다는 말입니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큰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환란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당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제 몫의 고난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연관 되어 있기에 고난의 표적이 교회요, 성도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표적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성천교회도 그런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고난의 표적이기에 큰사망에 이르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 즉 내일이 없는 듯 행동했던 이들에게서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는 성천교회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서울중앙지방회에 속한 목사입니다. 나는 성천교회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어젯밤 한 일을 나는 알고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번 성천교회 목사취임식 설교를 앞두고 나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본문만 생각났습니다. 다른 말씀으로 넘어가지질 않았습니다. 목사 취임식에는 다소 부적절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말씀을 택해보려 했으나,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동안 모진 고통을 겪어 온 성천교회의 비밀을 알고 있는 네가 성천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명령으로 여겨졌습니다. 나는 성천교회가 그동안 당한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부도덕한, 불량한 교권에 시달려 온 그 가련함과 분노를 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애틋한 성령의 위로가 오늘 이 본문을 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은 애굽에 먼저와 있던 망명객 요셉처럼 그런 형편에 있었던 내가 서울중앙지방회장이 되어 옛 동지 성천교회 담임목사 취임식 예배 설교자와 집례자가 되어 성천교회 담임목사에게 치리권을 부여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를 위함이니. 그래서 나도 성천교회 담임을 모시는 일에 뒤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일조했습니다. 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기우같은 염려를 덧붙이자면 그 역경의 열매를 자신의 자랑과 공적되지 않길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그분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그분을 붙잡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 소망 - 사망을 이기는 궁극적 소망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5; 호13:14)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드러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면, 그분이 다시 오시면 우리의 수고한 모든 일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악한 자의 악행도 드러납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재미있는 말씀의 비밀이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세례요한의 순교 사건은 상당기간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가는 그의 순교비화를 예수의 등장을 네레이션하면서 회상하듯, 그 비화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마가6:14).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헤롯의 악행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말처럼, 예수가 등장하자 헤롯은 그 예수를 자신이 죽인 세례요한의 부활로 여겼습니다.(마가6:16)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다른 옛 선지자 중의 하나 같다고 말했으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헤롯은 자신의 악행을 스스로 기억해 냈습니다. 헤롯의 기억의 복원은 세례요한의 순교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예수가 등장하자, 헤롯의 악행이 드러났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동시에 세례요한의 순교가 구속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주를 위한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장차 그 날에, 주께서 재림주로 우리 가운데 강림하실 때에 우리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만천하에 드러나, 상급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네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 딤후 4장 8절.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그 날에.

저는 그 ‘드러남’의 비밀을 눈과 귀로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당한 그 고난의 현장에서였습니다. 저는 지난 2003년 소아시아 에베소 교회, 그 폐허의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읽고, 참조할 분들을 위해 지난 2003년에 써뒀던 글을 옮겨 놓습니다.)

                   

                              헛되지 않는 수고

  
  때론, 필연은 우연이란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필연적인 우연한 만남.

 

  무너져 내린 성지(聖地) 에베소 교회.

  그 폐허더미 속에서,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실로 필연적인 우연이었다.

  파란 눈의 여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제임스 게일입니다. 그분은 조선 선교사였지요. 그러니까 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 뒤를 이어 당신네 나라 한국 땅에 복음 전파를 위해 들어 가셨었지요. 장로교 연동교회에 시무하셨고요.” 

 

  그리고 우리는 이내 헤어졌다. 그들 부부와 함께 찍은 한 장의 스냅 사진만 남긴 채.


  그것은 사실이었다. 공적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첫 선교사 언더우드를 뒤이어 한국 땅을 밟은 여러 선교사들 가운데 게일 제임스 스카스(Gale James Scarth) 선교사가 있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민영익과 6명의 사절단이 미국 견학을 갔다. 우리는 이 미국 방문단을 견미단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다니는 견미단 일행과 동승한 기차 속에서, 조선을 알게된 청년이 바로 게일 제임스 스카스(Gale James Scarth)였다. 이내,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드디어 1888년(그 손녀딸이 기억하는 시기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선 땅을 밟았다. 제물포에 도착한 게일 선교사는 한국어를 배우며 순회 전도를 시작했고, 그러다 한때 부산에 머물면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를 지켜보기도 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던 존 헤론 선교사의 순교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존 헤론의 미망인 헤티와 결혼을 하였고, 순교한 선배 선교사의 두 딸을 키우면서 조선선교의 장을 활짝 열어갔다. 그는 문인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는데, 그 중 「코리언 스케치」라는 책은 구 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 책은 증언한다. “나는 그 이후로 노란 개만 보면 군침을 흘렸노라.” 그렇다. 그는 조선의 개고기까지 사랑한 토종(?)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야소교 회보의 주필을 비롯 각 기독교신문에 관여했고, 예수교 서회의 문서활동을 하면서 한국 문화에 혁혁한 공헌을 남겼다. 한 예로 『천로역정』의 원제목은 『The Pilgrim's Progress』인바 우리말로는 『순례자(Pilgrim)의 여로(Progress)』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천로역정』이라고 이름하여 이 후 모든 번역본들이 이 제목을 취해왔다. 그리고 그는 서울 연동교회 목회를 하면서 현 정신여학교와 경신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평양신학교 교수 활동도 했다. 젊었을 때 기차 안에서 만난 조선인을 보고, 조선 선교사의 꿈을 키워오다가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간 게일 선교사. 그는 1937년 별세하였지만, 그의 이름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이용남, 선교사 열전  한국을 사랑한 젊은이(13) 조선을 품은 그리스도인 - 게일 선교사)


  필자는 지난주간 소아시아 지역(터키) 일곱 교회를 돌아보고 왔다. 바로 그 폐허더미 속에서 그 교회들의 몰락의 이유와 의미를 곱씹어 보고 있던 순간, 이상과 같이 우연히 게일 선교사의 손녀와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뜻밖의 감격적인 만남은 이런 영적 통찰을 제공했다. 그것은 성지 투어도, 성지 답사도 아닌 나에게는 성지 순례였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 에베소 교회는,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복음의 창조적 생명력을 억누를 그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에베소는 영원하다. 에베소 교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하나, 주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제자 제임스 게일. 그 손녀딸이 에베소 교회 그 폐허더미 속에서 듣게 된 조선 성지 순례단원들의 그 우렁찬 찬송소리. 그녀가 느꼈을 영적 감동과 확신케 되었을 진리의 말씀.

 

  그 밤, 베갯잇을 적시며 나는 이내 이 말씀을 떠 올렸던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58절).”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주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 그분이 오시면 우리가 남몰래, 남이 알아주지 않는 주를 위한 수고가 만천하에 환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단은 감사하게도 전도표제 가운데, 재림이 있습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재림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부추기는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 재림의 열망만으로는 우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을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한때, 내가 속히 오리라 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재림에 대한 열망으로 고난을 감당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큰 사망 같은 고난 속에서 그는 그 재림대망을 이겨 낼 힘으로써의 부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부활장인 고린도 전서 15장이 그런 배경을 강조한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원하는 주님의 다시 오심은 부활의 현재적 확신 속에서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부활의 현재적 확신이 없이는 재림대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열심히 주를 섬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수고가 다시 오실 그분 안에서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재림은 주안에서 수고한 자들에게 임하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이들에게는 최대의 저주입니다.

끝으로, 재림 신앙으로 나아가다가 돌부리(큰 사망 같은 것)에 걸리면, 바울처럼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후 1장에 구체적으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하나, 고후 1장 9절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는 말씀대로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 고후 1장 11절입니다. 피차 간구함으로 도우라. 서로를 위해 사랑과 선행을 경주하며, 기도로 격려하고 지지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셋, 마지막입니다. 오늘 담임목사로 취임하는 새 목자 최종환 목사님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천 년 전, 지난 세기 성천교회 원로 목사님의 자제이신 김종환 전도사님의 개척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예식 참석했더니 뜻밖에 저에게 약력소개 순서가 맡겨져 있었습니다. 난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 개척자인 김종환 전도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시작되어 버렸고, 난 그 누구에게도 그 개척자의 약력에 대해 물어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난 강단에서 하나님께 그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랬더니 내 눈 앞에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더니 내 눈 앞에서 이런 글자를 또박또박 자판 찍듯, 찍어가기 시작 했습니다.

앨    빈   토    플    러
앨    빈   토    플    러
앨    빈   토    플    러

그것은 난수표였습니다. 난해한 암호를 어떻게 해독해야할까 난 그 강단에서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저 말은 그 전도사에 대한 약력을 소개함에 있어 그 시점을 미래에 두라는 계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앨빈토플러(Alvin Toffler)는 미래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말씀과 베드로후서3장 13-14절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3-14).

그래서 저는 이렇게 그분을 소개했습니다.
김종환 전도사는 “흠도 없고, 점도 없고, 티도 없는 목회자다.”
이런 내일에 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김전도사님을 대하는 성도가 되라고 난 당부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천교회에 4대 목회자로 부임하는 최종환 목사님도,
“흠도, 점도, 티도 없는 목회자입니다.”
이같이 내일에 서서 오늘은 바라보는 재림 신앙의 눈으로 목회자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전인수격, 자화자찬 식의 교만이 아니라, 너를 보는 신앙적 애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일에서서 재림을 대망하면서, 부활의 현재적 확신 속에서 우리 몫에 태인 고난을 이겨나가는 내 사랑하는 성천교회 목회자와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5-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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