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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예식설교 연합체육대회 설교문입니다.

2008.05.25 22:20

김성찬 조회 수:3944 추천:53

시133:1-3

어제(2008.5.24, 토)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연합 친선체육대회가 전농중학교 교정에서 있었습니다. 족구, 배구, 탁구, 오자미던지기 등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탁구는 목회자끼리의 시합도 있어서 한판 멋진 승부를 벌였습니다. 난 중랑감찰 강충선목사님과 함께 팀을 이뤄 복식경기를 치뤘습니다. 달랑 정예 일곱명만 출정한 도원감찰 성광 복식조(박상호, 이병오목사)에 석패를 해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이어 친선 경기로 계속된 전현석-최승렬 조와의 경기에서는 우리가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서브를 혼자 독식한 그 어떤 사람, 어휴 그 억지, 알아 모셔야 했습니다. 강충선 목사님께 사과 한마디. 준우승의 영광을 중랑에 선뜻 양보하지 못한 협량을 반성하며, 내년에는 그 영광을 오직 그대에게만 돌릴 것을 굳게 맹세합네다.


여기 개회예배 설교 원고 올립니다.



                       연합하는 신앙의 힘

                       - 시 133편 1 - 3 -

                        

                        

연합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에발트(H.Ewald)는 본문의 ‘형제’라는 말을 ‘민족공동체’라는 말로 해석하여 “민족 공동체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족공동체는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영적 신앙공동체입니다. 바로 여기 모인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내어 주다는 말입니다.

땅을, 시간을, 물질을 내어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 회원들이 그동안 이런 ‘자기 내어 줌’이라는 신앙훈련을 통해 오늘, 그 네 번째 연합 친선 체육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를 내어 주는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연합하는 신앙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우리 신앙공동체를 성결케 할 것입니다.


2절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앨런 P. 로스는  “기름이 아론을 성결케 하듯 예루살렘에서 연합하여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 공동체를 성결케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연합하는 신앙의 힘이 우리 서울중앙지방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성결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결은 연합하는 신앙공동체의 힘입니다. 분열과 분쟁이 있는 곳에 성결의 은혜가 넘치지 않습니다. 이는 주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떠난 형벌(살후1:8-9)입니다.

왜 분열하고, 분쟁합니까?

그 어떤 집단이 올바른 가치관과 윤리적 기초가 없는 연대나 동맹을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 연합체육대회와 연관지어, 올림픽에 대한 한 예를 들어 봅시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표적 삼아 게르만 민족의 단결을 이끌어 내면서,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베르린 올림픽을 유치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오만에 기초한 히틀러의 나치즘을 호르크하이머는 “이성과 자연의 악마적 통합‘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인본주의적이고, 정략적인 목표를 위한 연합은 세상을 혼란케 할 뿐입니다.

연합은 연합인데 악마적 연합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연합의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       을 입었느니라


우리의 연합은 전체주의적 패권주의가 그 연합의 목표가 아닙니다. 겸손과, 온유과 인내와 사랑과 평안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시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둘이 하나 되게 하는 화평의 연합입니다.


우리 서울중앙지방회는 88개 교회, 8개 감찰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각기 흩어져 자신들에게 맡긴 지역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오늘 우리는 한 부르심의 소망을 위해 함께 모인 것입니다.

연합의 목표는 일치에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실패는 일치가 아니라 일색에 그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도 일치가 아닌 일색의 탑을 쌓던 인간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바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연합은 어느 한 감찰회만의 모임이 아닙니다. 큰교회만의 모임도, 작은 교회끼리의 모임도 아닙니다. 학벌이나, 억양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일색인 동문회도 향우회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신 자[고전 12:13]들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성결을 가져오는 일치인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듯, 이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선 신앙인들의 연합만이 이 땅을 성결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의 열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서울중앙지방회 미래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썩을 대로 썩고, 분열과 분쟁만을 일삼아 다시는 재생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상황이 일부에서는 연출 되고 있지만, 여기 모인 우리 평신도들의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우리 신앙공동체를 성결케 할 기적을 낳게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이 땅의 생명력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커크파트릭(Kirkpatrick)은 “형제들이 단합하여 화목함이 그 신앙공동체에 주는 영향은 마치 이슬이 채소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 먼저, 이 생기가 이 연합체육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육체에 임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신앙은 육은 무익하고, 저급하고, 천하고, 악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Spykman은 그의 저서 “개혁주의 신학” 인간론에 의하면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대 헬라인에게서 빌려 온 개념, 즉 육체보다 우월한 영의 개념, 혹은 물질보다 우월한 정신개념을 “분열증적 모델”이라고 명명하고 그 폐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대 헬라인으로부터 육체 보다 우월한 영의 개념, 혹은 물질보다 우월한 정신 개념을 빌려 왔다. 육체의 기능은 실상 낮은 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영혼이나 경건의 연습에 비해 열등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그 중 칼빈도 포함하여)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헬라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런 분열증적 모델의 영향으로 인해서 의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돌봄, 결혼, 쉼터, 혹은 오락 등을 거부하며 몸을 정복하기 위해 금욕적인 자기 부인이나, 독신, 수도원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등의 영적 훈련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20세기의 신학적 재발견이나 과학적 절망에서 인간을 전인으로 보기 시작한 사상이 표출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히브리적 기독교 유산이 인간의 전인성을 이미 언급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Milton에 의하면 히브리적 기독교적 유산은 인간을 나누어지지 않은 산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인간은 영과 육의 전체를 소유한 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놀랍게 합쳐진 합성적 존재, 즉 종합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의 일체성이 많은 병의 정신치료적 성격이나 그 밖의 인간 경험에 빛을 던져 준다고 덧붙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으로서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임을 상기 시킵니다. 

(심지어 이분설을 주장하는) Wesley에 있어서도 인간의 육체와 혼은 분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몸과 혼은 너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 연합은 영원한 연합이다. “나는 현재의 존재 상태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 후에 영원히 다시 몸과 혼으로 구성된 존재로 있게 될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인간을 구성요소로 나누기 보다는 연합된 인간 즉 통전적 인간관을 주장하는데, 우리는 이미 웨슬레에게서 이러한 통전적 인간관을 발견합니다.


이 시대는 전일체로서의 몸, 전인건강의 시대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신만큼 육체도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에 실패한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믿고, 이후에 우리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파에 지친, 교회생활을 통해 탈진한 우리의 몸에 그 생기를 불어 넣러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0장입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오늘, 이 힘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신앙 안에서 연합을 이룬 서울중앙지방회 남전도회 임원 및 모든 회원들에게 성령께서 그 힘의 권능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2) 또한,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여기 모인 교회와 감찰회 그리고 우리 서울중앙지방회에, 더 나아가 우리 민족공동체 위에 생명력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스런 기름으로 성결케 된 이 땅의 성도들이 연합하여 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 주고, 더러운 곳을 구석구석 청소해가면 우리 교회가, 지방회가, 민족 공동체가 예수 안에서 큰 번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헐몬산으로부터 시온산으로 흘러 내리는 이슬!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흘러내리는 축복! 번영!  절망의 만성화로 찌든 이 땅에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힘찬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것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은, 아니 우리 서울중앙지방회는 지금 우리의 이러한 뜨거운 연합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오래된 분열과 분단의 만성화. 그래서 우리에겐 비전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것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을 바라고, 찾고, 행하고자 하는 신앙인입니다. ‘함께 사는 선함’ 거기에 생명이 있고 번영이 있다고 일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연합하는 신앙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을 모읍시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 합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 합시다.(히10:24-25) 남과 북, 부자와 가난한 자,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 - 이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가 곧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설교의 기초가 되었던 저의 지난 설교문 한 편을 더불어 싣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사상 설교원고                                     1992.7.13(월)


 연합하는   신앙의 힘

- 시 133편 1 - 3 -


 김   성   찬

( 목사/상계중앙교회)


지난 6월 23일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총선에서 극우 집권 리쿠드당이 패하고, 실용주의 노선의 노동당이 승리했습니다. 이 결과를 바라보는 세계의 눈은, 이제 극한 대치로만 일관하던  중동에도 상호공존의 새 장(場)이 열리지 않겠는가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츠하크 라빈 노동당 당수는 자신이 집권하면 점령지 반환문제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자치권 할양과 점령지 내 정착촌 건설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겠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상호공존의 새 바람에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 영향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땅에도 뒤늦게나마 민족적 일체감을 회복하자는 구체적인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의 억압, 분단의 설음,동족상잔의 비극, 상호 비방과 증오등으로 점철된 처절한 민족사에 한줄기 서광으로 비춰지는 어떤 선언과 교류등이 뭔가 구체적인 공존과 연합의 터전을 구축할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는 것 " - 이것은 우리 6천6백만 민족의 한결 같은 염원 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1절)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발트(H.Ewald)는 본문의 '형제'라는 말을 '민족공동체'라는 말로 해석하여 "민족 공동체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뭏든 그것이 가족 공동체든, 민족 공동체든, 공동체가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할때, 과연 이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 연합하는 신앙의 힘(1절)은 이웃에게 공존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창1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유목민이었을 때는 매우 뜨거운 형제애를 나타내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경문화와 그 사회속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이 아름다운 미풍을 잃어 버리기 시작 했습니다. 사유재산에 대한 의식이 높아 지면서, '내 땅, 내 집'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단란하고 화목 했던 형제애가 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땅을!"(Land for peace!) -  이 구호는 오늘 분쟁이 쉴 겨를 없는 중동사태의 핵심을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불법으로 빼앗은 땅에 눌러 앉은 이들이 힘없어 빼앗긴 연약한 자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기 전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것이 단지 중동지역에만 국한되는 슬로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겐 이젠 공존의 그늘이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속이고,억압하고,살해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자고, 연합하자고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지분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공존을 모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함께 사는 일에 서툰 것 같습니다. 아직도 미결 상태로 남아있는 국제문제들중 하나가 우리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현대세계의 모든 전문적인 지식과 가공할 무기들이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위한 시도들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은, 아무도 진정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선언만 무성하게 늘어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공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이 땅의 현실 입니다.


인간들의 가식적 선언이나 동맹들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녕 연합하길 원한다면 이 끝없는 욕심과 분열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희년(禧年)정신으로 돌아 가야 합니다. 물질을 돌려 주고, 땅을 내어주고, 종된 자에게 자유함을 주고,별리의 아픔 속에 거하는 자에게 만남의 기쁨(레25:)을 선사해야 합니다. 모두가 여호와의 샬롬(shalom)을 누릴 자리를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역자들의 인격을 통해 오셔서 "평화를 선포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의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이땅이 극심한 분열 속에서도, 한줄기 소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분단 반세기를 눈물과 기도로 보내던 남한과 북한의 교회 지도자들이 '남.북한 교회가 함께 하는 희년 5개년 사업'을 함께 추진 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올해는 그 2차년도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교회 저변에 평화통일교육 확산 작업'을 활발히 추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합하는 신앙이란 생명 사랑운동이며 완전히 조화된 나와 너의 관계성의 극치인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란 이지러짐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완전한 상태인 것입니다. 자리를 내어 줍시다. 함께 사는 선하고 아름다움을 위하여!


둘째,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우리 민족공동체를 성결케(2절) 할 것입니다.


앨런 P. 로스는  "기름이 아론을 성결케 하듯 예루살렘에서 연합하여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 나라를 성결케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연합하는 신앙의 힘이 민족공동체를 성결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처에 천방지축으로 피어나는 독버섯과 같은 부패를 봅니다. 우리는 금년들어 희귀한 용어 하나를 배웠습니다. '돈세탁'(Money Laundering)- 검은 돈에서 검은색을 탈색시켜 합법적인 자금으로 둔갑시키는 과정.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어떤 성결(?)의식을 우리는 대하게 된 것입니다. 남들이야, 국민들이야 어찌되든지 철저한 이기주의로 분열된 이땅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정작 세탁되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들의 검은 마음인 것입니다. 동서독의 통일에 대해 우려했던 한 목소리는 도덕적기초가 부실한 공사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윤리적 기초가 없는 연합은 사회를 혼탁케 할 뿐입니다. 요세프스의 유대인 고대사에 의하면 그리심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요4:)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적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것의 문제는 그것이 신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략적 차원에서 계획되고 지어졌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교활한 정략적 계산과 타락한 제사장 므낫세의 배교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남과북,정당과 정당,집단과 집단이 통합을 이룰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연합이 갖는 어떤 공동의 가치관인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듯,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선 신앙인의 연합만이 이 땅을 성결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의 열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민족 공동체의 소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썩을대로 썩어서 다시는 재생이 불가능할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 되고 있지만,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기적을 낳게 할 것입니다.


셋째,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이 땅의 생명력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3절)


커크파트릭(Kirkpatrick)은 "형제들이 단합하여 화목함이 그 나라에 주는 영향은 마치 이슬이 채소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스런 기름으로 성결케 된 이땅의 성도들이 연합하여 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 주고, 더러운 곳을 구석구석 청소해가면 우리 6천6백만 민족 공동체는 예수안에서 큰 번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헐몬산으로부터 시온산으로 흘러 내리는 이슬!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흘러내리는 축복! 번영!  절망의 만성화로 찌든 이땅에 연합하는 신앙의 힘은 힘찬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것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8월, 이 땅은 우리의 이러한 뜨거운 연합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오래된 분열과 분단의 만성화. 그래서 우리에겐 비젼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것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라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