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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탄 이야기 설교 - 믿음의 확증을 찾아서

2007.12.23 23:04

김성찬 조회 수:923 추천:46

믿음의 확증을 찾아서 / 눅 1:26 - 56

 

한 여인이 종종 걸음으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자태였으나,그녀에게는 뭔가 모를 신비스러움이 내재해 있는듯 보였습니다. 주위에 눈길 한번 주는 일 없는 그녀는 가끔씩 발을 헛딛어 넘어질뻔 하면서도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뛰는듯 걷기도 하여 함께 길을 가는 낯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 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한편으로 뭔가 긴히 전해야할 소중한 소식을 가슴 가득히 품고 먼 길을 나서는 어떤 전령과 같은 긴장과 흥분도 그 여인에게서 물씬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은 예삿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아직도 앳된 한 처녀가 홀로 나서기에는 아주 멀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이 오늘날 같이 발달되지 못한 지금부터 약 2천년전의 일입니다. 그녀가 출발한 갈릴리에서 부터 그녀가 가고자하는 유대지방 예루살렘 근방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약 80-110km의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먼 길을 한 눈 팔 정신없이 한달이상을 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마지못해 먼길을 가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무엇이 나타나 뵈고 있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에 홍조를 띤듯해 보였고, 뭔가 자기만 아는 값진 비밀을 간직한듯한 사람이 가질 수있는 어떤 긴장감이 언뜻 언뜻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단거리 100m를 단숨에 질주한 스프린터의 쾌감으로, 한달여의 멀고 험한 여로를 피곤도 잊은채 내쳐 달린 처녀 마리아는, 드디어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과 제사장 사가랴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 근처 언덕배기에 다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을 때, 그녀는 먼 여정을 뒤돌아보며, 그녀가 왜 이렇게 황급히 길을 나섰으며, 뭇 사람들이 의아해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생각하며 남모른 우수에 잠시 젖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한 의문이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대학입학 시험을 불안한 가운데 치룬 학생이 합격자 발표장에 들어 서기 직전의 갖게 되는 마음과 같은 설레임이자 불안과 기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전, 어느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정숙하기로 소문난 처녀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 마을의 건장한 청년 요셉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이미 약속한 상태였었습니다. 요셉은 매우 신실하였고 그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몸과 마음이 한몸을 이룰 혼인예식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이 순결한 처녀 마리아에게 예측할 수 없었던 기묘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녀가 수태케 된 것입니다. 그녀의 약혼자 요셉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 일의 자초지종은 이러 했습니다.

 

그 이상한 밤, 마리아는 잠자리에서 깜짝 놀라며 깨어났습니다.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눅1:28).”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라고 하는 이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천사는 두려움에 떠는 마리아에게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0-33).”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절초풍할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수태라니, 수태가 무슨 말인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그 질문에는 관심도 없다는듯 계속해서 다시 이렇게 일방적 선언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하던 이가 이미 여섯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5-37).”

 

미처 피할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파상공세에 혼절하듯, 엉겁결에 마리아는 그의 위엄과 권능에 눌려 넋을 잃은듯 이렇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대답하고만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떠났습니다.

 

이런 신비스런 밤을 보낸 후, 마리아는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수태, 수태라니... 사내를 알지도 못한 처녀인 내가?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가...”

이렇게 어찌할바를 몰라 안절부절해대다가, 문득 천사의 말 가운데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기억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그 할머니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제밤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은밀히 엘리사벳의 집엘 한번 찾아가보자. 그 천사의 말대로라면, 어젯밤의 신비가 사실이라면 그곳에서 나는 어쩌면 이 수태의 비밀을 확증케될 것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마리아는 곧장 망설임없이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수태의 비밀을 확증해줄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그의 친족 엘리사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먼길을 이 가냘픈 여인이 단숨에 뜀박질하듯 달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 믿음의 확증을 얻는 길은 결코 가까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얻고자하는 믿음의 확증을 위한 길은 제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소망의 길이었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불안을 평안으로 바꿔줄 길, 생명과 환희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믿음의 확증이 보다 더 요구되는 시기인 것만 같습니다. 어디에 우리의 믿음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없을만큼 우리는 불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도 이 믿음의 확증을 위한 신앙의 인내를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가냘픈 여인의 믿음의 확증을 위한 수고를 기억해 봅시다. 당장에 뭐가 안보이는 것 같다고 포기하지 마십시다. 믿음의 역사는 소망의 인내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녀 마리아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엘리사벳이 외치는 큰 감격의 소리를 듣게된 것입니다.

 

“마리아여! 여자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이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는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눅1:42-45).”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마리아는 그녀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수가?”

그녀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은혜의 비밀은 하나님의 천사와 자기 밖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수 백리 떨어진 곳, 이 예루살렘 지경까지 그 누가 이 소식을 알렸겠는가? 기이하다,기이해.

“어머나! 이 사람이 누구야? 마리아아냐, 마리아.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먼 길을 소식도 없이 찾아왔나? 아니, 무슨 일로...” 이렇게 말해야 당연할 것만 같은데...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 은혜의 비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받은 바 은혜, 그 믿음의 확증을 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체함 없이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믿음의 탐색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게될 믿음의 확증의 징표를 예비해 놓고 계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놀라운 은혜, 그 신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엘리사벳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미처 확인해 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엘리사벳에게 역사하셔서 마리아 자신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복된 여인임을 지체없이 확증 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 하나임의 치밀한, 빈틈없는 구원의 계획 그 은혜와 섭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크신 은혜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찬양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한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의 비난과 비방도 그 은혜 앞에서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약혼녀가 자신과 동침한 일도 없이 임신한 사실 앞에 의구심을 가지고, 욕해 대면서 파혼을 선포할지도 모를 상황과 앞으로 있게될 약혼자 요셉의 책망도 결코,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그의 것이신 주(대상29:11)”께서 절대로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신때문에 능욕을 받지 않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눅1:46-55).”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수치(?)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 십자가의 능욕(?)을 통해 “지극히 높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주(빌2:9).”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과 기적 앞에 서서, 그 분을 부끄러워하는 바로 그 자리에 믿음의 비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비밀을 부끄러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의 부활,그분의 다시 오심 등등. 그래서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성육신 하신 이 복된 계절에도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 다같이 믿음의 확증을 소망의 인내로 얻은 마리아의 찬양에 귀기울여 봅시다. 거기에는 의심도, 수치도, 불안과 절망도 더 이상 없습니다. 다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레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찬양과 주님을 향한 기쁨에 설레이는 가슴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감격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감격이란 말의 영어 ‘ENTHUSIASM'이란 단어의 어원이 ‘엔 테오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감격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벳 뱃속에 있던 세례요한의 감격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격이 없다고, 나는 왜 예수를 믿은지 십수년이 되었으나 냉냉하다고 불평해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 귀한 계절 주께서 오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찬송을 불러도 나에게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임하셨습니다. 그 믿음의 확증을 얻기 위해 힘쓰십시요. 그 확증이 말씀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하는 바로 그 자리에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회의가 깊은 곳에 진리를’ 주시는 하나님. 믿음의 확증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베푸신 사랑. 그 약속 안에서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