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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689: 주의 은혜의 해-더불어 행복,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주일설교)
2011.03.27(주일)

주의 은혜의 해-더불어 행복,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 14: 13-21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


다 같이 한번 따라해 봅시다.
오늘 나는 나의 사명을 주안에서 발견케 될 줄로 믿습니다.

사명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나의 사명을 발견하는 예배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주께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우리의 일상을 복원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흠집투성이요, 상처투성이인, 결함, 결손 투성이인 우리의 삶을 정상화시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끼 밥을 못 먹는 아이에게 세 끼 밥을 먹게 해주고, 잠자리가 없는 아이가 제 자리에서 따뜻하게 잠들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일터가 없는 사람이 출근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예배할 줄 모르는 사람이 예배하는 영적인 행복을 우리가운데 복원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에게 허락하신 행복을 하찮게 생각하고, 내일에 대한 염려나 자랑 또는 아픈 과거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복과 은혜를 세어보며 감사하며, 복된 일상의 행복을 깨닫고, 누리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지난 주일 주의 은혜의 해 - 일상의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경청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주의 은혜의 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일상의 행복 회복과 누림’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행복은 홀로 오지 않습니다. 그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옵니다. 홀로 행복해지는 세상이란 없습니다. 나와 이웃이 동시에 행복해져야 참 행복이 됩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더불어 행복’입니다. 이웃과 일상의 행복을 더불어 나누고,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란, 더불어 행복으로 완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주제가 주의 은혜의 해-더불어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병이어 사건은 벳새다 들녘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먹이신 사건입니다. 저물녘에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측은히 여겨 먹을 것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벳새다 들녘에서 굶주리고 있는 군중들을 가리키시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백성들을 위한 제자들의 책임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

이것이 행복의 완성입니다. 그것이 주의 은혜의 해를 완성하고, 확장하는 제자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당황해 했지만, 이내 한 어린아이가 자신의 일상의 행복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오병이어)를 더불어 나누므로 더불어 행복인 주의 은혜의 해가 그 빈들에 임했습니다. 그 빈들에 더불어 행복이었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더불어 나눔이 빈들 공동체에 행복을 가져왔습니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는 나만의 부요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이 땅은 어떻습니까? 이 정부의 수장이 장로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기아선상에 헤매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게 쌀 한 톨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제 선친의 고향이 이북입니다. 평북 영변입니다. 삼백년 동안을 그 고장에서 우리 선조들이 사셨습니다. 어제 나는 이북5도회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네들의 구호는 오늘도 한결 같습니다. 멸공통일 뿐입니다. 때려잡자 김일성입니다. 그래 다 좋습니다. 그래도 북한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쌀을 보내줘야 합니다. 미국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움직이니까 마지못해 미적거리는 행위는 전혀 주체적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다. 쌀-정치공학자들은, 이렇게 말하면 좌파라고 비판합니다. 그래 한번 따져 봅시다.

우리 가문만큼 빨갱이들에게 당한 가문도 별로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영변고을에서 이름 난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마자 그 고향에서 우리 일가가 다 쫓겨났습니다. 문전옥답, 대궐 같은 집 다 빼앗기고, 함경도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다가 우리 일가는 6‧25 동란 통에 남하했습니다. 우리 선친께서는 흥남에서 인쇄소를 경영하시다가, 소련군의 수탈에 견딜 수 없어, 1947년 배를 한척 사서 동해안으로 탈출했습니다. 집에 불 환히 켜놓고, 월남하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무조건 뭍에다 배를 댔는데, 그곳이 남측 주문진이어서 우리는 생명을 구했습니다. 빨갱이들로 인해 우리 가문은 멸문당해 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외가 또한 빨갱이들에게 멸족당해 버렸습니다. 우리 외삼촌 두 분 모두 빨갱이들에게 6‧25 동란 통에 어디론가 끌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 가문은 친‧외가 모두 빨갱이들에게 멸문 당해 버린 가문입니다. 이런 내가 좌팝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의 사랑으로 굶주린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예수 우팝니다. 제 3세계는 도우면서, 왜 우리 동족들에게 쌀 한 톨 안줍니까. 이게 한 형제자매입니까? 이게 한 민족입니까? 이후 50년, 100년만 지나 보십시오. 이 배부른 시대를 산 우리들이 주린 동족에게 행한 일들에 대해 민족 역사는 준엄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남한이 누리는 일상의 행복만으로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원자로의 문제가 쓰나미보다 무서운 사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 숙적 일본이 무너지니까 우리가 행복해진 겁니까? 일본이 무너지고, 핵 재앙이 더 심화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우리네 몫이 됩니다. 지구촌시대인 21세기는 우리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더불어 행복해져야 합니다.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시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살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아는 젊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후배가, 제가 지난 겨울 구제역 방제에 골몰해 있던 강원도 땅에 진입해 들어가면서 쓴 시 한편을 읽더니, 송경동이라는 시인을 소개해 줬습니다. 제가 쓴 시는 흔들바위처럼 흔들리나 결코 무너지지 않던 강원도의 힘이 구제역 앞에서 무력화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읊조린 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얼리즘을 고양시키라며 송경동 시인의 시집을 저에게 그가 추천해 줬습니다. 송경동 그는 노동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을 사서 전철을 오가면서 읽었습니다. 내 젊은 날의 애린의 편린들이 살아나며, 내 속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 나는 신자들을 차별했습니다.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나는 공평을 이야기 하면서 차별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옛적 초창기 개척 멤버들의 때깔을 운운하면서 나는 아무나 내 신자가 아니다 라는 그릇된 생각에 꽉 차 있었습니다. 친구나 목회자들을 대하는 입장도 그랬습니다. 노동시인의 거칠고, 천박한 리얼리즘조차 나는 기피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는 맘이 가지 않아 읽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 추한 자들의 친구는 예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예수와는 나는 무관했습니다. 고상한 영성이란 말이 신앙 안에서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지만, 나는 내 스스로 고매한, 인텔리겐치아 연 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사람위에 사람 없다고 외치면서 난 참 사람을 차별한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자도 차별한 사이비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전철 안에서 내내 울었습니다. 기독교적 리얼리즘으로 살자. 형상화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를 살자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그 편견에서 벗어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 다가서기로 했습니다. 안 보던 신문도 보고, 시청하지 않던 저녁 9시 뉴스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고, 북한의 기아가 곧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 묶여 있습니다. 고공 시위를 벌리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이 우리네 생생한 현실입니다. 가난한 자, 못 배운 자, 눌린 자, 장애자들이 한 몸인 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발붙이며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한 몸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행복이란, 이웃과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차별이 바로 자신차별입니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세상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 속에 빈들의 충만한 행복의 비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한 어린아이가 가진 것 전부를 공유하자 빈들의 기적이 임했습니다. 더불어 행복으로 주의 은혜의 해가 임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빈들의 더불어 행복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명언이나 명구 또는 예화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중들은 한 시간 설교 후에, 설교의 주제가 아닌 특정한 예화만 기억합니다. 예수를 기억하지 않고, 예화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이야기가 아니면 거의 예화를 인용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앞선 시사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주제로 이끄는 도화선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속으로 들어갑시다. 그런데 사명에 관해 한 명언을 인용합니다. 칼 힐티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이 시간 사명을 발견합시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되게 합시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다 응답되던가요? 기도는 매번 응답되지 않습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이 응답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만날 달라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뭡니까? 단 한 마디의 기도라도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뤄지는 것. 그것이 기돕니다. 그것이 사명을 발견하는 기돕니다.

저는
지난 주 금요일 기도원엘 갔습니다. 아내가 기도원엘 가자고 해서 갔습니다. 그동안은 그녀가 기도원가자고 졸라대도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녀는 “다 시시하다 이거지?” 그랬습니다. 그랬습니다. 다 시시했습니다. 기도원에 오는 강사들이 다 시시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목사도 차별하지 말자. 그런 맘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들자, 다들 귀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는 군말 없이 기도원에 그녀를 따라 갔습니다. 갔더니 강문호 목사님께서 설교자였습니다. 재치 있게 강의를 잘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도 읽지 않고 모세이야기 라고 하면서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을 중심으로 설교 아닌 강연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일찍이 지난 주에 이어 ‘주의 은혜의 해’에 대한 두 번째 설교를 하려는 주제에 적합한 이야기를 그분이 하셔서, 여기에 인용하려고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를 모르는 분이 없을 겁니다. 나도 그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목사님이 전한 오프라 윈프리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쑈, ‘오프라 윈프리 쑈’는 시청자가 2천4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녀가 그 시간에 단 10초만 어느 책을 소개하면 즉시 1천(2천?) 4백만 부가 팔려나간답니다. 그런 그녀는 어둔 과거를 지닌 여자입니다. 흑인 남자에게 강간당한 백인 여자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아서, 그냥 버렸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다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그녀를 키운 목사님께서 그녀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보고 학교를 보내고, 보내 그녀는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답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그녀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영혼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는다고 합니다. 

오늘,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는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에서 그녀의 인생철학 4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1.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우리는 축복 그러면, 돈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재능이든 그 무엇이라도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랑거리거나, 자신만을 위해 쓰라는 하늘의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써야하는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축복이라고만 생각하지,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은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한해에 2천억 원을 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물질을 사명으로 알고 소외된 이웃과 나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사명의 반열에 서도록 합시다. 더 이상 설교하면 시험에 들 테니까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2. 남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혼혈아, 고아였기에 당한 아픔을 사명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혼혈아와 고아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이들의 어머니가 오늘, 그녀는 되어있습니다.

파니 제이 크로스비는 생후 6개월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여 평생을 흑암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한 후, 그녀는 주옥같은 찬송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영혼하신 기업 등등. 숱한 찬송 시 속에 그녀는 고통을 창조적인 신앙의 힘으로 승화시켰습니다. Wounded healer 란 말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입니다. 상처를 받았으나 예수 안에서 치료받아, 동일한 상처를 받은 이들을 치유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안고 삽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이 이 시간 예수께 드려져서 치유받길 소망합니다. 다 내어 놓으십시오. 예수는 당신을 이 시간 치유하십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시간 우리를 붙들고 있는 상처는 치유될 지어다! 가난한 자의 복음이요, 눈 먼 자의 광명이시요,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치유 해 주셨습니다. 치유 받은 상처로 타인을 치유하는 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3. 남보다 더 가슴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그 무엇엔가, 누구에겐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그것이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그늘진 곳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고백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가슴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명입니다. 종은 어딜 쳐도 소리가 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디를 건드려도 감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슴 서늘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증인들은 불타는 가슴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죽어가는 영혼들만 보면 구령 열에 불타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넘치길 소망합니다.

 

4. 남보다 더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짐'(문제, 강요)이 아니라 사명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한 번은 녹화장으로 가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했답니다. 그 부담 앞에서 그녀는 녹화시간을 연기해 가면서까지 그 아이를 위한 응급조치를 해 준 후, 녹화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부담이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명자다.

이상 오프라 윈프리가 예수 안에서 발견한 인생철학에 비춰본 사명이란, 남보다 더 가진 축복, 남보다 더 아픈 고통, 남보다 더 설레는 감동, 남보다 더 부담되는 짐이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명이 있는 자입니다. 축복, 고통, 설렘, 짐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담이 사명인 줄 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고 명하셨을 때에,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6:7)
라고 대꾸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돈 걱정하는 우리를. 인색한 우리를. 계산적인 우리를. 가슴이 없는 우리를. 믿음이 없는 우리를.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그것이 있었습니다. 부담이 사명이었던 어린아이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명 감당한 한 어린아이로 인해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측면에서 사명의 기적을 이룰 부담이 발생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이틀 동안 거제도를 다녀왔습니다. 물질적 헌신을 자원한 친구 목사님의 사명에 편승하여, 나도 경제적으로 힘든 목회자들을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그 일정이 나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었습니다. 내가 물질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어도 그 부담을 사명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담을 사명으로 받아들인 몇, 몇 목사님들의 사명에의 헌신으로 우리는 사랑과 감사가 충만한 은혜로운 일정을 함께 보냈습니다. 주의 교회를 세워가다가 극한 곤경을 겪었던 목사님께서 “예수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찬송을 부르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우린 그 상처가 은혜 안에서 회복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 행복을 함께 누리면서, 주의 은혜의 해가 그 교회 위에 속히 임하길 간구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축복을 사명이라 여기고, 부담을 사명이라 여긴 목회자들 때문에 모처럼 우리는 더불어 행복해 했습니다.

지방회장단 동기 가운데 하루에 네 번씩 투석을 해야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와 그의 아내가 우리 모임 잠시 들렸다가 울며 갔습니다.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돌아 와 가만히 기도하면서 일기를 쓰는데 하나님께서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고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 동기 목회자를 물질로도 돕는 일을 벌였습니다. 난 10만원 밖에 못했는데, 예상치 않았던 충북 음성 오세현 동기는 50만원이나 도왔고, 부산 황용득 동기는 두 차례에 걸쳐서, 이 얼마나 애틋합니까. 두 번이라니. 얼마나 설렜으면……, 오 주여, 그에게는 하나님의 감동감화하심이 차고 넘쳤는가 봅니다, 30만 원 도왔습니다. 해서 십여 명이 200만원을 모아 보냈습니다. 정말 그것이 우리의 부담이었으나, 기적을 이룰 사명이었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물질이나, 재능이나, 건강이나, 시간이 없어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맘이 없어서 못합니다. 사명이 없어 못합니다. 예수가 없어서 못합니다. 성령에 붙들리지 않아서 못합니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는 "제 것을 그 누구도 제 것이라 셈하지 않는" 유무상통 공동체였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요셉, 사도들이 일컬어 위로자, 바나바로 부른 그도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과부의 두 렙돈은 그녀의 전(全) 재산이었습니다.(눅21:1-4) 그 구차한 가운데서 드린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죕니다. 누가 누구를 돕습니까? 놀랍게도 세상은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이웃이었습니다.(눅10:36-37). 두 렙돈의 과부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명에의 헌신을 배웁시다.

엊그제 들은 이야깁니다. 한때 술을 좋아해 술 못 이었던, 청학리 황 장로님은 몇 해 전에 작은 교회 청소년부 아이들 몇 명을 맡았었습니다. 그가 그 사명을 심히 부담스러워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청소년부를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눌 만큼 부흥시켰다고, 그 담임목사님이 감동을 실어 전했습니다. 그 기적 같은 전언을 들으며 나는 그 부흥이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능력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잠 못 이루게 한 영적부담이 오늘의 그 부흥을 가져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늘 지구촌 곳곳에서 사명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를 우리도 만납시다. 죽음이 사명이신 예수를 깊이 알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빈들에서 돈 타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부활의 주를 만난 후, 그들도 사명을 위해 죽었습니다. 이 시간 사명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의 사명을 내 사명 삼읍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되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주님의 사명을, 내 사명 삼읍시다. 현실을 외면치 말고, 현실을 직시합시다. 현실을 돌파합시다. 부담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복종합시다. 그러면 우리도 큰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세어 봅시다. 더불어 나누라고 내게 맡기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벳새다 들녘에서 더불어 나눈 그 어린 아이보다,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치유 받은 보배로운 상처를 내가 지니고 있는지. 주신 복을 세어보고 동서남북 으로 나눕시다. 그래서 빈들의 기적을 우리 안에서 이룹시다. 이 시간 그 결단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이 말씀에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아멘 합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

아멘,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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