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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693: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주일설교)
2011.04.03(주일)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누가복음 5장 1-11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솔로몬이 연모하는 술람미 여인을 일깨우는 사랑의 봄입니다. 아가서 2장 10-13절입니다.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잠자는 풀씨들

새 봄입니다. 산과 들에 새싹이 움트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혹한 속에서 어떻게 견디다가 살아 움직이는지 참 신기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신비를 살펴보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보통 1㎡의 밭에 7만5천개의 풀씨가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풀씨들이 물과 온도가 적합하고 햇빛을 보기만 하면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과 온도가 적합해도 햇빛을 못 보면 싹을 틔우지 않고 땅속에서 10년~20년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숱한 말씀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씨라고 합니다. 풀씨라고 하는데, 우리 속에 적어도 말씀의 씨앗이 7만 5천개 이상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어왔습니까? 하루에도 숱하게 많은 말씀을 듣는다. 성경에서, 책에서, 방송에서 심지어 공중화장실에서도 우리는 말씀을 대합니다. 이렇게 숱한 말씀의 씨가 우리 속에 뿌려져 있는데, 우리가 꽃피워서 향내를 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 남들의 영을 살리는 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의 씨앗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풀씨가 싹을 틔우지 못하는 이유는, 물과 온도가 적합해도 햇빛을 못 보면 싹을 틔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땅속에서 햇빛을 쬐일 때까지, 10년~20년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빛 되신 예수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의 찬양은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또한 요한사도는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말씀들이 꽃 되고 열매되게 하려면 우리는 빛 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주의 은혜의 해, 그 일상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 기간 중 함께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주님

그러나 벽에 부딪힙니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십니다. 누가복음 4장 23-2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말은 “니나 고쳐 봐” 그런 말입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는 말은 “여기서도 한 번 실력 발휘해 봐,” “그 재주 여기서도 한번 피워봐”란 비아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긍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주목하여 본 사람들

여기서 고향이란 나사렛만이 아닙니다. 묵정밭, 기신자, 직분자, 모태신앙인, 선민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입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선택 받은 존재라고 뻐겼습니다. 그들의 심령을 대변하는 한 마디는 ‘오만’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의 씨앗들이 예수 안에 있는데 꽃피고 열매 맺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심령이 오만하고, 불신앙과 불순종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사렛으로 표현되는 예수를 배척한 사람들은, 말씀이 아닌 사람만을 주목하는 이들입니다. 강단에 선 사람만 주목하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피폐해 집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보다 사람을 주목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 화요일이었습니다. 친구 목사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한다고 해서 갔습니다. 강사 목사는 내가 잘 아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헌금기도 시간 전에 강단에 올려진 헌금봉투들을 손으로 들고 일일이 헌금봉투마다 한 말씀씩 던졌습니다. 내가 올린 헌금봉투를 들여다보다가 그가 나에게도 말씀 한 구절을 선사했습니다. 내게 던진 말씀은 잠언 27:23절이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얼른 찾아봤더니, “내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감사히 받기보다 나는 이렇게 속으로 내뱉었습니다. “성구들 외우느냐 고생 좀 했겠는데.” 이랬습니다. 마술의 이면을 들여다 본 아이처럼 난 그렇게 그 순간을 대응했습니다. 너무 잘 알아 병입니다. 예수를 너무 잘 안 나사렛 사람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입니다. 나사렛은 묵정밭 같습니다. 그 밭을 갈아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칭찬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살전 2:13).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닌, 말씀을 주목한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때 묻어 반질거리는 불신앙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시대의 사렙다 과부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어 엘리사 시절의 수리아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드십니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6-27).”

26절에 나오는 엘리야가 보냄을 받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 8-16절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 사건을 가리킵니다. 사르밧과 사렙다는 같은 지명입니다. 사르밧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지명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식 표기인 ‘사렙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르밧(사렙다)은 당시 바알 숭배의 원산지였던 시돈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이 아닌 이방여인의 공궤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수치나, 이방 족속에게는 긍지요, 기쁨입니다. 그 어떤 음지나 흑암 속에도 구원의 빛이신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27절의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문둥병자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 입니다. 아람(수리아)은 앗시리아에게 먹혔다가 다시 주권을 회복한 나라입니다. 그 주권 회복의 선봉에 섰던 장군이 나아만입니다. 그가 문둥병에 들었으나 엘리사를 통해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패역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선민들을 깨우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메시지인, 우주적인 은혜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28-29)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든 예화가 유대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예화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치켜세운 예화를 드시는 예수님을 저들이 매국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국노를 처단하는 방식,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는 수법을 그들은 사용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히 그 자리를 빠져 나오셨습니다. 말씀이 당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하심으로 저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이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기적을 이룬다는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은 한 결 같이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그들은 이방인, 새 밭, 새 신자였습니다. 신심이 깊고, 단순하게 순종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주목하여, 경청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주님을 배척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저는 제 안에서 의분이 확,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방인들의 단순한 순종에 대한 예를 드셨을까?
예루살렘이 얼마나 패역했으면, 안타까웠으면 우셨을까?(눅19:41)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이들을 찾아 나선 주님

그랬어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마15:24)는 말씀을 내뱉으신, 선민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제 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않고 유대인들 중에서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찾고 찾으십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제자를 찾으십니다. 6개월 전에 만났던 시몬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6개월 전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장차 반서, 게바라 하리라 예언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0-42입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그러나 시몬은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가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1-11절입니다. 6개월 전에 예수를 만났고, 그 안에 말씀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 말씀은 땅속 풀씨처럼 그 속에서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났으나, 예수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절실히 주님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을 찾으셨을 때, 시몬은 다소 허탈한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부들에게는 병가지상사입니다. 그날은 고기가 잘 안 잡힌 것뿐입니다. 그랬어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통하지 않는 밤을 보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 -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말씀이 섬광처럼 발했습니다. 그러자, 시몬이 즉각적으로, 그대로 순종합니다. 여기에 시몬의 깊은 영성과 제자 됨의 자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명명된 장차 게바라는 주님의 영적암시가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쳤는지도 모릅니다. 그 맘속에 자리 잡은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인 말씀의 빛을 대하자 그 말씀의 씨앗이 일순 움을 틔운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 데란, 그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말씀을 따라 단순하게 순종하여, 말씀대로 그물을 내던진 행위를 말합니다. 내 방식, 내 지식, 내 경험이 아닙니다. 그 ‘내’가 해 본 모든 것과는 다른 예수의 말씀대로 행한 행위를 우리는 ‘깊은 데’라고 말합니다. 깊은 데란, 자신이 없어 주저하는 곳입니다.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졸여서 못가는 사람의 연약한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담대함으로 맞서는 곳, 바다 저 한 가운데가 그 대상입니다.

그래서 깊은 데로 나아간다는 것은, 깨지는 것입니다. 깨진다는 말은, 살림이 망가지고, 건강이 약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심령이 깨져야 합니다. 내 욕심, 내 판단, 내 의지, 내 관습, 내 교만, 내 경험 등등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선의 기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선의 기적이 이룬 제자 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깊은 데란, 내 마음의 교만이 아닌, 빛 되신 예수의 말씀을 순종으로 대면하는 곳입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는 즉각 말씀을 받아 순종합니다. 담대히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주의 은혜의 해, 만선

그러자 즉각 만선의 기적이 임했습니다. 이 만선의 기적은 시몬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복원시켜줬습니다. 먼저, 주의 은혜의 해 - 일상의 행복을 복원시켜 주신 은혜를 시몬은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6)." 그리고 또한,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7).” 이는 주의 은혜의 해-더불어 행복입니다. 만선의 기적은 주의 은혜의 해 - 일상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을 다 누리게 했습니다.

땅의 기름진 복과 하늘의 신령한 복

그 말씀에 의지한 그물은 깊어

배를 가라앉힌 만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시몬은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먼저 땅의 기름진 복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배만 만선이 아니라, 이웃의 배까지 만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는 일상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을 누렸습니다.

만선이 가라앉힌

사람 낚는 배

그리고 동시에 만선의 기적은 자신을 낚았습니다. 예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총 같은 시몬이 반석인 게바(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0b-11).” 이것이 말씀대로 순종한 베드로가 맛 본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의지합시다. 착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착하다는 말은 ‘나’를 주어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를 주어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착해도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해도 말씀을 내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 됨을 아는 고백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온전함은 그분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단순하게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말씀대로 삽니다.

말씀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이 참 복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그랬고,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구세주의 모친이 되었고, 사람이 낳은 자 중 제일 된 요한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7-38).”
그 말씀대로 순종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만선의 복을 받습니다. 참 제자가 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바보 목사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잠자는 복음의 씨앗들이여,
꽃 피고, 열매 맺길 원하거든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지난 주간 나는 한 책을 대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 목사의 저서 『예수를 위한 바보 』(On the road with Jesus, 이상준역, 토기장이)였습니다. 얼핏 들춰 본 소개 글에 의하면, 요한복음 13장 4-5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세족 사역에 부르심을 받게 된, 바보 같은 목사의 발로 쓴 목회 수기였습니다. 그 부제가 눈에 확 띠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입니다. 

데이빗 케이프 목사는 요한복음 13장 4-5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세족 사역에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가 누려왔던 모든 안전과 풍요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주님의 음성에 단순하게 순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황당한(?)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대야를 붙인 십자가를 메고, 주님이 명령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사역을 20여 년이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거리 세족 목회 수기입니다. 순종이 이룬 초자연적인 기적의 현장을 그는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해도 ‘주님을 위한 바보’라면 언제나 기꺼이 바보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순종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삶에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나는 터무니없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데이빗 케이프 목사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하늘 직통계시와 그 계산 없는 믿음의 단순성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그 치밀한 모사와 그 모사를 받든 그 그물의 깊이를.

그래서 나는 여러 성도님들과 이 시간 함께 묻습니다.
그 어떤 말씀이든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간구하며,
내 심령에 잠자는 말씀 풀씨들이 그 빛에 노출되길 바라면서,
함께 묻습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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