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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699: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주일 설교)
2011.04.10(주일)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

요한복음 21장 15-19절

 

지난주일, 

우리는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라는 제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터무니없어 뵈는 주님의 단 한 마디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 시몬 베드로와 현대판 시몬 베드로인 데이빗 케이프 목사의 사건을 보면서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하늘 직통계시와 그 계산 없는 믿음의 단순성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그 치밀한 모사와 그 모사를 받든 그 그물의 깊이를. 그래서 나는 여러 성도님들과 이 시간 함께 묻습니다. 그 어떤 말씀이든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간구하며, 내 심령에 잠자는 말씀 풀씨들이 그 빛에 노출되길 바라면서, 함께 묻습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이상과 같이 우리는 말씀 그대로 순종한 베드로와 현대판 베드로 데이빗 케이프 목사의 순종에 대해 배웠습니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교 신부, 하버드대 교수 헨리 나우웬 입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그는 탈진 했습니다. 깊은 묵상기도가 항상 부족했고, 늘 외로웠고,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는 그 상태를 심리학적으로는 탈진 burnout이라고 명명하지만 영적으로 그 상태가 곧, 성령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 들였습니다.
하여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길 원하는 길을 분명하게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응답이 왔습니다. 사람을 통해왔습니다. 정신지체장애우공동체 라르쉬 설립자 장 바이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네 심령을 치유할 것이다.” 분명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 대학을 떠나 가장 낮은 자들에게로 갔습니다.

사랑의 절망.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무용지물이라 여겼습니다. 자신의 학식, 관계, 명성 관록과 재능 등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그는 사랑의 절망을 앓았습니다. 버리기-현실 지향적 자아를 버림. 그는 버렸습니다. 살려고 버렸습니다. 일의 성취와 관계없이 편안한 맘으로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아는 자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헨리 나우웬의 예는 오늘 말씀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시몬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 구조가 똑같습니다.

다시,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시몬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를 했으나 무일푼이었던 허탈, 탈진을 공식적으로 두 번 겪은 사람입니다. 첫 번째 탈진은 우리가 지난주에 배운 누가복음 5장입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주의 말씀을 의지했다가 만선의 기적을 맛보았고, 만선의 기적에 자신이 낚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길에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3년여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보내고,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목격했음에도 그는 고향 바닷가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두 번째 탈진을 겪습니다. 다시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그의 이 두 번째 탈진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를 3년여 따랐으나 그에게는 오늘처럼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더해 예수의 죽음으로 그는 졸지에 입신양명의 줄이 끊어져 버렸고, 국사범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에게는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연 후에도, 그는 자기를 포함한 제자들 일곱 명과 작당하여 고향 바다, 생업의 터전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런 실의와 허탈 속에서 내린 그물에 고기마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은커녕 이젠 고기도 낚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반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진퇴양란의 고통 속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탈진은 예수 믿으면 해소되지만, 예수 믿은 후, 사명 받은 후 겪는 탈진은 쉽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없는 만선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요삼1:2)”한 전인적 형통이 성경적입니다. 영혼이 잘돼야 살림도 부흥합니다.

그의 문제는 방향에

바로 그 절체절명의 실의 속에 있던 시몬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니(요21:6).”

그는 만선의 기적을 다시 맛봅니다. 다시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주님.(시103:5) 예수 안에 만선의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선은 깊은 곳이 아니라, 오른 편에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의 문제는 방향에 있었습니다. 그는 주와 동행, 동고동락, 헌신, 충성 한다고 하면서 왼편 세상으로만 눈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3년 전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라는 물음에 “나를 따라 오너라.”하셔서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말씀에 즉각 순종했고, 말씀대로 행했는데 이게 뭡니까? 골고다라뇨? 그는 내심 무력한 십자가상의 예수께 항의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났지만, 그는 예수를 좇지 않고 게네사렛 호수로 돌아와 버렸던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따르면서 현실지향적 자아를 충족 시켜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니 내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한때 이런 기발한 고백도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그의 관심은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부(富)였습니다. 호랑이 앞서가는 여우처럼 예수님 앞에 나서서 거드름을 피워댔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방향이 다른 충성을 해 놓고서는, 제 눈에 뵈는 소득이 없자 화가 나고, 속이 상하다고, 예수를 멀리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지난 3년여 주와 함께한 것은 무지한, 무익한 동행이었습니다. 방향이 다른, 목적이 다른 여주동행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예배, 말씀묵상, 기도, 전도, 교육, 봉사, 구제, 충성, 헌신 등등이,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그는 몰랐습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신다고 생각합니까?
돈이요? 시간이요? 헌신이요?
그는 주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할 만큼 했는데, 맘에 기쁨이 없습니까? 열매가 없습니까? 방향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한 예배, 말씀묵상, 기도, 전도, 교육, 봉사, 구제, 충성, 봉헌, 헌신 등등. 이 모든 것이 바른 방향인지 살펴봅시다. 진정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 낙담의 현장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쫓아와서 예수님께서 그런 그에게 다시 만선으로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묻습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

그러자 예수님께서 외려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라는 질문 앞에서 그동안,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물질이나 육체적 헌신이나, 정신적 충성이나, 영적 헌신이라 생각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길거리 세족식에 나서는 것, 정신지체장애우 곁으로 가는 것,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가 되고, 직분자가 되고, 성도가 되는 사명에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고, 직분자가 되면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다 이뤄드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는 물질이나 몽땅 바치라는 맘몬 같은 하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명의 헌신에 낙담해, 주님을 기피했던 시몬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의 이 뜻밖의 질문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에 그 정답이 들어있음을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예수사랑’입니다. ‘예수사랑’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량공세로, 억지충성으로 주님을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정말 방향이 달랐습니다. 돈 몇 푼 냈다고, 땀 몇 방울 흘렸다고 예수 제일로 잘 믿는 척 했습니다. 거드름 피웠습니다. 겨우 3년 주님 따라다녀 놓고 제일로 충성한 척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세 차례나 주님께서는 시몬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시몬은 ‘총’이라는 성질 급하고 더러운 옛사람 이름이고, 베드로(게바)는 사명을 나타내는 새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 부르십니다. 아직 멀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과는 아직도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과 무관한 제자를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타는 가슴으로 묻습니다. 시몬에게 묻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성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말.

그런데 이 말에 시몬베드로가 처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하다가, 나중에는 우물쭈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거듭해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동일한 세 번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진의를 눈치 빠른 시몬베드로가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그에게 거듭 물으셨지만, 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기억났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주시던 밤에 들었던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는 말씀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끝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주님. 그러나 주님과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한 그는, 그 끝없는 사랑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 더 힘들다는 사실은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고백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알고 보면 쉽고, 귀합니다.

하나, 그 사랑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설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무슨 말씀입니까? 이는 내 사랑은(멍에)는 쉽고, 내 사랑(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지는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그래서 쉽고, 가볍습니다. 아이를 안은 엄마의 팔은 쉽고, 가볍습니다. 사랑이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 사도도 이후에 그 쉽고, 가볍게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 사랑으로 순교했습니다. 그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으로 충성하고, 헌신하면 무겁고, 힘든 사명이란 없습니다. 탈진도 없습니다. 늘 승리합니다.

둘, 그 사랑은 행복입니다.

고(故) 청마 유치환 선생의 ‘행복’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얼마나 멋진 시(詩)입니까? 사랑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의 받는 것보다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감 있는 기독 시인 고(故) 윤동주 선생은 ⌜십자가⌟ 라는 그의 시(詩)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삽자가가 허락 된다면.” 행복한 예수. 그분은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사랑이란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로 행복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저주하는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말씀이 지금 제 귀에는 “나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행복선언으로 들립니다.

그 사랑의 절망과 완성

우리를 향한 사랑에 절망했던 하나님께서는 갖은 방법으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시려 했습니다. 선민 삼고, 홍해를 갈라주시고, 부강케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어르고 달래셨으나 도통 그 사랑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까지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4-5,9-10).”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고,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지만 그 아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절망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제자들조차 육신으로 오신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그분은 다 이루셨고, 그 사랑의 완성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는 그 사랑으로 행복한 사나이셨습니다.

그 사랑을 사랑하라

성도 여러분! 삶이 고단합니까? 내가 무용지물 같다고 여겨지는 현장에 있습니까? 그래서 절망하고 계십니까? 그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사랑을 사랑하십시오. 예수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 사랑의 십자가는 쉽고, 가볍습니다. 십자가로 보여주는 사랑은 행복합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 이 쉽고, 가볍고, 행복한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 사랑에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의지하며, 증거 하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에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같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일(업적)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잘나고, 잘해서 우리가 사랑합니까? 부모 됨의 의무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가운데서 창조하셨고, 아들까지 주시어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진정한 근본인 그 사랑을 전하도록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그 사랑을 전해야할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그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절망하지 맙시다. 헌신과 희생의 열매가 없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시몬처럼 뒤로 물러서 버리지 맙시다. 자녀가 자책하고, 스스로 절망하여 제 방에 틀어 박혀 있다면 얼마나 부모가 절망스럽겠습니까? 그 사랑에서의 기피. 이것이 하나님을 절망시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수제자의 탈진의 막장에까지 찾아 오셔서 그 사랑을 거부하지 말라고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로 그 사랑을 완성케 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3-39).”

하나님을 절망케 하지 맙시다. 우리도 절망하지 맙시다. 그 사랑은 절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강권하심이 오늘도 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임했습니다.

정리합니다.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
“성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주님의 질문은 우리가 세상과 짝(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자신감을 갖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내가 너-성찬이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나에 대한 사랑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고, 예수 사랑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쉼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제자 됨의 결단도, 헌신도, 물질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5장 “나를 따르라.”는 말씀 그대로 좇은 첫 믿음을 넘어서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사랑의 강권에 응답할 수 있는, ‘나’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 이와 같은 때엔 난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께 이와 같은 때엔 손 높이드네 손 높이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

“주님 제게 뭘 원하신다고요? Ⅱ”
“…….”
“성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시간 우리 마음을 모아 주님께 대답합시다.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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