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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820: 세례요한,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룬 영성 -주일설교
2011.10.09(주일)


세례요한,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룬 영성 

마가복음 1장1-11절


우리가 시쳇말로 내뱉은 모순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 빵에는 국화가 없고, 칼국수에는 칼이 없으며, 쥐포에는 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해학적으로 꼬집는 모순의 문장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순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가는 자기 정체성이 없고, 그래서 정치(政治)가 망치(亡治)고, 아이폰에는 아이가 없지만, 갤럭시폰에는 철학이 없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5일(현지시간) 스티브 잡스가 별세했습니다.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 전화기를 발명한 벨만큼 인류과학문명사에 위대한 발명을 한 사람이라고 그는 평가받습니다. 그의 삶은 다르게 생각함으로(Think Different) 이룬 혁신과 독창성의 집체였습니다. 그는 남다르게 창조했고, 계속 갈망하라, 계속 무모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슬로건을 내세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은 "예수쟁이들에게는 예수가 없다"고 모순의 문장을 구사합니다. 이는 모순된 우리 신앙의 삶을 세상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아냥입니다.

예수쟁이들에게는 예수가 없다.

무엇이 우리 신앙인들을 희화화하고, 교회를 공공의 적처럼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속에 있는 고기가 물을 모르듯, 우리는 “예수쟁이들에게는 예수가 없다”는 말을 잘 모릅니다. 이해할 수 없어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제일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예수를 제일로 잘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알고,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가리켜 “예수쟁이들에게는 예수가 없다”고 비아냥대는 이유는 우리의 삶속에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할 만큼 하노라고 하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변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예수를 알고, 예수를 우리 삶속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가 있는 예수쟁이를 말씀에서 찾아, 우리 신앙의 삶에 모범답안을 찾아봅시다.

예수를 제일 모른 사람은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한 사람(막14:21)이었다고 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그의 삶에서 예수를 가장 잘 드러내 보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를 온전히 드러내 보인 사람. 세례요한이 그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예수뿐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중 제일로 큰 자(마11:11),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세례요한 그는 선지자다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4백 년 만에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믿은 선지자다운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만큼 믿고, 하나님을 섬길 만큼 섬겼다고 자고한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니들 잘 낫다 니들 맘대로 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외면해 버리셨습니다. 이게 말라기서의 내용입니다. 그 후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는 말을 걸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다운 선지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목매어 고대하던 선지자가 4백 년 만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례요한입니다. 하여 온 이스라엘이 들끓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의 말에 회개했고, 그의 삶을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입을 통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부복했습니다.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하느냐, 입니다.

바울의 바울 됨은 그를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로 안내한 바나바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의심해 마지않던 사도들에게 권위자요 인격자인 바나바가 바울 된 사울을 소개했기에 바울의 예루살렘행이 원만한 결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온 이스라엘이 인정한 선지자 세례요한이 있어 예수의 등장은 신뢰할만했고, 무난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데(막1:3),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누가 예수를 소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바로 세례 요한처럼, 바나바처럼 예수를 타인에게 소개하는데 적합한 신앙과 인격적 권위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나의 자녀들이 이런 인격적 안내자 또는 관계 확장을 돕는 명망 있는 산파를 만나는, 관계의 복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멘토, 좋은 길 안내자를 얻는 관계의 복만큼 큰 복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먼저 인격적, 신앙적 성숙을 이뤄 예수를 위한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 또한 인생과 신앙에 있어 좋은 멘토, 길 안내자를 만나는 관계의 복을 얻길 소망합시다.

둘째, 그의 삶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의식주가 차별화된(예수쟁이다운) 사람이었습니다.


1. 그는 삶의 자리(주(住) 또는 장(場))가 남달랐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의 자리는 광야였습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뿌리내릴 옥토 한줌, 의지할 나무 등걸, 피할 바위 하나 없는 황량한 빈 공간입니다. 그곳은 하늘로만 문이 열려 있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할 수밖에 없는 광야에서 그는 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하는 광야에서 그는 살았습니다. 광야 없는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광야가, 예수의 광야가 예수의 예루살렘 행의 시발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가 크리스천다운 자리여야 합니다. 크리스천다운 행실이 빛나는 삶의 자리에 우리는 서야 합니다. 일상의 일터만이 아니라, 잠자리도 단정해야 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경우가 퍽 많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인으로서 가야 할, 서야 할, 앉아야 할, 누워야 할 자리에 자리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구별된 삶의 자리에서 예수를 예수되게 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2. 세례요한은 입고, 먹고 마시는데(의식(衣食)) 있어 단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며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고 살았습니다. 모피 옷을 입고 웰빙 식품만 먹었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가 광야사람다운 옷과 음식을 입고, 먹었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다운 옷을 입고,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엊그제 100분 토론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생방송 토론 전에 폭탄주 8잔을 먹고, 횡설수설했다는 가십성 기사가 문제시되고 있는가 봅니다. 개신교 선교 초기 외국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너무 술에 취해 사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를 바로잡기 위해 조선 땅에서는 술을 금하게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아편을 금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어디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써있냐고 묻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있지만,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고 대듭니다. 여기 잠언 23장을 읽어보십시오.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20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23:19-35)

특히 잠언 23장 29절은 술의 폐해에 대해 여섯 가지나 조목조목 나열하며, 반문합니다. 재앙/근심/분쟁/원망/상처/붉은 눈이 그것입니다. 혼합한 술, 이것이 폭탄줍니다. 그러면서 “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31b)고 엄명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여성들이 립스틱을 너무도 짙게 바르고 다시는 풍조가 만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여러 궁리를 했답니다. 립스틱을 얇게 바르거나 안 바르면 상을 주면서 사치를 억제시키려 했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답니다. 그러다가 어떤 책사가 묘수를 던졌습니다. 이후로 립스틱을 짙게 바르는 여성은 죄다 창녀(娼女)로 여기겠다. 이런 방이 붙은 후, 길거리에 립스틱 행렬이 멈췄다고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몸치장도 크리스천답게 단정하게 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제 1차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바벨론인들이 유대인들로서의 의식(意識;정체성)을 탈색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의식(衣食)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 식생활조차 바꾸려고 바벨론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왕의 음식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들은 그 시험을 채식으로만 너끈히 이겨냅니다.(단1장) 하여 단정한 음식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크리스천다운 몸가짐과 음식을 섭취하는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다운 단정한 몸가짐과 음식섭취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세례요한은 자신의 영적 임무를 정확히 안 사람이었습니다.

1. 그는 바통터치 계주자의 임무를 정확히 수행했습니다.

4백 계주에는 네 사람의 주자가 뜁니다. 그런데 앞선 3 주자들의 임무란, 빨리 달리는 것 이상으로  다음 주자에게 정확하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일에 실패하거나, 홀로 독주해 버리면 그 경기는 원천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앞선 1,2,3번 계주자의 임무는 마지막 4번 계주자에게 정확하고, 안전하게 바통을 넘겨주는데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마지막 주자입니다. 그 마지막 계주자인 메시야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하는 최종주자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군중들의 환호성을 한몸에 받고 달린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빨랐고, 날랬습니다. 그랬지만 그는 바통을 들고 산으로 오르지도, 홀로 완주해서 결승 테이프를 끊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바로 그 임무를 정확히 알아, 정확하게 구속사의 최종주자 메시아이신 예수께 구속사의 바통을 넘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의 훌륭한 점은, 그가 그 인기절정에서 자신의 영적 임무를 만인 앞에서 공개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군중들 앞에서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라고 선포해 버립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1:7),”고 고백해 버립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기정상에서 스스로 내려앉는 제분수를 아는 겸허함이 세례요한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판단력과 자제력의 소유자입니다. 사람들의 실패는 인기정상에서 군림하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제 것 삼으려는 데 있습니다. 제 임무와 분수를 오판한 교만이란, 패망이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16:18)

제 1차 전도여행 시, 바나바와 바울은 루스드라에 들립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다 그 무리들이 루가오니아 말로 바울을 헤르메스, 바나바를 제우스로 높이며,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다고 그들을 신격화합니다. 그러자 즉시 바나바와 바울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우리들도 당신들과 동일한 성정(性情)을 지닌 사람이라고 밝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군중들을 설득합니다.(행14:8-18)

바로 이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랬고, 바나바와 바울이 그랬습니다. 순간순간 자기를 쳐, 제 본분과 분수를 깨달아 알아 자신을 우상 삼을 수 있는 위기의 국면에서 자기 임무를 공개하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앉는 연습을 우리는 부단히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은 예수를 위해 자진해서 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세례요한은 이 선언대로,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명예, 권력, 그리고 사람(제자)들까지 아낌없이 예수를 위해 내 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평신도 사역자였던 시절에, 그가 속한 교회 남녀 전도회 기관대표들이 나가서 간증하는 헌신예배 시간이 있었답니다. 앞선 기관대표들이 한 결 같이 예수 믿고, 부동산 투기했더니 떼돈이 벌리더라, 할렐루야 아멘 하는 식으로 간증하며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은 예수 믿고 망한 것밖에 없어, 나가서 이렇게 간증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망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벌어 놓은 돈. 예수 믿고 나서 그 재물,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고, 헌금했더니 나는 지금 빈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돈, 명예, 권력, 욕정, 재물 그리고 사람들 중 그 어떤 것을 예수를 위해 내어줬습니까? 노점상 푸성귀를 파는 노파에게 단돈 5백 원 가지고, 그분은 눈물 나게 한 적이 없습니까? 주님께 드린 물질과 시간이 아까워 안달복달 했던 적은 없습니까?

예수를 위해 손해 볼 줄 아는, 하여 내 희생과 헌신으로 예수를 예수되게 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넷째,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안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
세례요한은 자신의 율법적 죄 사함을 촉구하는 사명을 넘어, 예수는 사랑과 은혜의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 세상을 구하실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적어도 “내 궁핍함을 아니고 늘 채워주시는 분”으로 예수를 알았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가 나의 애틋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를 액세서리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오늘 우리 안에서 명백하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불투명한 예수를 투명하게 밝혀주는 영안이 오늘 우리에게도 요청 됩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분명히 아는 이만이 확신 있게 예수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예수와 자신을 분명히 알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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