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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25: 광야를 이기는 영성 1(주일설교)

2011.10.15 22:45

김성찬 조회 수:1054 추천:47

영혼일기 825: 광야를 이기는 영성 1(주일예배 설교)
2011.10.15(토)


광야를 이기는 영성 1

마가복음 1:12-13절


나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개역성경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그 성경이 현대적 어법과 문법에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모르던 이 민족에게 예수를 전해 준 개역성경을 보배처럼 여깁니다. 그 성경이 적어도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원어로 성경을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성경원어를 인용하는 경우에도 사실 약간 번역상 무리가 있다 여겨지는 개역성경으로 설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용감하다, 라는 성경원어의 뜻이 씩씩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며 용감하다, 라는 개역성경의 단어를 성경원어에 밝은 설교자가 씩씩하다, 라고 바꾸어서 해설을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자신의 설교환경에 적합한 비슷한 말을 성경원어에서 찾아 설교에 적용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용감하다, 라는 단어보다 씩씩하다, 라는 단어가 더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적용은 설교자의 설교환경에 보다 더 적합하게 적용하는 것이지, 개역성경에 없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원어를 설교에 적용한다는 것은 설교를 더 명쾌하고, 정확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성령충만을 더해 주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전문적인 성경원어의 문법을 들이댐으로 설교가 더 난해해 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원어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원어를 연구하는 것은 성경원어의 일의성(一意性)은 정확하게 설교에 적용할 수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성경 번역본들은 또한 성경 원어의 다의성(多意性)은 제공해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 초기 조선 말기 우리네 국문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들은 이 찬송 가사에 나오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발음대로 ‘시에(애)미’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함께 계시니,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는 웬수같은 시에(애)미가 오나 겁이 없다며, 찬송 가사 속에서 은혜를 누렸다고 합니다.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에(애)미 오나 겁없네♫ 얼마나 절묘합니까? 시집살이가 시험 그 자체이던 그 모진 시절, 그녀들의 시험=시에(애)미, 였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설교 첫머리에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에 얽힌 복음서들의 서술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복음서들의 각기 다른 서술을 존중하며, 그 각기 다른 서술을 인용해 말씀을 전개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광야인생을 말합니다. 스데반은 그 광야 길을 가는 신앙공동체를 광야교회라 칭했습니다.(행7:38) 지난 주에 세례 요한의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룬 영성을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그가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의 자리가 광야였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광야란, 하늘로만 문이 난 곳이라고 했습니다. 유일신앙의 본거지가 바로 그곳이라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저는 오늘 다시 광야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세례요한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며 거하신 광야를 말하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광야 없는 예루살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없이 영광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풀무불의 연단 없는 정금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신앙의 삶이 광야 같은 것임을 보여주시고, 그 광야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믿는 자에게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광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그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각각 다른 재미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역성경의 번역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번역본이 주는 다의성의 묘미를 맛보고자 합니다.

광야를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광야 40일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그분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지닌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광야의 허기와 목마름이나, 십자가의 고통도 없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는 주 앛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철저히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분이 어떻게 광야로 향하셨으며, 광야의 유혹을 이겨내셨으며, 광야를 지나셨을까요?

공관복음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각기 약간 씩 다른 서술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 줍니다.


오늘 본문 단 두 줄로 기록된 예수의 광야생활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2-13)

이상에서 살핀 마가복음 1장에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로 예수님을 내몬 분이 성령이셨다는 말입니다. 참 놀랍고, 재미난 표현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깬 기이하고,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문자적으로 따지면,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광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요에 의해 광야로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애들을 엄마가 공부방으로 강제적으로 밀어넣듯, 전장에서 상관이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돌격 앞으로 전진을 명하듯, 강압적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몰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입니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눅4:1-2a)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표현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 40일 내내 이끌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의 두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고, 성령에 이끌리시며 사십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나가셨고, 광야 생활 40일 내내 성령에 이끌림을 받으시며 광야 생활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마가복음 1장 13절은 천사들이 광야의 예수를 수종들더라, 라고 마감하고 있음이 그 단서가 됩니다.

성령의 이끌림과 보호를 받는 광야생활. 그 생활이 어떠했을까요? 광야는 힘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계시니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 광야 생활은 힘들었으나, 힘들지 않는 즐거운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시애미)이 오나 겁 없고 ♫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힘들어도 힘들지 않습니다. 물론 광야 인생 길은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갈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죄수 바울과 실라는 그 옥중에서도 성령 충만했기에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행16:25) 장까지 살아 내려가는 유산균처럼, 그들은 성령의 보호막에 보호를 받아 광야 인생에서 승리했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힘이요, 방패요, 무기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성령님(살후3:16)의 이끄심과 보호하심 아래 우리네 광야 생활은 이 땅에서 맛보는 작은 천국일 수 있습니다.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아, 맘이 느∼을 평안해 ♫ 이같은 성령 안에서 우리는 광야를 이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피할 바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위로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힘으로 광야를 이겨내셨습니다. 광야를 이겨내는 힘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우리도 광야 인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인생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의 영성은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공동체를 묶고 있는 악한 사탄의 족쇄가 절로 풀리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감옥 안에 있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났습니다.(행12:5)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바울과 실라처럼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할 수 있으며, 옥문이 절로 열리는 기적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미소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이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을 죽음으로 좇았습니다. 어디 신약에서만 일어난 일입니까?

구약성경에서도 동일하신 여호와의 영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성령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맹렬한 풀무불 속에 내던져졌지만, 그들과 그 불속에서 함께한 천사의 보호함을 입어 구원을 얻었습니다.(단3:24-27).

성령을 구하십시오.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빌면, 성령 강림 하시어 우리로 환경을, 조건을, 내 한계를 넘어 나를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한없는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늘 의심하면서, 안 믿는 자에게 내 작은 입으로 곧 증거하는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사십니까? 세상 정욕을 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에게 비록 책망을 받았지만 마술사 시몬은 돈을 주고라도 성령을 사려고 했습니다.(행8:18-19) 물론 그가 성령을 구한 본질적인 이유가 세속적 투기 같은 것이었지만, 그는 초대교회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능력을 그가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마술사 시몬의 성령투기행위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 무엇보다도 성령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광야길 신앙의 삶의 나침반이요, 지팡이요, 칼이요, 방패요, 전신갑주 그 자체인 성령을 구하십시오. 우리의 성경지식, 신앙의 연륜으로 우리는 악한 사탄의 궤계를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골고다의 고난 앞에서 무너져 내렸던 제자들을 찾아가신 주님께서는 죄의식과 불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끼치신 후,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죄사함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예수의 부활의 목격자인 그들에게 당장 나가서 부활을 증거하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백이십문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그들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의 능력으로 그들은 성령충만을 받았고, 이어 목숨을 걸고, 예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순교도 능히 감당했습니다.


엊그제 목회자 몇몇 사람들과 세상을 이길 힘이 없어, 깊은 산속에 둥지를 튼 카페지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목회자도,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세상을 이길 힘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어부출신들이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그들의 학식이나 경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령을 구하십시오.
아버지 아시지요 도우소서! - 아버지 아시지요 성령을 부어주소서!

다시 한 번 자문자답해 봅시다.
나는 무엇을 주께 구하고 있는가?
성령을 구합시다.
광야 같은 세상을 이길 힘 되시는 성령을 구합시다.
내 발의 등이요, 빛 되시는 성령님.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시는 성령님.
나의 보호자요, 인도자이신 성령님을 구합시다.

기도할 힘이 없습니까?
성령님께 기도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롬8:26)

성령이여 우리 찬송부를때 진심으로 찬양하게 하소서 ♫
성령이여 우리 기도드릴때 우리곁에 계서 일러주소서 ♫
성령이여 우리 성경읽을때 그속에서 빛을 보게하소서 ♫
성령이여 우리 전도할때에 지혜로운 말씀 주시옵소서 ♫
성령이여 우리 겸손해져서 우리주와 같이 되게하소서 ♫

광야를 이기는 영성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말씀을, 기도를, 찬송을, 전도로 성령을 짜내십시오.
성령의 기름이 차고 넘쳐서 광야를 질주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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