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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522: 이 기쁨과 은총의 계절에
2010.03.14(주일)

사순절 주일설교

이 기쁨과 은총의 절기에
에베소서 2:1-10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 †


지난 수요일 이경숙 권사님을 찾아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파킨슨 씨 병으로 거동이 어려운 분이라서 지난 겨우내 주일예배를 나오지 못하셨기에 애틋한 맘으로 찾아뵀습니다. 그런데 발음도 시원치 않은 그분은 항상 나에게 묻곤 했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느냐”는 식의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런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항상 난감했었습니다. 그 무어라 속 시원한 해답을 그분에게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9:1-7)에 나오는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사람에 대해 예수께서 적용하신 말씀,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2-3)”을 인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음 속에 해답이 있듯, 그분의 의문은 그분의 해답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혼잣말처럼 ‘그 함께했던 그 누구에 의한 모진 세월’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난 그 말 속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정근모 박사는 그의 아픈 아들로 인해 많이 아팠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 아픈 아들을 위해 부흥성회 기간 맨 앞자리에 앉아 은혜를 사모하던 중, 성령께서 그 아들에 대해 이렇게 해설해 주셨다고 합니다. ‘네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

그랬습니다. 이 권사님의 희귀병은 그 가정의 십자가를 그 몸에 채운 징표였습니다. 나는 그 항상 답하기 곤란했던, 그분의 병의 원인을 나는 그분의 ‘그 누구 탓’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분의 ‘그 누구 탓’은 ‘제 몫에 태인 십자가’라는 말로 환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 가정의 십자가를 지신 분이셨습니다. 하여 그분은 그 십자가로 그 가정에 유전될 수 있는 망령된 행실(벧전1:18)의 고리를 끊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그분 안에 역사하시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의 권능, 그 예수 십자가에 의지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육신을 태워 자녀들을 키워냈고, 가정을 지켜냈고, 그 자녀들로 예수의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 된 그의 장애의 원인이 그 장애인의 죄거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듯, 우리 권사님의 발병과 어려운 투병도 자신의 죄 탓이 아닌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육신을 망가졌어도, 날이 갈수록 그 육신은 쇠약해져 갈지라도, 때는 아직 낮입니다. 그분은 그 십자가로 인해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의 ‘낮’을 그분은 또한 즐겨야 합니다. 아니 즐기고 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4).”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의 복락을 위한다면, 그 가정의 그 누군가가 병들게 되어있습니다. 우주 그 무한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둥근 지구도 양지가 있고 동시에 음지가 있어 한 덩이 지구이듯, 미운정 고운정이 다들어야 참 정이듯,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가능해야 그것이 참이듯, 건강한 가정은 아픈 그 어느 가족이 십자가를 진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아픔을 그 누가 대신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지를 지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해안가 절벽에 서서 자살하려는 사람도, 뒤 산에서 굴러오는 돌덩이를 피하는 생존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든, 나라든 그 어느 공동체든 아픈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지거나, 스데반처럼 자원해서 진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네 경제부흥은 그 부흥을 위해 피땀을 흘린 분들에 의한 것임을 우린 너무도 잘 압니다. 그네들이 있어 세상이 오늘도 순적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2010.03.11) 법정스님이 입적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폐암이었다고 합니다. 난 왜 그 청정한 산골 스님께서 하필 왜 폐암이냐는 의문을 잠시 가졌습니다. 그런데 연극평론가 서울대 김문환 교수도 그런 의문에 휩싸였었고, 스스로 이런 해답을 얻었다고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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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께,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마하던 중에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그야말로 멍했습니다. 늘 청정하게 사시면서 뉘게나 “맑고 향기롭게” 살기를 가르치신 스님께서, 그래서 도시의 번잡을 늘 부담스러워 하시던 스님께서, 그래서 손수 세우시고 가꾸시던 불일암 조차 훌쩍 떠나 깊은 산골 화전민이 머물다간 오두막에서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새소리를 벗하시던 스님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등지셨다니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중생, 특히 1970년대에 민주화를 갈망하던 중생들의 가슴앓이를 아직껏 홀몸으로 견뎌내신 것입니다. <불교신문>의 주필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편집동인으로,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운영위원으로 한국사회와 종교계의 이지러진 모습을 준엄하게 꾸지람하시던 중, 1974년 1월 11일, 아카데미 간사로 있는 제게 보내주신 엽서 한 장이 그 아픔을 말해줍니다. “세월이 나를 못 가게 합니다. 요즘 거의 연금 상태입니다. 4~5인의 사복(私服)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기랄ㅡ내가 무슨 솔제니친이라고.” 스님께서는 시대의 질병을 몸소 겪으시며 아파하셨는데, 그 가슴앓이가 끝내 스님을 우리 곁에서 멀리 있게 만든 것이지요.


그 후 세인들은 어느덧 또다시 일상 속에 파묻혀 뒹굴 때, 스님께서는 더욱 무소유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 나아가는 정진의 세월을 보내시면서 그 가슴앓이를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후략)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098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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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법정 스님의 가슴앓이는 '시대의 아픔‘을 앓는 가슴앓이였습니다. ‘그 아픔- 가슴앓이’는 그 누구나 지는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는 높이 받듭니다. 자기 자신 한 몸이나, 자기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 지는 가슴앓이도 고귀한 것이지만, 민중의 아픔을 대신 한다는 것 또한 남달리 고귀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의 아픔을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맘으로 모시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개인이나, 가족, 친지, 민중을 넘어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고난을 자원하셨습니다. 그 어떤 이가 그 어떤 대상에 대한 가슴앓이로도 치유할 수 없는 인류의 원죄를 예수는 십자가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수 오시기 전 7-8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 예수의 사명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계시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구속사적 인물들은 구도자가 아니라 예언자이며, 전도자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우리는 그분의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죄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라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3,7,11).”

우리가 한 때, 그 시대의 아픔을 담당한 이들을 오해했듯, 우리는 인류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법대로, 이성대로, 감각대로, 감정대로 그분을 대하고, 판단하고, 판정했습니다. 그리고 비아냥댔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면 예수를 모욕하여 /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8-44).”

그러자 흑암이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요27:45)”됐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랬던 그들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라고 성령, 그 힘의 권능으로 선포된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 그 완악한 땅의 거민들이 하루에 삼천 명씩이나 회개의 세례를 받고, 예수를 주로 믿어 구원에 이른 대역사(행2:41)를 이룩했습니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선생이 최근에 영성 세계 입문기, 『지성에서 영성으로』(열림원)을 펴냈습니다. 그 책은 필자의 일기와 강연, 기사와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투병 중인 딸 이민아씨의 간증 내용과 언론 인터뷰를 정리한 글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사건이 말하는 제일 중요한 내용은, 그 딸의 아픔이, 그 딸이 진 십자가가 그 이성적 아비를 구원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딸이 진 십자가는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가설을 넘어 진리로 이끈 구원의 십자가요, 전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사순절이 기쁨과 은총의 시기인 이유

이렇게 십자가의 원수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고, 지성의 대부인 노령의 석학이 예수 안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의 부활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그 대사건 예수의 부활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은 기쁨과 은총의 시기입니다. 부활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런 그 고난은 빛나는 영광을 향하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회개의 세례를 받기까지 통회 자복하는 깊은 슬픔의 시기를 벗어나면, 마땅히 그 구원의 은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10).” 아멘.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우리는 허물과 죄에서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사순절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그 대사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와 함께 살리시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5-6)신 그 부활 사건에 합당한 신앙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기간입니다. 그 평화와 해방에 합당한 준비기간입니다. 그리고 장차 있을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자로서의 준비기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을 잘 보내야 합니다. 물론 그 은총을 감사하며, 기뻐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준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 외적 대비입니다. 이는 단정한 금식과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는 말씀을 우리가 나타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의 풍성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둘, 내적 대비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내적 증진을 위해 우리는 말씀을 보다 더 가까이 하는 내적 준비에 힘써야 합니다. 에스라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성일(聖日)의 의미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여호와의 성일(聖日)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聖日)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8:9-10).”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던 날이 성일(聖日)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향하여 가는 그 대사건, 부활사건은 성일중의 성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대(大) 성일을 향해가며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 몫에 태인 십자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를 질수 있는 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으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사순절에 주시는 여호와의 말씀은 사망의 죽음을 이기신 부활 생명입니다. 그 부활 생명을 대망하며 나아가는 사순절은 그래서 기쁨이요, 은총의 절기입니다.

말씀이 주는 기쁨의 힘으로 그 대사건-생명의 부활 사건을 향하여 우리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나아갑시다. 내가 우리 가정의, 우리 교회의, 우리 직장의 십자가를 진 자라는 사실에 외려 감사합시다. 그 십자가는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망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듣고, 몸으로 전합시다.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일, 그 생명의 승리에 서서 오늘을 말씀으로 대응합시다. 이미 예수께서 이루신 부활의 권능을 소리내어 선포합시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0-58)."

그리고, 오늘, 말씀 팔복을 소리 내어 읽고, 듣고, 삶으로 전환시킵시다.

복이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1-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리하여 그 힘의 권능으로 십자가의 승리를 맛보는 기쁨과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순례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찬송합시다.

내 주에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매게도 있도다

내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저 수정 같은 집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앞에 바치며 늘 찬송 하겠네

뭇 천사 소리 높여서 늘 찬송할때에
그 좋은 노래 곡조가 참 아름답도다

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 보내사 날 영접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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