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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598: (전도)침노(侵擄) - 귀 있는 자

2010.11.08 02:02

김성찬 조회 수:1115 추천:48

영혼일기 598: 침노(侵擄) - 귀 있는 자
2010.11.06(주일)

▣ 귀 있는 자 ▣

지난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수요기도회를 위해 교회 앞에 이르렀는데, 낯익은 몇, 몇 사람들이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최경애 집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그의 남편 되는 이재헌 씨가 있었고, 또 다른 여자 한분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모처럼 최경애집사가 수요기도회를 참석하러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맘이 기뻤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나는 그 일행에게 함께 예배드리자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들이 선선히 내 권면에 순응했습니다. 그동안 특히 이재헌 씨는 아내를 교회까지 데려다 주고는, 교회 밖 차 안에서 예배 끝나기를 기다렸던 사람인데, 그가 예배당에 들어와 수요기도회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웃집 친구도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세 사람이나 수요기도회에 함께한 것입니다. 모처럼, 정말 배가 불렀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5-17).

그 동기가 어떠했던지 간에, 그 어떤 권면에도 무감각하며, 미동도 하지 않는 세태에 반하여, 그녀는 적극적인 반응을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항상 강단의 선포에 아멘으로 화답했던 것처럼, 그녀는 순전한 욕심으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현찰로라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수렁에서 건져 내라는, 성령의 영혼구원을 위한 탄식에 그녀는 순전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 반응이 소중합니다. 방법이 통속적이라고, 강제적이라고 시비하는 맘으로는 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주 앞에 나온 영혼들, 그 첫 걸음을 주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그의 백성삼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귀가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나에게 하시는 탄식에 귀 기울이십시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 (2010.11.06(주일))



이상은 오늘 주보에 실은 오늘의 설교 말씀의 주제다. 나는 주보에 그 주일의 말씀 요약을 게재한다. 그리고 그 설교 주제문을 회중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설교 직전에 낭독하도록 한다. 학습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 시간 배울 학습내용을 구조화하여, 수업 시작 시간에 학습자들에게 일러 주는 것이다. 이런 구조화된 학습 내용을 학습 전에 일러주면, 그 차시의 학습목표를 이루는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는 먼 길을 가는데 있어 미리 방향과 경유지와 목적지의 선과 점을 일러주고 출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주보에 그날의 말씀의 주제를 요약, 서술해 놓고 낭독자를 통해 낭독케 함으로 회중들이 시청각적으로 그날 설교의 주제를 미리 학습케 하고 있다.

설교 직전, 목청 좋은 김욱수 집사가 오늘 말씀의 주제문을 읽었다. 다른 주일과 달리 그 주제문을 보고, 듣는 회중들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주제를 접근해 나아가는 예화의 주인공이 우리네 식구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두 곳이다. 마태복음 11장 1-24절과 누가복음 14장 15-24절이다.

나는 설교 전에 찬송을 부르는 시간을 10∼15분여 정도 갖는다. 여러 찬송을 부르는데 오늘은 딱 한 곡만 거듭해서 불렀다. 찬송 366장(새340)이었다. 오늘 두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가 그 찬송 가사에 오롯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1. 어지러운 세상 중에 기쁜 소리 들리네 예수 말씀 하시기를 믿는 자여 따르라
2. 세상 헛된 신과 영화 모두 내어 버렸네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너는 복된 자니라
3. 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4. 주님 크신 은혜로써 부름 듣게 하시고 복종하는 맘을 주사 따라 가게 하소서

나는 2절의 가사 말미, ‘날 더 귀히 여겨라’라는 부분을 ‘너는 복된 자니라’라고 고쳐 불렀다. 1절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가 되라. 2절은 구원받은 복된 자인 너. 3절은 구원 이후 신앙하는 태도. 4절은 구원받은 자의 사명에의 복종이라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들이 제시하고 있는 주제를 나는 이상과 같은 찬송해설을 통해 미리 강조했다.

설교가 시작됐다. 나는 귀를 만져보라 했다. 오른 손을 들어 만져보라 하지 않았다. 오른 손이 없는 동료 목사님이 토로했던 허전한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단에 선 설교자의 용의주도한 언행 검증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냥 손을 들어 귀를 만져 보라했다. 한 손도 없는 회중은 다행히 없었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들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 단어는,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나오는 ‘침노(侵擄)’입니다. 침노(侵擄)란 사전적 의미로 “1.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거나 쳐들어옴. 2.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침.”입니다. 이런 비(非) 신사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가 오늘 또 하나의 본문 누가복음 14장23절에 나오는 ‘강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강권’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억지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례한 행위를 요구하는 ‘침노(侵擄)’나 ‘강권-억지로’라는 단어가 천국을 소유하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키워드라는 말입니다.

Ⅰ. 하나님의 침노(侵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몫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11장은 그 문맥의 흐름을 통해 우리에게 그 ‘침노(侵擄)’가 우리들의 몫이기 이전에, 먼저 하늘의 몫이었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 ‘침노(侵擄)’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그 천국을 소유케 하시려는 하늘의 우리를 위한 ‘침노(侵擄)’가 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침노, 이는 천국의 세속도시를 향한 침노였습니다. 영원이 순간에로 진입해 들어오는 침노였습니다. 이 침노가 먼저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14).”

이 하늘의 침노를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 곧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내어 열국 목전에서 그들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라(겔 39:25-28).”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려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하나님의 ‘침노(侵擄)’, ‘하나님의 열심’은 독생자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우리가 소유하도록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하나님의 선(先) 성가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뜻밖의 성가심이 발견 됩니다. 그 성가심은 뜻밖에도 세례 요한의 의혹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구세주)이심을 제일 먼저 선포했던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예수를 성가셔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나사렛 예수가 오실 그분인지 아닌지, 그가 뜻밖에 깊은 회의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열심에 대한 인간들의 성가심입니다. 그 성가신 하나님의 개입 때문에,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입을 빌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세례요한까지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반신반의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이런 형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전도하려 다니시던 도상에서 이상과 같은 세례요한의 회의를 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 맹인들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생애 기간 중에 행하셨던, 메시아이심의 징표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분이십니다. 우아하고, 합리적인, 열린 사람들에게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주라 강권하십니다. 침노하십니다. 하여 세상은 매우 예수 때문에 성가셔합니다.


정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정녕 성가셔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시대사조는 예수만 빼버리면 세상에 평화가 단번에 임할 것처럼, 예수를 성가셔하고 있습니다. 예수도, 마호메트도, 공자도, 석가도 다 빼버리고 하나님께로만 직통하자는 그럴듯한 제안을 인류는 세계평화의 절묘한 해법이라 여기는 듯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주님의 애태우심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침노,’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애태우심’이라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애탐’이 이어 나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7-9,14).”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침노(侵擄)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어 달라’는 말씀입니다. 아들의 자기 증언을 믿어달라는 ‘애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0-12).”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시던 주님의 말씀 또한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본 오늘의 시대사조는, ‘예수만 빼고 놀자’라는 영적 음모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한 아버지 밖에 없듯, 창조주도 한 분이요, 구세주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4:12).”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인해 실족할 것이 없는, 우리는 복된 자들입니다.

Ⅱ. 구원받은 자의 침노(侵擄)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구원받는 자들이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6).”는 말씀을 이루는 구원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경적 배경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는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침노란, 하나님의 침노로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로서 행(지향)할 침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빼앗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말씀을 나는 “생명의 말씀에 반응한다”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봅니다.

구원받은 자의 침노란,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최경애 집사의 침노에 대한 실례를 나는 서두에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나는 설교 시간에 전도해 오면, 한 사람당 현금 십만 원씩을 주겠노라 선언했습니다. 내 스스로도 놀란, 저속한 상거래 같은 언약이었습니다. 나도 이제 타락 했구나 생각되어졌지만, 불쑥 설교 중에 튀어나온 말이라 다시 주어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차 하던 그 순간 앞좌석에 앉아 있던 최집사가 “정말 주시는 거예요? 우리 남편 데려와도 되죠?”라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내왔었습니다. 그것은 침노였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천국 침노였습니다. 그리곤 지난 수요일 즉각 그녀는 남편을 포함한 두 영혼을 교회로 이끌어 냈습니다.

나는 그 밤 좀 성가셨습니다. 일금 한 사람 당 100,000원! 두 사람이었으니까 20만원! 만일 다음 주에 더 데리고 오면? 이런 물질에 대한 염려가 나를 다소 성가시게 했습니다. 그랬어도 나는 이십만 원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즉각적인 ‘반응’이 정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사 헌금 봉투 두 개에 각각 십만 원씩을 넣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예견했는지 그녀가 오늘 주일 오전예배에도 남편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나는 최경애 집사와 그 남편을 설교 도중에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즉각적인 영적 반응을 격려하며, 준비했던 상금 봉투 두 개를 그녀에게 줬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펄쩍펄쩍 뛰면서, 그 상금 수여를 거부했습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그 상금을 감사헌금으로 드리겠다는 그녀의 결정을 우리는 함께 받아 들였습니다. 그 성가신 물질이 천국을 침노했습니다. 감동의 물결이 회중 가운데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침노란, 다른 말로 ‘반응’입니다. 반응이란, 두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반응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자만이 반응합니다. 죽은 생물은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응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최경애 집사의 경우에서 보듯, 그녀는 동기야 어떠했든지 간에 반응했습니다.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아니 복종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세속화되었다고 맘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당 10만원이라? 거참. 쯧, 쯧. 혀를 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 주님 크신 은혜로써 부름 듣게 하시고 복종하는 맘을 주사 따라 가게 하소서 ♫ 라는 찬송 가사를 육화했습니다. 제 것 삼았습니다.

Ⅲ. 침노(반응)가 없는 고라신아!

오늘 본문 마지막 문단(마11:20-24)에 주님의 무서운 지적이 나옵니다. 반응하지 않는 영혼들에 대한 무서운 질타입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이런 도시들은 침노(반응)가 없는 도시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 거민들은 ‘각질이 두터운 자’들입니다. 화인 맞은 양심(딤전4:2)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반응(회개)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외려 하늘의 신비를 제일로 많이 맛본 자들이라는 겁니다.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심판 날에 견디기 쉬웠으리라(마11:21-24).” 그 크신 권능을 맛보았으면서도 고라신은 영적 반응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무관한 자들의 도시였습니다. 눈먼 자들이 도시였습니다.

잘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킵니다. 많이 배운 신자가 충성하는 것 아닙니다. 많이 가진 신자가 봉헌하는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랑을 받는 자가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럽디다. 교회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잘나고, 영리하고, 앞장섰던 것들이 도망갑디다. 교회는 천한 것들이 천한 것들을 불러 모아 이룬 생명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오늘 또 다른 본문 큰 잔치의 비유(눅14:15-24)에 보면, 밭을 사고, 소 다섯 겨리를 사고, 장가를 든 잘난 사람들은 합당한 이유를 들어 큰 잔치 초청을 거절합니다. 천국 잔치, 주일 예배를 우리는 합당한 이유를 들어 곧잘 빠지곤 합니다. 주일날 결혼식을 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죄를 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잘나고, 돈 많은 이들이 세상 열락을 취하려고 거절한 초대권이 이런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

우리 가운데 최경애 집사보다 몸 불편한 이가 그 누굽니까?(그녀는 중도장애를 입은 장애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최경애 집사보다 더 못 가진 이가 그 누굽니까? 우리 가운데 최경애 집사보다 배움이 덜한 이가 그 누굽니까? 그런데 최경애 집사만이 즉각적인 반응을 했습니다. 천국을 침노한 것입니다. 그녀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23)웠습니다.

고라신을 가봤습니다. 그곳은 매우 비옥한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폐허였습니다. 그 비옥한 땅이 영적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에는 응답했어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권능을 맛보았어도 천국을 침노하지 않는 영혼은 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로의 교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모셔진 성막이 위치했던 실로의 폐해를 보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존재는 비록 그것이 지닌 상징과 거룩성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파멸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배우라는 경고를, 유다에게 발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렘7:13).” 그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씀하신 하나님의 열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행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는 가증한 범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렘7:16).”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이 고라신에도 응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무서운 경고가 이뤄졌습니다. 그 패망이 회개의 영이 없는 고라신의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속히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말씀에 반응하며 살지 못한 불순종을 우리는 이 시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음을 보여 줘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침노로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신앙으로 고백합시다. 그리고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하신 주님의 말씀에 복종합시다. 하여, 천국을 침노하는 전투모드로 우리의 체질을 바꿉시다.

Ⅳ. 입을 크게 벌려 ‘아멘’함으로 천국을 침노합시다.

우리의 심령을 뒤덮은 두터운 각질을 벗겨냅시다. 우리의 신앙하는 태도와 습관과 의식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봅시다. 우리의 배움, 재산, 직위, 사상, 권세, 명예가 말씀에 순응하는 걸림돌인지 아닌지 살펴봅시다. 바울 사도는 그의 우수한 혈통, 출중한 학식, 빼어난 종교성 등등,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빌3:4-9)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고백했습니다. 하여, 그에게 요나의 바다가 없었습니다.

이 시간 입을 크게 벌려 ‘아멘’함으로 우리는 그 복종의 일보를 내딛을 수 있습니다. 아멘 없는 예배는 설교자를 죽입니다. 자신을 죽입니다. 아니, 아멘이 없는 자는 반응이 없는 자처럼, 죽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아멘이 없으니 순종도, 복종도 없습니다. 아멘으로 우리는 설교자에게 영⦁육간의 힘을 북돋워 줍시다. 하여 함께 천국을 침노합시다. 아멘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의 무기입니다. 아멘은 너와 나의 공동의 무기입니다. 아멘 함으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고후1:21a)”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합시다.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고후1:20b)"립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우리의 열심 삼읍시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이것이 하나님의 침노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행할 천국 침노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장차 구원받을 한 영혼,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중매합시다.

다 같이 이 간구를 제창합시다.
실천에 이르도록.

♫ 주님 크신 은혜로써 부름 듣게 하시고 복종하는 맘을 주사 따라 가게 하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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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59: 축사 임태석목사 취임예배 힘찬교회 [1] 김성찬 2010.06.20 3309
56 558: 축시-묵동교회 창립 30주년에 부쳐 김성찬 2010.06.13 1171
55 522: 사순절 이 기쁨과 은총의 계절에-사순절 설교 김성찬 2010.03.14 1255
54 215: 출정식 [3] 김성찬 2009.02.13 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