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주일설교 681: 종말 신앙이란?(주일설교)

2011.03.13 22:27

김성찬 조회 수:926 추천:55



영혼일기 681: 종말 신앙이란?(주일설교)
2011.03.13(주일)

제목 : 종말 신앙이란?
본문 : 마태복음 24장 3-14절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다시 오심에 대한 예고를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4-8).”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8)

지난 금요일, 2011.03.11 오후 2시 46분 규모 8.8의 초대형 강진과 높이 10m의 쓰나미(지진해일)가 일본 도호쿠(동북(東北) 지역을 강타해 일본 열도가 공포에 빠졌습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 중 하나와 이에 따른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습니다. 11일의 지진은 일본 동부 해안으로부터 130㎞ 떨어진 지하 25㎞ 지점에서 발생해 길이 300㎞ 너비 150㎞에 이르는 해저 파열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지진은 거대한 지각판이 또 다른 지각판 밑으로 깔려 들어가면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지각판의 움직임은 가장 강력한 지진들을 발생시킵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거대한 쓰나미를 불러온 지진 역시 바로 이 같은 이유로 발생했었습니다.

지금까지 1000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앞으로 수 천, 아니 그 이상의 희생자가 나올 거라 예견들하고 있습니다.(이상은 3월 13일 주일 오전까지의 정보였음, 수정: 3/14일 현재 수 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측) 그리고 지극히 염려되는 것은 후쿠시마 원전 건물 폭발해서 방사능 유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입니다. 최첨단 기술을 갖추고 지진에 대비한 준비 태세가 가장 뛰어난 나라 중 하나인 일본은 11일 발생한 규모 8.8의 지진 앞에 무기력하기만 했습니다. 이번 지진은 1900년 이후 발생한 것으로는 5번째로 강력한 것이자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최악이라고 합니다.(정보와 통계가 보도 자료 마다 각기 다름) 재난 전문가 데니스 밀레티는 "인간이 어떻게 대비를 하든 완전히 안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밀레티는 "자연은 언제나 인간이 준비하는 것 이상의 사태를 가져온다"고 덧붙였다.

영안(靈眼)을 열어

이상이 지난 금요일 있었던 일본열도 대재앙입니다. 우리는 이 가공스런 사태 앞에서 깊은 애도를 표하거나, 우리에게 미칠 경제적, 지질학적 파장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이젠 한 가족 된 지구촌 사람으로서 마땅한 생각들입니다. 부디 일본열도가 그 재난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신앙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안을 열어 이 종말론적 징후 속에서 우리에게 말 걸어오시는 계시에 주의를 표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의 제자들에게 종말을 계시하셨습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오늘 지구촌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습니다. 아니, 넘쳐나고 있습니다. 엊그제 일본열도를 강타한 대지진은 우리에게 종말의 징조를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 “세상 끝”이란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종말론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는 ‘마지막 사물들’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종말이란 용어는 19세기의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개인의 죽음과 이 세계의 종말에 약속된 죽음 자의 부활에 대한 교회를 다루는 신약 분야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본문들은 개인보다는 세계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종말은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었고(히1:2;벧전1:20), 그의 재림으로 끝남을 말하고, 좁게는 예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1:20).”

작금은, 초림의 예수로부터 시작된 그 종말이 현재진행형입니다. 8절 말씀에 연이어 우리 주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한 말씀을 다시 반복해 가시며, 이렇게 그 말씀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9-14).”

이 종말의 때를 계시하신 주님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면, 그 때에 믿는 자들이 예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며,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이 들끓으며,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요즘처럼 부쩍 기독교가 공공연하게 지탄의 표적이 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또한 작금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이 도처에서 들끓는 세상입니다. 그런 망령된 시대사조와 사상이 신학교에까지 침범해 들어와 있습니다. 중심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며 예수의 유일성에 회의를 품는 세력들이 신학교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는 믿는 자들의 능력과 실천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교회의 실천 없는 구호일 뿐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작금의 이 가공스런 종말의 징후들은 불행하게도 우리 신앙공동체가 세상과 연대해 우리 안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종말의 끝을 향해 치닫는 세상에서, 우리 믿는 자가 지녀야할 종말 신앙의 목표를 역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종말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종말은 예수의 재림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 된 종말이 그의 재림으로 끝남을 믿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종말 신앙을 지닌 우리 기독신앙인들의 종말론적 신앙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종말론적 신앙의 태도란?

첫째, 말씀을 주시해야 합니다.

종말을 대망하는 신앙인들은 종말을 계시해 놓은 말씀을 항상 주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말씀은 길 잃은 영혼의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있다. 그리고 종말의 징조가 그 말씀에 계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말 계시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종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을 지적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종말 계시를 더 구체적으로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되었다(계16:17b)"하실 때가 임박했음을 계시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16:17).” “되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되었다(헬, 게고넨)”는 ‘성취하다’, ‘완성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재앙의 완결을 말합니다. 주께서 분명히 “되었다.”하실 그때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16:19).”

재앙의 완결은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은 없으나,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불변입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자,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는,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습니다. 사탄의 큰 성 상징인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해 버립니다.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사28:17).”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4:8).”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은 ‘하나님의 기억하신바 됨’입니다.

뇌성과 번개, 지진과 우박이 말살의 도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학개2:6).”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를 발하면서, 재앙의 도구로서의 지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히12:26-27).” 이는 우리의 삶의 기반을, 아니 존재를 흔들어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이웃의 재난이 영적으로 이렇게 해석되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땅만이 아니라, 이후로 하늘도 진동하는 재앙이 예고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경고를 우리는 주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신바 됨’은 사탄의 세력에게는 멸망이나, 그 복음과 믿음에 굳게 선 우리에게는 복락입니다.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시16:1-2).”

둘째,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시다.

우리는 종말 신앙을 이야기 할 때, 흔히들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그릇된 행태를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말 신앙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 신앙은 외딴 섬, 외딴 방에서 꽃필 수 없습니다. 현실을 외면한 종말신앙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3월 8일 나는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그 밤을 요한계시록으로 환히 밝혔습니다. 입력 없는 출력의 메마른 산고를 겼듯이 나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가면서 내가 종말의 때를 계시하신 그 말씀에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너무 깊어질까 외면했다가, 너무 몰라 그 밤 나는 질식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무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묵상하면서도 나는 그 계시의 말씀은 먼 훗날 일어날 사건을 이야기한 책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먼 훗날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알았습니다. 오늘을 외면한 내일은 없듯, 내일은 오늘이 해설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없는 내일이 없듯, 내일은 오늘의 나침반입니다.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무서운 지진과 쓰나미가 어제 일이 될 줄을 말입니다. 오늘도 모르는 내가 내일의 묵시를 파헤치려 했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모른 내가 내일의 묵시를 파헤치려 한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돌아봤습니다, 나는 한동안 현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세속현실정치에 대한 의도적 외면이 세속현실세계의 속앓이까지 외면하게 만들어 버렸던가 봅니다. 그래서 지난 한동안 나는 서정에로 의도적인 굴신을 즐겼습니다. 저녁 아홉시 뉴스를 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그 세상은 나와는 무관했습니다. 나는 문학주의에 빠진 시인처럼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 체, 나무그늘에서 옥피리만 불러댔습니다. 한편으로 자위하기를 그런 시시한 세상사와 담을 쌓는 일이 ‘거룩’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저들만의 것이고,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재앙과 경고조차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안주해 있는 선택받은 존재인 마냥 나는 노닥거렸습니다. 지옥 같은 현실에 짐짓 초연한 척 해 대면서, 저자거리 장삼이사의 지옥 같은 현실을 나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거기다 더해 나는 내 의식 속에 똬리를 튼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이 나를 점령했습니다. 나는 저들 무명색한 천출들의 남루한 행색과 천박한 언행을 속으로 하대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애환을 나는 의도적으로 외면했습니다. 말로는 가난한 자의 벗이며,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 체 했으나, 나는 저들의 곤궁한 현실을 철저히 외면해 왔습니다. 니들은 교회 안 다녀도 돼. 니들은 내 신자 안 해도 돼! 그랬었습니다. 사랑 따윈 날 몰라, 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종말과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마지막 날 심판의 표준과 근거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종말신앙은 현실을 보듬어 안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논하기 전에, 냉혹한 현실 사랑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현실과 당당히 맞서서. 적극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참된 종말 신앙입니다. 기독신앙인들의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 이하에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

이렇게 교활한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성경 구약 39권을 딱 두 마디로 정리, 정의하셨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또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경건을 정의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우리는 왜 고린도전후서와 야고보서를 지나 요한계시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히틀러의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유아독존적인 이상주의가 패망으로 끝난 역사적 교훈을 읽어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고달픈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애정이 종말론적 신앙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네들과의 합일이 장차 임할 그분과의 합일입니다. 현실과 무관한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현실을 외면치 말라 라고 하십니다. 존재하는 것을 모두 사랑하라 명하십니다.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요, 교우여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합시다. 살피고, 돌보며, 가슴으로 안아야 합니다.

셋째,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된 여유와 평강이 내 심령을 지배하는 신앙이 종말 신앙입니다.

이번 일본 대지진 참사 속에서 우리 눈을 의심케 하는 절제미를 우린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 재앙과 맞서는 일본인들의 미소였습니다. 그네들은 그 참혹한 현장 인터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쓰나미보다 무서운 그들의 절제미를 우린 기이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나는 재앙 속에 나타내 뵌 일본인의 절제미는, 그들의 준비(대비)의 산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미소는 대비의 기적이었습니다.

미 지질조사국(USGS)의 데이비드 애플게이트는 "우리는 이번 지진에서 지구의 매우 큰 균열을 목격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극복해낼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이는 바로 일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항상 '다음 지진'에 대비해 왔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지진 대비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고 지진 발생에 대한 준비 태세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또 미국과 달리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지진조기경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지진 사태가 더 큰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TV들은 또 다른 대지진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국민들에게 대비할 것을 촉구한 결과 큰 어려움 속에서도 그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종말 신앙이란 준비(대비)하는 신앙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0-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학습이 준비의 기적이듯, 종말도 준비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본바와 같이 근본적인 문제는 지진 발생 시기와 지점을 오늘의 과학적 지식으로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참사가 재난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일는지 알 수 없는 그 마지막 날을 대비하는 신앙훈련이 적극적으로 필요합니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규는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25시』에 있어서 잠수함 속의 토끼입니다. 잠수함 속의 산소가 부족함을 맨 먼저 감지해 내는 토끼처럼, 우리도 말씀의 경고에 먼저 민감한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 말씀을 늘 예의(銳意) 주시하고,
둘, 현실을 외면치 말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셋, 그날을 준비, 대비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개선되고, 개혁되고, 잘 되는 비결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재난 방송에 귀 기울인 주민들이 있어 그 피해를 줄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집을 버리고, 진리의 계시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내 안에서 날마다 새 일을 하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혼들 되시기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 686: 주의 은혜의 해 - 그 일상의 행복(주일설교) [1] 김성찬 2011.03.20 1011
» 681: 종말 신앙이란?(주일설교) file 김성찬 2011.03.13 926
71 667: 길과 진리와 생명이인 예수!(주일설교) 김성찬 2011.02.20 824
70 657: 정기지방회 개회예배설교 구속사적 서사를 잇는 신앙공동체 [2] 김성찬 2011.02.07 1202
69 649: 그분의 강청 2- 항령(恒靈)이 항심(恒心)을 낳는다. 김성찬 2011.01.23 1011
68 642: 신길교회 기공감사예배/축사 김성찬 2011.01.14 1419
67 640: 떡밥&은혜와진리교회 축사 김성찬 2011.01.10 1273
66 583: (혀/경건)Beyond 제빵왕 김탁구 김성찬 2010.09.17 1313
65 598: (전도)침노(侵擄) - 귀 있는 자 [1] 김성찬 2010.11.08 1115
64 593: (교리)아노덴(ανωθεν), 그 위에서 오는(from above) 신생(新生) Ⅱ. 김성찬 2010.10.17 969
63 626:(강림절)왜 다윗인가? 2(주일설교) 김성찬 2010.12.19 960
62 621:(강림절) 왜 다윗인가? 1 (설교) 김성찬 2010.12.12 957
61 610: 기억하고 감사하라(추수감사) 김성찬 2010.11.21 887
60 혼인예식설교 김성찬 2010.07.19 1120
59 566: 격려사-평화나루교회 김성찬 2010.07.11 1083
58 560: 축사-논현사랑의교회 김성찬 2010.06.27 1525
57 559: 축사 임태석목사 취임예배 힘찬교회 [1] 김성찬 2010.06.20 3308
56 558: 축시-묵동교회 창립 30주년에 부쳐 김성찬 2010.06.13 1171
55 522: 사순절 이 기쁨과 은총의 계절에-사순절 설교 김성찬 2010.03.14 1255
54 215: 출정식 [3] 김성찬 2009.02.13 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