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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434: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예루살렘교회 임직식 설교
2009.11.29(주일)

예루살렘교회 임직식 설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

요한계시록 21:1-8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린 Back to the Jerusalem!이라는 구호를 흔히 듣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초대 기독교 발상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과 신앙적 열정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그 진리에 굳게 선 십자가의 증인들의 성령 충만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온전한 헌신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말입니다. 과거적 희망, 그 오래된 미래를 오늘 우리의 영적 희망되게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린 이 구호를 수정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과학과 인문학이 20세기에 이르러 그 길을 잃자, 그 해답을 얻고자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 풍조를 따라 교회가 뒤로 돌아가려 합니다. 무너진 성 터, 빛바랜 고문서에 내일의 희망의 근거를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다가 일리야드, 오딧세이로 돌아가려 합니다. 희랍의 신적 인간성으로 회귀하려듭니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의 영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류 구원의 해답인 것처럼 난리 법썩 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해답이 없습니다.

모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 기독교회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 우린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예루살렘의 열정과 충만과 부흥을 이 시대에 다시 구현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우린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호로 발하는 Back to the Jerusalem! 그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의 충만과 헌신의 원동력이, Go to the New Jerusalem!에 대한 갈급한 소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웰컴투 홀리시티!

초대교회 성도들은 Back to the Jerusalem!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Go to the New Jerusalem!이 그들의 신앙고백과 순교적 헌신의 목표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 우린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린 Go to the New Jerusalem!입니다. 신앙의 역사는 환원, 윤회가 아니라 직선적이며, 앞으로 전진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린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 봐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전진 또 전진입니다. 교회는 광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전진하고 또 전진했듯이, 오늘의 우린 주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하는 자세는 전혀 복음적이지도, 종말론적이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다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처럼 우린 현세구복적 신앙관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이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만연되었습니다. 제사장적 귀족 집단인 사두개 파 사람들은 헬라 문화에 정통했으며 헬라화를 지지하고 성서에 기록된 규정들만 확실하다고 믿었던 합리적, 문화적, 귀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적계시를 부정하였고, 능력과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고, 늘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그 사두개파 사람들의 목표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만 삶이 존재 의미가 있는 현상 유지(status quo)자들이었습니다. 내세도 없고 부활도 없어서 지금 여기에 천국을 건설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며 현실에 안주하여 한 걸음도 더 전진하려 들지 않는 자들이 사두개 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조짐이 우리 안에서 배태되고 있어 보입니다.

A.D. 400년경에 아프리카의 히포의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론’에서 두 도성을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과 ‘땅의 도성’(city of the earth)을 그 신국론에서 대조시킵니다. 그는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와 악마의 나라의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이 투쟁은 결국 사탄이 궁극적으로 정복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에 영광중에 수립되기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에온이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하나님의 새로운 영적 통치는 시작되었다―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아담이 탄생합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이처럼 두 우주적 질서가 마니교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투쟁하는 과정에서 옛 에온이 새로운 에온에 의해 점차 정복당하여 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4b).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8)

두 도성은 마니교적 공존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날에 단절적 변혁을 통해 우리 믿는 자에게 온전히 임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거하나, 악인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25-26장을 통해 묵시적인 언어로 이 두 성의 비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24-27장을 작은 묵시록(little apocalypse)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계시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사야 25장과 26장을 보면 중요한 두 도시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두 번째 성은 ‘솟은 성’(lofty city)입니다.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5). 솟은 성이란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사 25:11). 솟은 성의 거민들은 교만하고 교활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찌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찌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사 26:10-11)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솟은 성에 사는 민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나오는 성읍은 ‘견고한 성읍’(strong city)입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1). 아브라함이 들어가길 고대했던 이 성은,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1장에는 그 성의 영광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계 21:18-19). 얼마나 아름다운 성입니까?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의 영광과 아름다운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찬란한 영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7).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입니다. 믿음으로 견고한 성입니다. 우리는 찬송합니다.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찬송27장5절).”

우리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하는 우리는 남다른 목적과 가치관과 삶의 관점과 태도와 그에 합당한 실천이 요청됩니다. 먼저, 이 땅에서 상급을 받고, 이 땅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이 유한하듯, 이 세상도 유한합니다. 엊그제 모 대학병원에서 우먼센스, 라는 여성잡지를 읽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모교수가 50세의 짧은 나이에 폐암으로 죽어가던 그 마지막 임종기였습니다. “살고 싶어.” “그래 죽지마세요.” “아빠 죽으면 안 돼” 그 아내와 16살 어린 딸이 죽어 선 안 된다고 울부짖었어도 그 아빠는 속절없이 세상과 하직을 했습니다. 전혀 타인인 내 눈에서도 그 절규에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이런 죄와 사망 등 인간적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그 하늘 도성은 모든 성도와(히12:22-24), 그리스도의 신부가(계21:9-10) 살게 될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 역사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옛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장차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스런 곳입니다. 우리의 미래적 소망이 바로 그곳에서 실현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4.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맙시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전하는 예루살렘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의미 없이 지어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불려지는 순간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 공동체가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옛 예루살렘을 지향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바라고 소망하는 교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0-11./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요청되는 것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5.

우리를 그 성도 삼으시고, 직분자로 세우신 이유는 그 소망의 인내로 맞이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소망의 작은 등불 되게 하시려 우릴 이 시간 이 거룩한 전에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의 인내로 교회는 전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소망을 절박해야 합니다. 우린 절박한 소망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절박한 소망이 그 성을 소유케 할 것입니다. 소망이 절박할 때, 우린 묵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은 이 미래에 대한 계시를 천정 높은 베드로 성당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딴 섬 밧모에서, 그 갇힌 동굴에서 받았습니다. 그 깊은 섬, 동굴에서 그가 얼마나 기도를 했던지, 그 이마가 동굴 바위바닥에 부딪히고, 부딪혀 탱자만큼 부풀어 오른 이마의 혹된 기도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이마가 터질 만큼 울부짖는 기도의 사람에게 묵시는 임한다는 말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른 사두개적 삶속에 묵시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가 바로 묵시가 없는 시대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부디 이 묵시를 잃은 기도 없는 세상에 기도의 무릎으로 계시를 밝혀 증거 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기는 자는,
묵시 없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비전 없이 분발할 수 없습니다.
소망 없이 인내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묵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와 묵시로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계21:7)는 유업을 완성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 땅에 자기 천국을 쌓으려는 허망한 이들에게 이런 신앙고백을 불러일으키는 예루살렘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신기루 같은 허망한 현실에 매몰된 영혼들에게 절박한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묵시가 이 성전에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예수의 은혜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계22:20-21  계시록 마지막절, 성경 마지막절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공동체 안에서 보다 더 절박한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향하는 전진이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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