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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457: 평강 가운데서 그날을 대망하라
2009.12.27(주일)

오늘은 2009년 마지막 주일이다. 올 마지막 설교에 임해야 했다. 나는 단편적인 올 한 해만을 셈하는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설교를 더 이상 하기 싫었다. 이는 마치 먹었던 것을 토하고, 다시 그 토해 낸 것을 다시 먹는 식의 율법적 퇴고가 너무 식상했고, 무의미 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여 미시적 관점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이 시점을 말씀 안에서 논해 보고 싶었다. 인생이란 것이 성공과 실패의 부침이지만, 종국은 인생의 유한성을 한껏 과시하고 마감한다는 점에서 이생에서의 삶이란 총체적의미에서 미완성이요, 실패라는 것과 하여 다시 올 세상, 그 영생복락의 완전성을 고대하는 것이 우리의 최후, 최종 목적이라는 점을 설파하고 싶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찰나적이며, 별 볼일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에 비추어 자기 위안 삼고픈 내 내적 욕망의 표출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 타계주의에 몸을 내 던지고 싶은 병약한 심사가 그 본질을 기억해 낸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래 회의(懷疑)가 깊은 곳에 진리를 성령께서는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오늘 설교 제목이다.

‘평강 가운데서 그날을 대망하라’

본문은 베드로후서 3: 1-18절, 전장이다.

올해는 시대의 ‘큰 어른’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내 육 십 평생 정신적 지주였던 고(故) 김대중 선생님을 비롯하여, 평화의 사도 김수환 추기경, 광야의 소리 고영근 목사, 김찬국 교수, 장을병 총장 등 어둔 시절 민주화 운동의 불꽃 됐던 분들이 소리 소문 없이 갔다. 젊은 나이에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도 급사했고, 불구의 몸으로도 정신적 장애자인 현대인들에게 희망 전도사 역을 자임했던 장영희 교수도 우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갔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비판하며, 서구 중심의 허구를 비판한 책, 『슬픈 열대』의 레비스트로스도 갔다. 그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상을 지배하는 총제척인 실체가 따로 있다는 이른 바 ‘구조주의’를 주창함으로 ‘의심하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했던 기존의 데카르트적 인식론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젠 알 것이다. 자신의 그 논리의 한계 즉, 모든 것이 현상이 아닌 그 어떤 구조가 결정한다면, 인간의 주체성이나 인간 의지,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던 이들에게 명쾌한 논리를 제공할 수 없었던 그 한계를, 하늘 영존하신 그분 안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올 한해,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있는 죽음은 이상의 인물들이 아니다. 날 아프게 하고 있는 이들은 용산참사로 불구덩이 속에서 비명에 간 이들이다. 난 나이가 들어선지 시사에 관심이 거의 없다. 그 어떤 정파적, 이념적 입장도 상당히 무뎌졌다. 원래 이 나라는 보수와 진보라는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던가 보다. 단지 패권을 쥐기 위해, 너와 나 사이에 상생(常生)할 수 없을 만큼 그 이념에 큰 간격이 있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선전선동을 해 놨기 때문이 아니었겠나 싶다. 그래서 난 그 참사에 대해서도 그 누구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는 식으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공권력과 인권 사이에는 늘 그런 긴장관계가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그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그들을 이 시린 겨울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의 아픔만은 내 단잠을 방해한다. 개발독재에 쫓겨 권리금도 보상받지 못한 채 한대로 내몰리다가 죽음에 이른 그들은 이렇게 항변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열심히 돈 벌어 세금 바친 죄밖에 없는 우리 같은 소시민들을 불태워 죽이고, 죄인 만드는 이 나라는 뭐냐?”

그들은 여전히 그 작은 소망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시신조차 묻을 땅이 이 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박한 소시민의 꿈조차 이루지 못한 저들을 과연 그 누가 신원해 줄 수 있을까? 그 항변이 이렇게 내안에서 교체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린 좇았나이다. 주여! 근데 십자가라뇨? 이게 뭡니까?”

그 예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항변하다가, 예수를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원대한 세속에서의 꿈을 예수께서 이뤄주실 것이라 한때 확신 했었다. 그런데 십자가라니. 국사범의 하수인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다니.

“한해 아니 일평생 주를 위해 나는 하느라 했습니다. 근데 알곡은 커녕 쭉정이 뿐인 이 대차대조표는 뭡니까?”

그랬다. 연말이면 항상 그랬다. 우린 모두 다 그랬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삶은 우릴 항상 속이는 거짓말쟁이다. 날 산타라 불렀던 그 병든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의 장(場)의 평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장수가 제일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었다. 그래도 그는 갈 것이다. 모두가 앞서 간 길을 따라 갈 것이다. 그는 외롭다고 했단다. 아무도 그를 찾아 주지 않았다고 했단다. 오직 금번 회기 회장 김성찬 목사만이 자신을 찾아 줬고, 기도도 해 줬다며 그는 나를 제일가는 회장으로 치켜세웠다. 목소리가 없는 소리로 그는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었다.

그렇다. 그는 맛(味))을 잃어가는 자신을 찾지 않는 인간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어제 쓴 글처럼 우린 그러므로 이익을 넘어, 의미를 좇는 일에 대해서도 우린 그 어떤 보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금년 한 해 나도 총회나 지방회 정치, 행정적으로 남들이 인정하는 의미있는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와 꼬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가 머지않은 장래에 의미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 마음을 다잡는다. 그 의미를, 인연을, 조직을 버리기로 결단해 본다. 쉽잖을 것이다. 그 유혹이, 그 미련이. 그리고 그 미련이 날 힘들게 할 것이다. 그래 우린 사람에 대해서, 아니 이 세상에 대한 기대조차 우린 과감히 버려야 한다. 쉽지 않지만, 어렵지만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기댈 것이 없다면 삶은 절벽이 되는 것인가? 예수의 제자들이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그들은 이익과 의미를 좇으며 예수를 따랐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의미 앞에서 저들은 무너졌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십자가의 참 의미를 일러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오마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를 그들은 대망하는 믿음으로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은 대망했다. 다시 오실 주님. 그들의 시야는 이생을 넘어 저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향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소망으로 그들은 인내했고, 순교했다.

근데 그날이 쉬 오지 않았다. 피안의 삶도 나아진 것 없이, 아니 그 피안의 생을 통째로 바쳐 대망한 차안의 신세계가 그 투신에도 불구하고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들 중 일부를 낙망하기 시작했다. 금방 올 거라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내 죽기 전에 오실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근데 이게 뭔가? 절박한 그 재림대망이 녹슬기 시작했다. 그 중 영리한 그 어떤 이들이 선동하기 시작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베드로후서 3:4절.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만물이 창조 이후 그냥 있다고, 그래 사람들은 죽지 않고 그냥 있더냐? 만물이 또 그냥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근시안적인 인간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뿐인 것을 그들이 알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시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시간관을 저들이 알 까닭이 없었으리라.

하여 베드로 사도는 인생이 내일없는 하루살이 생일뿐이라는 무지를 설파하는 그들과 그들에게 현혹되어 넘어지는 재림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이 더딘 이유를 두 가지로 해설해 주고 있다.

하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둘, 주의 약속이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벧후 3:9절.

그러므로 소망의 인내를 저버린 이들의 탄식과 무기력한 안일에 젖지 말고, 재림 성도들에게 종말론적인 꿈과 소망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벧후3:10-11) 크게 세 가지다.

하나, 도적같이 올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3:13).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전1:9).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절).

금년 가을 우리 교우, 지선 자매 어머니가 오랜 투병 중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따님들이 그 화장장에서 울부짖으며 이렇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엄마 거긴 다시 안 아플 거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21;1-4;22:4).

그 눈물 없고, 저주 없고, 차별 없고, 아픔 없고, 별리 없고, 병 없고, 가난 없고, 죽음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라.


둘, 평강 가운데서 그날을 대망하라(3:14).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라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언14:29-30).

생명같은 마음의 화평은 노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는 데서 온다는 말씀이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계 3:14)고 하신 말씀을 이루는 일은, 재림 소망에 사는 재림성도들의 소망의 인내가 그 조급함으로 흠집이 나지 않길 바라는, 베드로 사도 입을 빌린 성령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당부다.

그 날을 평강 가운데 대망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기하지 않는 일이다. 세상에서 남 잘되는 꼴 눈뜨고 보지 못하는 마음은 하루살이의 행운에 맘을 빼앗긴 결과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속에서의 성취에 너무 안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조급해 하지마라. 남 잘되는 모습 인정 격려해 주고, 내 안 풀리는 일들 너무 조급해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라. 만일 우리의 일생이 고단하고, 억울한 일의 연속일지라도 우린 하늘 상급이 보다 더 크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순교자들이 받을 하늘 상급을 셈해 보라. 살아 순교하는 영혼이 받을 상급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가장 무서운 말씀의 경고는, 저들은 이미 자기 상을 이미 받아 버렸느니라는 말씀이다.

사람의 일생은 아침 안개 같은 것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가난이 죄였고, 장애가 저주였고, 적과 동지가 명백히 구분되었던 에세네파의 율법적 엄격주의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복 있는 자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들 것이라(눅6:20)는 기쁜 소식(복음)을 일러 주셨다.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 된 사람에 대해서 그 조상까지 정죄하려 드는 제자들에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답해 주셨다. 그리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고 당부하셨다.

이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복음을 우리는 평지 복음이라고 한다. 그분이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셔서, 우리 눈높이에 서서 우리의 불안하고, 초조한 현실을 보고 참 평강을 위해 평지에 서서 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분은 그 말씀대로 사셨다. 이 말씀대로 사신 그분은 평강이 생수의 강(요7:38)처럼 넘친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이 처소를 예비하러 천국에 올라가실 것이고, 다시 와서 그 믿는 자를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그 죽으심과 사심과 다시 오심을 불안해하며, 믿지 못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끼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4:27-28).

그 주의 재림을 믿지 못함이 신자의 가장 큰 흠이요, 점이다. 주의 재림을 믿지 못한 불안이 우리의 평강을 앗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 결산 가지고 희비에 젖는다. 찰나적 일생의 공과를 가지고 우린 사람을 판단한다. 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님께서 올해 스러져 간 명사 중에 영원히 기억될 세계적 명사로 뽑혔다. 그러나 우린 십자가 상의 오른 편 강도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 기준이 그 강도가 발화한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는 신앙고백에 담겨 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새 생명을 얻는 비결이요, 그 십자가 상의 치욕과 고통을 이겨 낸, 강도가 얻은 하늘 평강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우린 그 재림 신앙에 굳게 선 평강으로 그 날을 대망해야 한다.

셋,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3:18).

우리의 불안과 불만과 원망과 시비와 시기 등등은 예수를 올바로 알지 못한, 그 은혜와 그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복음에 나는 무지하다. 무지해서 안 믿는다. 못 믿는다. 믿음은 그래서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셨다.(롬10:14). 말씀에 무지한 내가 말씀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평강이 우리 신앙공동체에 임하겠는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가 보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님에 대해서도 나는 무지하다. 주께서 그 제자들에게 평안을 끼치시면서 그 먼저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말씀의 기름부름을 받을 수 없다. 그 평강의 기름부음을 받을 길이 없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5-26).

신앙은 성장하고 성숙한다. 베드로 사도는 그 유언 같은 마지막 편지, 마지막 구절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고 깊은 당부를 전하셨다.

평강 가운데서 새 하늘과 새 땅과 그날을 대망하는 나와 네가 되길 소망한다. 그 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나와 너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만 한다. 오늘도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지한 말씀 안에서 그 날을 대망하는 평강을 누리자. 아멘.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12-29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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