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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기 터키 성지순례기(3)-라오디게아에서 서머나까지

2008.04.10 01:08

윤사무엘 조회 수:3869 추천:71

다섯째날 (3월 29일, 토) 라오디게아에서 서머나까지 이동, 맑음, 쾌청한 봄날씨, 바람, 섭씨 15도(65-70도).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계 2-3장) 을 순례한다. 네크로폴리스(무덤, 분본형, 가옥형, 지석형)를 방문한 후 곧바로 라오게디아 교회터(눔바의 집)에 가서 기도회를 하며, 회개하며 열심을 내기로 결심했다. 2시간 반을 여행하면서 찬양, 말씀 묵상, 간증 등 은혜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주변에 포도밭, 귤밭, 감람나무밭, 무화과를 지났다. 아편이란 말이 바로 터키에서 나옴을 배운다. Afyon이란 지명도 있다. 양귀비인데 정부의 허락을 받아 100여 송이를 심을 수 있고, 수확시 정부에 팔며 의약, 식용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빌라델비아 교회터(사도 요한의 제자가 목회)를 방문하여 기도회를 마치고, 사진을 촬영하는 중, 두분 권사님께서 뒤로 넘어지시면서 요한 교회터(약 2미터)로 굴러 떨어지셔서 다치셨다. 응급차가 왔고 병원에 가서 2시간 반 동안 엑스레이, 응급치료를 했다. 모두들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결과는 뼈에 큰 이상이 없으며, 이권사님의 손목 부분 뼈에 금이 가서 기부스하며, 김권사님은 무릎 출혈을 치료하며 몇 일 고생하시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일정을 단축(사데, 두아디라, 버가모)하고 곧장 서머나 교회로 와서 폴리갑 순교 기념 성당에서 기도회를 가짐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여기서 1시간 반 달려 에베소 근처인 Kusadasi 숙소에 들어 저녁식사후 바로 취침을 하였다. 숙소가 오성급 호텔(Adakule Hotel)로 지금까지 지냈던 숙소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쾌적하였으며 바로 에게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섬에 있는 숙소였다. 내일 밤도 이곳에서 유숙하니 내일 아침에는 짐을 다 둘 수 있다.

 

(1) 라오디게아 (Laodicea) - 온천이 있는 거룩한 도시(Hierapolis): 골로새, 사도빌립의 순교지 (요한계시록 3:14-22)

 

①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holy city’)의 파묵갈레:빌라델비아에서 160km달리면 히에라폴리스에 도착. 라오디게아로 온천수를 끌어들인 수로가 남아 있다. 온천들은 깊숙한 동굴 속에서 발원한다.  그래서인지 고대부터 거룩한 장소로 여겨져 온 곳이다. 주전 2세기 버가모의 왕에 의해 이곳에 도시가 세워졌다. 오늘날 Denizili 근처에 있다. 터키서부지역에 위치한 파묵갈레(Pamukkale‘목화성’Cotton Fotress란 뜻)는 뜨거운 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온천 지대이다. 이곳 온천수에는 많은 양의 석회질이 함유되어 있어 오랜 시간 온천의 물이 흘러내리는 동안 석회질이 침전되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비경을 이루고 있다. 높이가 100m에 이르는 백색 석회화로 이루어진 이 자연의 장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만발한 목화송이로 덮힌 것 같다. 그래서 파묵갈레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여명부터 석양까지 햇빛의 조도(照度)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파묵갈레는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일찍이 로마인들은 이곳에 대형 로마식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그 후 수많은 황제, 제왕들이 즐겨 이곳을 찾아왔다. 온천수가 여러 가지 질병 특히 심장병과 신경통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이곳의 석조건물 목욕탕은 오늘날 대부분 원형대로 복원되어 옛 황제들이 누렸던 호사를 범인들도 만끽할 수 있다. 이곳의 양털 카펫은 특산품이다. 1,200여개 있는 공동묘지가 우리나라와 같이 봉분(석관) 형태이다. 고대 왕들의 무덤도 우리와 같은 왕릉이다.

 

 ② 빌립사도의 기념교회:히에라폴리스에는 사도빌립의 순교기념 교회터가 있다. 빌립은 베드로, 안드레와 더불어 벳새다 사람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약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사도이다. 한번은 주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8-11) 야외경기장에서 서북쪽에 있는 언덕에 위치한 이 교회는 비잔틴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5-6세기), 성 밖에 있다. 두어군데 입구에 십자가 문양이 인상적이다.

 

③ 신약시대에 히에라폴리스 근처에 골로새가 있다. 히에로폴리스가 북쪽, 라오디게아가 동쪽, 골로새가 서남쪽. 이들 세 도시에는(지형상 길쭉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음)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전도자 에바브라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교회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 60-130)는 히에라폴리스교회의 지도자였고 당대 대 신학자로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④ 라오디게아:히에라 폴리스(히에라볼리)에서 7km떨어진 지점에 라오디게아가 있다. 이 지역을 장악한 그리스의 통치자 안티오커스왕 (Antiochus II)은 도시를 건설한 뒤(주전 3세기) 왕비 라오디게아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명명했다. 고대 라오디게아에서 사용한 물은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였다. 온천수를 이곳까지 끌어온 돌로 만든 수로가 지금도 남아있다.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는 7km에 달하는 수로를 통과하는 동안 식을 수밖에 없어 라오디게아에 오면 미지근해진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하는 말씀을 기억한다. 신앙의 열도 그곳에 공급된 미지근한 물에 비교한 것이다. 그들은 부요한 세상과 타협하며 무사안일한 자세로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지적한 말이다.

 

⑤ 고대 이곳에는 병원도 있었다. 특히 눈병을 고치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다. 전설적 명의 갈렌(Galen, AD 130-c. 200)도 추천했던 이 안약(알약으로 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한 것은 라오디게아가 안약의 산지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 분명하다.(버가모의 병원에서도 이 안약을 사용했으며 바울도 이 안약을 쓰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2) 빌라델비아(Philadelphia) 라오디게아에서 2시간 반 가면 소도시 알라세힐(‘신의 도시’)이 나온다. 빌라델비아가 있던 장소이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일한 교회 유적은 비잔틴 시대에 지었던 교회의 세 기둥뿐이다. 한개 기둥의 터만 남아 있다. 약 15m 높이의 육중한 두 기둥은 당시 교회의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곳에 요한의 제자가 세운 교회가 있다. 스승의 이름을 따서 “성 요한 교회” (St. Jean Church)라고 한다

 

(3) 사데(Sardis)-부귀 멀리한 의인의 고장 주전 6세기경 터키 서부지역을 제패했던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수스(Croesus)왕의 수도가 바로 사데이다. 이즈미르에서 약 70km 위치에 오늘의 사르트(Sart)가 바로 사데이다. 트몰루스(Tmolus) 산등성이 중턱에 남아 있는 성터, 주전 700년부터 150여간 리디아 왕국의 궁전이 있던 곳이다. 황금으로 가득 찼었다는 왕궁은 간 곳이 없고, 궁전을 지키던 성벽만이 일부 남아 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사데를 끼고 흐르는 작은 시내는 황금천이라고 부를 만큼 많은 금을 함유하였다. 그곳에서 크로이수스 왕은 트몰루스 산만큼이나 많은 분량의 사금을 채취하였다. 최대의 부왕이 되었다. 그는 금화를 주조하여 최초로 주화를 만들기도 했다, 아테네의 솔론이 사데를 방문하였을 때(솔론은 아테네 7대 현인의 한사람으로 출중한 시인이요 정치가였다) 크로이수스 왕은 자랑스럽게 왕국의 보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솔론에게 물었다. ‘아테네 현인이여,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왕은 솔론의 입에서 자기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솔론은 대답하기를 ‘사람이 행복하게 생애를 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전 540년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Cyrus)왕이 침공, 사데의 방위는 무적의 기병대와 난공불락의 성벽에 의존하고 있었다. 페르샤의 고레스왕은 말들이 낙타를 싫어하는 사실을 알고 휘하의 병사들에게 군비를 실어오는데 사용했던 낙타를 타고 사데의 기병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예측대로 몰려오는 낙타 떼를 보고 사데 기병대의 말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 다음 과제는 철옹성과 같은 사데 성벽을 기어 올라가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다. 그때 우연히 사데 성안의 병사 한 명이 실수로 투구를 성 밖 밑으로 떨어뜨린 일이 생겼다. 성벽을 타고 내려와 투구를 집어서 다시 성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난공불락의 사데 성벽에도 기어오를 수 있는 취약지점이 공개된 것이다. 그날 밤 페르샤 군대는 그 지점을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사데 성을 함락시켰다. 크로이수스 왕은 붙잡혀 불에 타죽게 되었다. 화염이 그의 몸을 휩쌀 때, 그는 솔론의 이름을 소리높이 불러 외쳤다. ‘솔론이여, 솔론이여’ 뒤늦게 아테네 현인의 말뜻을 깨달은 것이다.

 

프린스턴대학에서 20세기 초에 발굴하였고, 20세기 초에까지 하버드대, 코넬대학이 주축이 된 합동 발굴단이 발굴 작업을 계속 했다. 순금을 제련하는 기구였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 이상 발굴한 적도 있다.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있어, 크로이수스 왕의 전설적인 부가 역사적인 사실로 판명났다.

 

사데에서 발굴된 유명한 유적 중 하나는 대리석으로 건축된 체육관(Gymnasium)이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지대한 체육관의 전면부분은 현재 복원되어 있다. 로마식 도시에는 으레 세워졌던 체육관은 단순히 육체만 단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교육도 이루어졌던 교육의 장소였다. 체육관 옆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발굴되어 있다. 1,000명이상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 유대인 회당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사데에 있는 아데미 여신의 신전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다산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신전이다. 전면의 폭이 50m에 길이가 90m애 달하며, 모두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대한 규모였다. 지금도 18m 높이의 이오니아식 석주 두 개가 외롭게 서 있다.

 

아데미 신전 남쪽 끝부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다. 비잔틴시대의 교회로서 기도처라고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초라한 모습이다. 사데 교회는 분명 큰 교회는 아니었다. 계시록의 기록에도 사데 교회의 규모를 칭찬하지 않았다. 그곳의 소수 의인을 칭찬하였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라’ 당시 로마시대의 부와 권세의 상징은 자주색 옷이었다. 사데의 의로운 소수자들에게 자주색 옷이 아니라, 백옥 같은 흰옷이 약속된 것이 의미 깊은 말씀이다.

 

(4) 두아디라 - 빌립보의 첫 성도가 된 루디아(Lydia)의 고향 현재는 특별히 방문할 곳이 없고 시골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점심 식사를 했다.

 

(5) 버가모(Pergamum) - 양피지 발명과 도서관 이즈미르(신약의 서머나)에서 정 북쪽으로 100km쯤 올라가면 버가모에 도착한다. 지금은 ‘버가마’로 불린다. 오늘날 인구 6만 명 정도의 소도시로 농업 집산지이다. 버가모의 전성 시기는 주전 3-1세기의 그리스 시대였다. 당시 이곳은 버가모 왕국의 수도로서 주변지역에 군림하던 큰 도시였단다. 버가모의 산 위에 세워졌던 아크로폴리스의 왕궁과 신전들의 유적은 한때 번성했던 버가모 왕국의 권세와 영광을 증언해 주고 있다. 300년간 아시아의 수도였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버가모는 그리스의 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그리고 아테네 신전과 함께 전 아시아의 로마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런 신전에서 버가모 주민들은 황제숭배와 함께 로마제국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사도바울과 요한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도 로마제국의 황제를 ‘주와 하나님’으로 예배하도록 강요받았다.

 

언제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들을 권하여 복음을 전한 것(행 19:26)으로 보아 바울 당시에 이곳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버가모 교회의 최초 감독은 ‘사랑하는 가이오’ 였고, 그의 뒤를 이어 안디바가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안디바는 치과의사였고 후에 순교를 당했다.

 

버가모에서는 이단들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2세기 중반 버가모 교회 감독인 데오투스가 이단 코로르바시우스를 저주했다. 계시록의 서신에 보면 버가모 교회는 두아디라교회처럼 칭찬과 책망을 같이 듣고 있다. 교회에 대한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압력도 계속되어 3세기경 데시안 황제 때 3명의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아가토도루스와 아가토니케 자매가 영광스러운 신앙고백들을 하고 순교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버가모 교회 감독이었던 요세푸스는 347년에 사르디가 공회의에 참석하여 교회의 규율 법을 재확인했으며, 고위성직자들에 대한 재판은 로마 교회 감독에게 일임하도록 하였다. 36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개최된 공회의에는 버가모 교회 대표로 두러쿤타유수가 참석했으며, 431년 에베소 회의 (3차 공의회)에는 필립이 참석하였다. 5세기 이후 버가모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는 단성론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유티시안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716-171년 버가모는 칼리프였던 슐레이만의 형제 마슬라마에 의해 포위대어 대파되었다. 그 후 버가모의 기독교인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14세기 초 오스만 터키족에 의해 정복된 후에는 교회도 회교사원으로 바뀌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넘어간 뒤에는 소아시아 전역에 있는 많은 교회가 회교사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도서관 건물 자리가 남아 있다. 그리스 시대 이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단다. 버가모 도서관은 도서수집광이었던 유메네스 왕의 후원으로 크게 팽창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버가모 도서관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이곳에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시켰단다. 그래서 버가모 사람들은 파피루스를 대체할 새 서사용지(書寫用紙)를 만들어냈다. 양피지였다. 양의 가죽을 펴서 늘린 다음 표백, 건조하면 훌륭한 필사재료가 된다. 이를 버가멘(Pergamen)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라틴어를 거쳐서 영어의 parchment (양피지 羊皮紙)가 되었다. 버가모와 알렌산드리아 사이의 ‘도서관 전쟁’은 결국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주전 1세기 경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매우 상심했고, 이 사실을 알았던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버가모 도서관의 장서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한때 20만권 장서를 자랑하던 버가모 도서관이었다.

 

고대 최고의 종합병원이었던 아스클레피온(Asclepion) 유적이 있다. 1960년대에 발굴되었다. 들어가는 포장길이 폭이 20m나 되는 대로로 직선으로 800m에 이른다. 길 양편에 약 15m높이의 석주들이 도열되어 있다. 주전 4세기 때 설립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주후 2세기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 때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는 의료의 신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의료의 신을 상징한다. 뱀이 껍질을 벗고 새 생명을 얻듯이 아스클레피우스의 도움으로 사람들이 질병의 껍질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다는 뜻에서 뱀이 ‘의료신’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신의 이름에 유래하여 버가모의 병원 이름을 아스클레피온이라고 지었다.  병원 구내에는 의학 도서실, 일반 치료실, 음악요법을 위한 야외음악당, 명상요법을 위한 긴 터널 통로, 목욕요법을 위한 진흙 목욕실들이 갖추어져 있다. 약물투여 뿐 아니라 심리요법을 포함한 전인격인 치료방법을 사용한 병원인 것이다.

 

기록에 보면 환자들은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이라고 불리는 대리석 바닥을 한걸음씩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부터가 치유의 시작이다. 그들은 죽음의 신 하데스로부터 멀어지면서 건강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게 가까이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한다. 지금도 그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간다. 80미터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천정의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은 신의 음성처럼 말하면서 환자들에게 회복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다. 이 과정을 거친 환자들은 직경 26.5미터의 둥근 돔이 있는 치료실로 들어가게 된다. 이 치료실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아래층만 남고 2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곳에는 환자들이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환자들은 잠들기 전에 건강의 신에게 기도드릴 것을 권유받고 잠이 깬 후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 해몽을 해준다. 이 경우 해몽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유도하였다. 이 치료실 남쪽에는 환자들이 일광욕실로 사용하던 테라스가 있고, 치료실 북쪽에는 가장 중요한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이 있다. 환자들에게 삶의 의욕을 심어 주기 위해 연극과 음악회가 공연되던 원형극장도 있다. 이 병원은 로마 제국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였다. 하드리안 시대에 그 유명한 아리스티데스도 이곳에서 13년 공안 머물렀고, 앞서 언급한 카라칼라 황제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복음신문, 2/21/99, 만찬의 초대석, 김주찬,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이곳은 당대 최고의 의학자 중 한 사람인 ‘갈렌’(Galen, 주후 130-200경)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버가모 출신인 갈렌(주후 2세기)은 해부학분야를 개척했고, 그이 병리학 연구는 근세에까지 서구 의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버가모의 아스클레피우스 고대세계 최고의 의료센터로 손꼽히게 된 데는 갈렌의 힘이 크다.

 

버가모에 남아 있는 유적으로 오늘날 현지인들이 ‘크즐 아블루’라고 부르는 거대한 벽돌 건물이다. 터키어로 ‘붉은 벽돌’이라는 뜻으로, 벽돌의 색깔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 붉은 벽돌은 주후 2세기 경 세워졌는데 본래는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위한 신전이었다. 세라피스는 태양신이다. 이집트 신전이라고 불린다. 하드리안 황제시대에 건축되어졌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신전이 세워진 특이한 위치이다. 세리노스 강위에 세운 것이다. 지금도 지하층에 내려가면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신전 밑에 직경 9미터의 도관 2개를 묻어 세리누스 강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졌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개천 위에 신전을 지은 것을 보면 고대에는 이 장소가 특별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전은 길이 60미터, 폭 26미터, 높이 19미터이다. 세라피스 신전의 구내는 가로 100m, 세로 260m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신전 자체도 높이가 20m에 달하는 웅대한 건축물이었다. 신전의 중심부는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 흔히 사용되던 도리아, 이오니아, 고린도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조각 기둥으로 되어 있다. 남성의 모습,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이 서로 등을 붙인 모양이다. 신전 안에는 수로와 물탱크가 있다.

 

이 신전은 그러나 주후 300년에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 이 신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집트 신전이 버가모 기념교회로 전환되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교회로 사용되었으나, 7세기 화재로 불타버렸고, 다시 양편에 교회를 건축하여 사용하여 오다가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점차 황폐해져 13세기 이후로 예배는 완전히 그치게 되었다.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오늘날은 한 곳은 이슬람 사원, 다른 한 곳은 이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버가모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황제 숭배를 위한 예배처가 곳곳에 설치되었다. 로마시대에 아시아의 각 도시는 황제신전 건축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이 특권을 따내기 위해 도시 간에 많은 경쟁이 있었다. 버가모는 가파른 V자형의 절벽 사이에 트라얀 신전을 건축하기로 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지형을 고르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신전이 완공되기도 전인 주후 177년에 트라얀 황제가 사망하고 말았다. 특권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버가모 주민들은 매우 초조했다. 트라얀 황제의 뒤를 이은 하드리안 황제는 이 사실을 아고고 버가모의 특권이 계속 유효하다고 선포했다. 버가모 주민들은 이게 보답코자 신전이 완공된 후 트라얀 황제의 석상과 나란히 하드리안 황제의 것도 신전 내부에 세웠다. 트라얀 황제의 숭배신전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6) 서머나-폴리갑 순교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서머나 교회는 칭찬받은 교회였다. 오늘날 에게 해의 항구도시 이즈미르(Izmir)이다. 구서머나, 신시가지가 있는 국제적인 무역항구이다. 인구 350-400만 명으로 터키에서 이스탄불(1200만), 앙카라(400만)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세계1차 대전으로 오스만 터키제국(600년간 통치)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들어서면서 도시이름도 서머나에서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현재 도시의 모습은 터키의 어느 곳보다 서구적인 풍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주전 3000년경 에게 해안의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리스 최대 서사시인 호머(Homer)의 고향이라고 전해지는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 때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330년경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서머나에 주둔하였다. 근처 파거스(오늘날 카디페칼레 산이라 부름) 산에서 사냥을 다녀와 낮잠을 자던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네메시스 여신으로부터 서머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지시였다. 꿈에서 깬 그는 곧 실행에 옮겼다. 파거스 산에는 거대한 성채를 짓고, 산 밑 해안지역에는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스식 대도시가 서머나에 건설된 것이다.

 

주전 20년대, 이 도시는 로마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더욱 발전하여 대형 시장건물인 아고라, 2만 명 이상 수용하는 야외 원형극장, 운동경기장, 체육관, 로마식 공중목욕탕(Roman bath)등을 두루 갖추었다. 주후 170년대에 큰 지진이 나서 서머나는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 서머나의 웅변가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에게 도시 재건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철학자로서도 유명하였던 황제는 명문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복구는 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1930년대 이후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활발한 발굴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아고라가 대표적이다. 그리스나 로마식 대형 석조 건물로 된 시장터이다. 여기서 발굴된 석주(石柱)는 120m, 80m 크기의 고린도양식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물건을 저장하는 지하층 부분까지 완벽하게 만들어져 서머나가 경제적으로 융성하였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파거스 산위에 알렉산더 대왕 때 쌓았던 성채일부와 식수를 저장했던 저수시설이 남아 있다.

 

서머나에는 일찍부터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서머나 교회가 배출한 빛나는 인물은 순교자 폴리갑(Polycarp)이다. 2세기 전반,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체포되어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이미 86세였다. 총독은 그의 고령을 고려하여 죽음을 면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총독은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당장 살려 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대답하기를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소.’ 그는 이 유언을 남기고 화형을 받고 순교했다. 오늘날 그를 기념하는 교회가 시내 한 복판에 있다. 역사적인 기념교회는 17세기 때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교회는 그 직후(1690년, 1898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교회 구내에 수도원도 함께 있는 이 기념교회는 과히 크지 않은 규모로 캐톨릭 성당에 속한다. 내부에는 성경의 주제뿐만 아니라 폴리갑의 생애와 관계된 성화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이 성화들은 19세기 말 이 교회를 수리할 때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것이다. 폴리갑의 순교 장면도 있다. 또한 폴리갑이 체포시 스스로 화형장으로 가는 모습의 성화도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7-23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