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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 9:31-32 감히 묻기도 무서운

2009.07.08 18:39

김성찬 조회 수:3316 추천:45

영혼일기 335: 감히 묻기도 무서운
2009.07.08(수)


이에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마가복음 9: 31-32.


그래 그때 난 감히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가 없었다.

“  
   2000. 4월 12일 수요일

   
  
그 만(萬의) 하나, 오독(誤讀)의 기적을 바라며, 아침부터 이 시간 오후 늦게까지 간호사실 앞만    서성거렸던 나에게, 그 의도된 주치의와의 조우(遭遇)는 이런 확정판결로 끝을 맺고 말았다.

   ‘역시 암(癌)이네요.’

   초음파 사진에 대한 자신의 판독력을 과시라도 하는 듯 주치의는, 아래턱을 잡아당기며 확신의 언어를 내뱉는다.

   이제, 당신의 여명(餘命)이 믿어지지 않는 시한,

   겨우 이, 삼 개월 밖에

   남지 않았답니다.

    어머니.           
   (불효자가 운,『어머니 나의 어머니』 중에서)


그랬다. 그 잔인했던 2000년 이맘때 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 어머니의 그 수상한 검진절차에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그 불길한 검진 이후, 그 충격적인 판정이 나오기까지 며칠 동안 나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었다. 나는 그 확진 결과가 나오는 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그 병동을 서성거렸었다. 차마 그 누구에게도 묻기 어려운 두려움이 내게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마가복음 9장, 예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다가. 난,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라는 말씀에 눈길이 머무르면서, 그 천 년 전 공포와 불안이 내게 다시 엄습했다.
 

모리아 산의 한 지경을 목적지 삼고, ‘감히 묻기도 무서운’ 묵언 산행을 감내해야만 했던, 제물 된 아들 이삭이 감지했을 공포와 불안이 뇌리를 스친다. 그 이삭의 불안과 공포는 순종이라는 사명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사명의 전조였다. 그 사명은 고난의 종의 사명에 버금가는(?), 아니 그림자 같은 사명이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이사야 53:7.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으로 시작된 소명에 대한 응답 찬송을, 철부지 신학생 시절 외에는 자청해서 불러본 적이 없다는 그 어떤 목회자의 진담 같은 농담이 기억난다. 스승 예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면 좌의정도, 우의정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현세적 욕망에 사로잡혔던 당시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수난 예고는 ‘감히 묻기도 무서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린도전서 13:9.

그랬을 것이다. 그 계시의 비밀을 지금 밝히 알고 있는 우리도 여전히 그 수난만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 제자들은 “(A)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B)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 중, 상(上) 반절(半切) “(A)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는 말씀만 들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력만큼만 들려왔을 것이다. 하여 현세적 욕망에 부풀어 있던 그들은 그 수난예고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그 제자들은, “(B)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계시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현세적 욕망에 눈귀가 막혀서만이 아니라, 그 ‘죽어 다시 사는 영생’의 비밀을 그들이 알 까닭이 없었을 터이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미래적 찬란한 전망에 대해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에 뵈는 수난, 그 공포와 불안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광속구로 날아오는 야구공이 눈앞에서 달덩이만 해져서, 때리는 순간 홈런인 줄 직감했다고 말하는 타자들을 대한다. 그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의 수난만 커져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폭삭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일순 그 병동이 암 병동 되어 버린, 하늘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에 내가 무너져 내렸던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난 그 누구에게도 감히 그 최후통첩을 전하지 않고, 그 저녁 수요기도회를 인도하러 강단에 올랐었다. 늘 하던 대로 나는 회중들과 함께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암송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불안과 공포를 털어버리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사도신경을 암송해 나아가다가 나는, 


   2000. 4월 12일 수요일

  수요예배를 인도하다가,

  우리 다 같이 신앙고백으로 사도신경을 암송하다가,

  ‘몸이 다시 사는 것과’를 읊조리다가,

  순간,

  박하사탕을 한 입 와삭 깨어 문 듯, ‘화-한’한 감흥이 전신을 감싼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다시 오실 주님, 다시 만날 우리 어머니.’
  

   부활 신앙,
   오~ 그 보배로운 신앙 유산이여!

  

  (불효자가 운,『어머니 나의 어머니』 중에서)
  ”


내겐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상대방의 말 도중에 끼어들어, 신속한 내 판단을 쏟아 붓는 경향성이 내겐 있다. 너무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그렇다고들 지인들은 나를 나무란다. 그래도 쉽게 그런 악습이 버려지지 않는다.

근데 문제는 그런 잘못된 청취 습관이 말씀에도 그래도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천일야, 나는 미래적 전망보다는 과거적 비관에 날 내던져졌었다. 오늘 수난예고 앞에서 절망해 마지않던 제자들처럼 나도 상(上) 반절(半切) 말씀에 주눅 들었던가 보다. ‘죽어 다시 사는’ 아니 ‘죽어야만 다시 사는’ 그분 안에서 이미 이뤄진 미래적 전망을 난 응시하지 못했었다.  


“(B)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下) 반절(半切)에 눈을 들라. 이 시간 성령께서 권고하신다. 주 안에서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는, 부활장 마지막 구절-고전 15:58 하(下) 반절(半切) 말씀을 기억하라. 새벽이 두려운 사람. 그 새벽을 깨우는 성령의 부드러운 음성에 귀를 기우리라.

오늘 절망했던 그 제자들이,
이후 그 미래적 전망을 위해 모두 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듯이.
고난에 몸을 내던지면서도, 고난이 고난으로 느껴지지 않던,

그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박하사탕 되던
다시 사는
우리의 장밋빛 미래적 전망을…….


누리라.
선포하라.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사야 5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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