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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성경이 성경되게하는 7대 관점들

2007.11.06 15:43

김성찬 조회 수:1408 추천:27

성경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성경이 성경되게하는 7대 관점들
                                
                  
                          

  사건

  믿음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한 처음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 전해지면서 믿음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동은 그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의 몫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론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해석도 먼저일 수 없습니다. 실제 사건이 먼저 있었습니다. 조직신학적 신론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계신 것입니다. 구원론이 있고 난 후 구세주가 오신 것이 아니듯, 성령의 감동하심 또한 어떤 감성주의자의 자가발전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 사건입니다. 세상이 말씀으로 존재하게 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말씀하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창조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말씀(the dynamic word of God)의 결과인 것입니다.
  구속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에 기초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마틴 루터는 성서를 가리켜 “성서는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사건’을 담고 있는 구유라는 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 분이 이루어 놓으신 ‘말씀 사건’안에 있는 사죄의 은총과 구속의 은혜를 내 것 되게 하십시요.  그 사건을 믿으십시요. 엄밀히 말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란 없습니다. 환히 들여다보면서도 믿지 않는 불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건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만나십시요. 그리고 고백하십시요, 신앙의 그리스도를.


  융합?

  알이 먼저가 아니라 닭이 먼저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가 먼저 있었습니다. 지으심을 받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한 완전한 피조물이 먼저 있었습니다. 창조란 다수가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먼저 완전한 하나이었던 세계가 분리되고 분열되는 아픔을 우리는 그분 창조주 하나님의 탄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교를 종교화’한다는 기사를 대합니다. 성균관 유도회는 “이번 종헌 제정은 이제까지 ‘사상’(思想)으로 치부되던 유교가 ‘종교’(宗敎)임을 선언하는 코페르니쿠스적 결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핵분열의 시대에 걸 맞는 영적 분열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에 살아 가고 있습니다. 한 백화점에서 백가지 물건 팔듯 오늘 우리의 구원 방정식도 나눗셈만 거듭해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해법을 핵융합, 지평융합에서 찾습니다. 지평융합, 그들은 ‘종교간의 대화’라는 대명제하에 ‘어느 길을 택하든’ 이를 수 있는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동서(東西) - 고금(古今), 그 어떤 종교나 종파를 가릴 것 없는 융합을 말합니다. 그러나 핵융합은 핵분열보다 더 엄청난 파괴력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혼합주의의 거대한 음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 6:15).”

  칼 발트(Karl Barth)는 “그리스도교만이 선교종교이기 위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만이 타종교들이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서도록 권유하고 그에 도전 할만한 절대적 자기확신을 가진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다른 종교의 세계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임무와 권위를 갖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배후

  요즘 심진송이라는 무당이 신바람 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예언한 김일성 사망이 적중했다고 해서, 그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이고, 이제 그 여인은 세계적으로도 김일성만큼 유명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때 아닌 죽은 김일성 동무(?)의 영향력, 그 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듯한 묘한 착각이 듭니다.
  애굽의 박사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출7:11-12).”

  상상컨데, 그 배암은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 된 그 뱀보다 더 빛깔이 고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갈 고운 뱀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고, 타락시킬 수는 있었어도 구속(출애굽)의 권능은 없었습니다. 겉모습만 현란한 무당의 춤사위엔 인생문제의 진정한 해답이 없습니다. 진저리만 있을 뿐입니다. 악령이 엄습할 때 춥고 싸늘하여 치는 몸부림, 그 진저리 말입니다. 우리는 마술사가 그 품에서 날려보낸 비둘기를 바라보며 아하~ 탄성을 보내지만, 그것이 “무(無)에서”(ex nihilo)의 창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술사의 마술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술은 눈속임이기 때문입니다. 마술의 배후에 눈속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신통하다는 무당의 예언(?)을 푸닥거리 이상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 신통력의 배후엔, 멀쩡한 사람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진저리치게 하는 악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제기는 현란한데 거기엔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박사들이 양산한 뱀들은 또한 술수요, 기만이요, 악한 영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 그 배후에는 승리자 여호와께서 든든히 서 계셨던(출7:8)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 그 배후를 직시하십시요. 그리고 확신에 거하십시요.  그리하면 당신도 그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의 배후에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無)에서(ex nihilo) 유(有)”를 창조하신 나의 창조자, 그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통하여

  프리즘을 통하면 일곱 색깔 무지갯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 대해 상고할 때,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묻지 말고, 프리즘을 통하여 빛을 보듯 바울을 통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봐야 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뜻.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등등. (누구,무엇)에 대한(about)이 아니라, (누구,무엇 )을 통한 (through)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살필 때 우리는 모든 결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부터(from above)

  이솝 우화는 베짱이가 한 겨울에 개미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쉬울 것 없는 개미가 베짱이를 찾아간 것으로 비유할 만한 사건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기록이다. 원시 종교에서 고등한 종교로,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발전한 일신교(一神敎)의 경전이 곧 성서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께서 힘써 인간을 찾고 계심을 나타내 보여 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피하고, 그 분과 관계없는 삶을 살려고 버둥거렸는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인내로 우리를 찾고, 또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겔34:11).”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찾고 찾으신 구체적인 행위를 우리는 위로부터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2으시니라(약1:17).”

  성서는 기록 이상의  것이며 절박한 부름과 초청의 메시지입니다. 성서를 구약,신약 이렇게 나누어 부릅니다. 이 언약(Covenant)이 양편 사이의 계약(contract)과 협정(agreement) 같은 것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먼저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권리를 주심으로 자기와 동등한 위치로까지 우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합니다.  찾고, 찾는 소망의 인내, 이는 누구의 몫인가. 진정 인내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지식

  “누가 항아리를 부수었니?”   “난 안 깼어요.” “그 얘가 안 깼다면 안 깼을 거에요.”
  성경 지식에 대한 무지를 꼬집는 유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 교회학교 교사가 ‘사 60:1’을 찾느라 사도행전을 열심히 뒤졌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지식이란 모세 오경이 어떤 책들이며, 데살로니가 전서는 언제 기록 되었는가라는 식의 암기위주의 성경지식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함을 말합니다. 관찰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지식을 몸으로 체득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치명적인 과오는 바로 참여자보다 관찰자로 성서를 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엑센트

  우리 주님께서는 안드레의 인도로 그 앞에선 시몬, 요한의 아들 시몬을 보시고 ‘장차 게바’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육에 속한 사람 ‘시몬’에게 강조를 두신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 ‘장차-베드로(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에 강조점을 두셨던 것입니다. 이미 벌써(already)와 아직 아닌(not yet) 그 제자를 대하실 때, 이미 벌써(장차)에 엑센트를 찍으셨던 것입니다. 흠도,티도,점도 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강조를 두신 것입니다. 내일에 서서 오늘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영적 자부심을 갖고 담대하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자유의지

              순종                    불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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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말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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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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