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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기 그리스 성지순례기(6)-고린도, 아테네(아띠나)에서

2008.04.10 01:13

윤사무엘 조회 수:4209 추천:57

여덟 번째 날(4월 1일, 화)  고린도, 아테네(아띠나)에서, 화창한 날씨, 섭씨 10-24도.

 

어제밤 새벽 1시에 밧모섬에서 출항한 배는 잔잔한 유리바다를 헤치고 9시간 항해 후 아띠나(Athina=Athenes, 아테네)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 Cabin에는 정목사님, 이목사님, 박목사님과 함께 4명이 벙크베드에서 잤지만 모두 곤하게 주무셨다. 아침에 눈을 떠니 에게해 바다위로 배가 조용히 달리고 있었고, 동녘에 태양이 올라 있었다. 에게해는 섬이 많이 군데군데 섬이 있어 망망한 대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많은 분들이 조반을 들고 계셨다. 샌드위치, 커피, 물로 간단히 조반을 들고 나서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였다. 이미 아테네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모두 사진을 찍는데 열심이다. 나도 두어장 찍고 나서 배에서 내리는데, 차목사님께서는 여기서 작별을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 가이드가 되시는 이 집사님 내외분(부인은 이순자 집사)이 영접을 하신다.

 

우리는 바로 고린도로 달려갔다. 87km를 한시간 40분에 걸쳐 도착하니 이미 12시 반이 된다. 유적지와 박물관을 약 1시간 살펴 보고, 다시 고린도 운하를 지나 아테네(현지 발음은 아띠나)의 시내 한국식당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된다. 식사 후 아크로폴리스(니끼신전, 파르테논 신전 포함), 아레오바고(바울의 설교지), 소크라테스 감옥, 그리고 시내관광(아카데미, 국회의사당, 제우스신전터)을 하면서 북상했다. 약 150km를 달려 에게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숙소에서 일박을 했다.

 

헬라공화국 국교 - 희랍정교회 (Greek Orthodox Church)        현재 그리스 내에 정교회가 4만개 있는데 실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는        불과 1700개 정도이다.

 

종족:Ionic, Dorian, Hellenian족 위치:에게해, 아드리아해, 이오니라해 등 삼면이 지중해에 사여 있다       (지중해의 총 길이는 45000km) 인구:2008년 현재 1100만이며 인구의 40%가 수도에 몰려 살고 있다.      아리안에서 내려온 집시들도 50만이 사는데 이중 9만 5천명이 시민권자이다.

 

면적:남한의 1.5배 정도 된다고 하니 인구 밀도는 낮다.      세금 18%가운데에서 종교세가 포함되어 있어 성도들이 십일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정치형태:내각제 민주주의, 단원제(300명 의원), 어떤 집권당이든 150석 이상 되어야           한다. 수상이 대통령을 지명하는 셈이다.

 

공휴일:성탄절, 부활절 휴가 2주간씩, 성령강림절, 노동절, 광복절, 신탁 반대 기념일(10월 24일).

 

사상가:Homer(born at Smyrna):The Iliad, The Odyssey Aeschylus(525-456 BC):The Suppliant Maidens, Agamemnon, The Persians, The        Liberation Bearerers, Seven Against Thebes, The Eumenides, Prometheus Bound Sophocles(495-406 BC):Oedipus the King, Electra, Oedipus at Colonus, Antigone Ajax, Thje Women of Trachis, Philoctetes Euripides(480-406BC):Rhesus,Ion,Helen, The Medea, Andromache, Orestes, The Phoenician Women, Hippllytus, Alcestis, The Bacchae, TheHeracleidae, The Suppliant Women, The Trojan Women Iphigenia in Tauris, Iphigenia in Aulis, The Cyclops, Aristophanes(445-380 BC):The Acharnians, The Knights, The Clouds, The Wasps, Peace,    The Birds, The Frogs, Lysistrata, Wealth, The Poet and the Women, The    Assemblywomen Herodotus(484-425 BC):The History Thucydides(460-400 BC):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Plato(428-348 BC):Charmides, Meno, Parmenides, Lysis, Euthyphro, Theaetetus, Crito, Apology, Sophist, Phaedo, Philebus, Gorgias, Laws, Symposium, Timaeus, The Seventh Letter,  Critias, Ion Aristotle(384-322 BC):Categories, Topics, Physics, On the Heavens, Metaphysics On the Soul, On Memory and Reminisecence, On Dreams Rhetoric, On Poetics, Politics Hippocrates(c. 400 BC):The Oath, On Ancient Medicine, Of the Epidemics Galen(AD 130-c. 200):On the Natural Faculties 1)

 

고린도 (Korinthos) - 2차전도 여행시 1년 반(18개월) 체류 아테네를 떠나 서북쪽 방향으로 80km정도 달려가면 지협(地峽)이 나타난다. ‘고린도 지협’이라고 불리는 이 잘록한 땅이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이어주는 길목이다. 고대부터 이 지협은 해상교통이 큰 문제 거리였다. 고린도 지협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운항하는 배들은 반도를 한 바퀴 빙 돌아 먼 거리를 다녀야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돌로 포장된 길로 이 지협을 막았다. 그리고 특수하게 만든 바퀴 달린 수레에 배를 얹어 실은 후 수레를 끌어 이쪽바다에서 저쪽바다로 배를 이동했다. 1956년 고고학 발굴 때 배들을 실어 날랐던 도로가 발굴되었다. ‘디올코스’(Diolkos)라고 부르는 선박 이동용 도로에는 지금도 그때 배를 이동했던 수레들의 바퀴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다.

 

로마제국시대에 네로 황제는 이곳에 운하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워낙 난공사여서 황제가 죽은 후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로부터 1800년이 지난 19세기 말 운하를 만드는 공사가 재개되어(높이 70m의 암벽을 25m의 폭으로 잘라 만든 운하) 1893년 완공되어 고린도 운하는 현재 동의 에게 해와 서의 이오니아 해를 하나로 이어준다. 고린도운하를 지나면 곧바로 페로폰네소스 반도이다(운하로 육지가 끊어졌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섬이다). 자동차로 4-5km달리면 오른편 해변으로 작은 항구도시가 있는데 고린도 신도시이다.

 

 현지인들은 신약시대의 역사적인 고린도를 Paleo Corinth즉 ‘구(舊) 고린도’라고 부른다. 운하를 건넌 후 10km쯤 떨어진 지점에 초대교회가 있었던 고린도를 만나게 된다. 바울당시 이곳은 그리스 남부지역의 최대도시였다. 로마제국은 이곳을 아가야(Archaia)지방의 수도로 정했고 총독 관저도 이곳에 있었다. 당시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으나, 정치와 경제의 중심, 교통요지는 고린도 였다. 항구로는 동편으로 겐그레아 항구(에게 해로), 서편으로 레기움 항구(아드리아 해로)가 있다. 이 항구를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 증지로부터 들어온 각종 화물들은 일단 고린도로 모아진 다음 그리스 전역으로 분산되었다. 당연히 고린도는 번성하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고린도를 ‘두 항구의 주인이 되는 부유한 도시’라고 불렀다. 옛 도시의 터가 남아 있는 아크로고린도에 가면 신전을 비롯해 아고라(시장터)와 주거지가 있다. 고린도에서 주신으로 섬기는 비너스(Venus=Aprodithe)신전가 높은 산위에 세워져 있고 아크로폴리스의 중앙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다.

 

아크로폴리스를 다니면서 ‘통 항아리의 철인’ 디오게네스(Diogenes)가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찾소,  인간다운 인간 말이오’라고 새 시대의 인물을 찾았다고 한다. 모든 청년들이 육정과 향락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고린도를 정복 후 그 유명한 철인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누추한 통 항아리 앞에서 마침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철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무슨 요구든지 들어주고 싶은 장군의 심정을 표한 것이다. 이때 철인은 내 원이 있다면 장군의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니 좀 비켜 주시오라고 함으로 장군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후에 철학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고린도는 음담패설과 향락의 도시의 대명사이다. 천명의 처녀들이 축제 한 달간 비너스 신전에서 의식을 행한 후, 나머지 11개월 동안 이 여인들은 창녀생활을 했다고 한다. 건축양식 중 고린도 양식(참고. 도리아식은 문양이 없고 - 파르테온 신전; 이오니아식은 양 뿔처럼 끝이 구부러진 양식)은 가장 화려하다.

 

바울은 여기서 천막제조업을 하는 아굴라와 그 부인 브리스길라(로마에서 옴)를 만난다.

 

주전 146년에 로마군대가 침공하여 고린도는 폐허가 된 것을 100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을 하였다. 고린도는 로마식 도시로 부활, 과거 고린도의 명성을 훨씬 능가하는 로마 제국의 대도시로 다시 급성장했다.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그리스의 남부 아가야(Achaia)지역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 아가야 지역의 최대 도시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많은 저항과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유대인들의 방해가 극심했다. 때로 신변의 위협까지도 느낄 정도였다. 마침 로마 당시 로마총독인 갈리오(Gallio, 로마 명문출신, 아버지는 유명한 웅변가 세네카, 동생은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임)앞에 끌려가기도 했다. 51-52년에 재임했으니 바울은 이 기간에 고린도에 있었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갔던 장소가 재판자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희랍어로 ‘비미’(Bema)라고 부르는 곳이다. ‘비마’란 총독이 연설하거나 재판할 때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돌로 만든 단이었다. 높이 약 5미터, 폭이 15미터 되는 비교적 큰 단이다. 이 단 앞에 바울이 끌려와 서 있고, 단 위에는 갈리오가 총독의 정장을 입고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 포장된 도로에 사람이 이름들이 새겨 있는데 이중 에라스도(Erastus)가 나온다. 그는 고린도의 재무를 담당하던 고관이었는데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특이한 유적은 그리스어로 ‘히브리인들의 회당’이라고 새겨진 돌기둥이다. 고린도에 있었던 유대인 회당의 석조건물 일부가 발굴된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돌에 새겨진 일곱 촛대 조각도 발견하였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활동하는 동안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 고린도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가 그의 가족이 주를 믿고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성도가 되어 고린도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교회 중심으로 복음이 아가야 전역에 퍼져나갔다. 고린도 후서에서는 고린도의 성도뿐만 아니라 아가야 지방에 흩어진 성도들에게도 안부를 전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55년경, 에베소에서), 후서(57년경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29장으로 되어 있고, 교회 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신앙적으로 답변함으로, 신앙윤리를 복음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체계적인 서신이다.

 

고린도의 왕 시지프스는 거만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고집쟁이였다. 제우스를 골탕 먹이려고 계획했다가 탄로가 나서 죽음의 신 타나토스에게 체포되었다. ‘시지프스를 저승으로 끌고 가라. 거기서 다시는 나쁜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게 하라’ 지옥으로 끌려간 시지프스는 발에 쇠고랑을 차고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 하는 고된 벌을 받았다. 가까스로 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게 되면 그 바위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다시 그 바위를 죽을힘을 다해 산 위로 올리지만, 바위는 다시 떨어지고, 그래서 그는 평생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울 반복했어야 했다.

 

2) 아테네 - 바울의 2차 전도여행지, 헬라 철학/문화의 발상지 고대국가 아티카(Attica)의 중심 성이며,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로서 인구는 시내 1백만, 대도시권 3백만, 도합 4백만 명이다.

 

아테네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 때에 아크로폴리스 성채와 그 주위 지역에서 였다. 대부분 역사를 통하여 요새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그 성벽을 아크로폴리스 성채 주변을 돌아가면서 축조했었다. 주전 5세기 초엽에 페르샤가 침공하여 왔기에 급히 성읍을 확장시켰고 그 후 성벽을 피레우스(Piraeus) 항구까지 내려가는 지역으로 넓혔다. 주전 594년 아덴의 입법가인 솔론(Solon)이 법을 제정하므로 아덴 사람들에 대한 학정을 금지하는 자기 방어적 수단을 제공했으며, 주전 6세기 말경 크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민주주의를 창시하게 되므로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발상지라 부르게 된다. 페리클레스(Pericles) 치세 때(주전 429년) 그 영향이 커서 아덴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주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며, 주전 86년 로마 공회정의 장군 술라(Sulla)가 아덴을 포위 공격하였고, 자기 부하 군사들에게 약탈을 명령하므로 완전히 퇴락해 버린다. 이후 1800년대까지 계속 쇠퇴하여 그 무렵의 아덴은 불과 5,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에 불과 했다.

 

사도바울이 아덴을 방문했던 당시는 비록 그 영화로운 번영의 상태가 중단 되어버린 형편에 있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학문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울은 도시의 중요한 공공 건축물들과 많은 신전들이 슐라의 야만적인 폭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채 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행 17:23). 사도바울이 아덴을 방문한 것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이 자기의 전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싫어하여 핍박하는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사역의 결과로서 고린도로 떠나기 전에 몇 사람의 새로운 회심자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행 17:33-34).

 

아덴은 고린도와 에베소와 같은 상업도시가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도시였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 소피스트(Sophist, 詭辯家)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미지는 교언영색(巧言令色), 곡학아세(曲學阿世), 머리 좋은 사람들이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란 뜻으로 뛰어난 재능과 학덕을 갖추어 정신적, 사회적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사람들을 일컬었으나 주전 5세기 후반부터는 보수를 받으며 논변(論辯)과 수사(修辭)등 공인(公人)이 필요로 하는 교양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총칭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415) 40년 동안 아테네에서 활약한 그는 지중해 각지의 도시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인간이 곧 만물의 척도(尺度)”라는 주장을 펼치며 모든 절대적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는 “약한 변론을 강하게 하여” 시시비비가 불분명한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사회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수단과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미덕이라고 주장하였다.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그의 논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극심한 마찰을 빚었으며, 결국 지중해의 난파선처럼 진리와 역사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채수경, ‘한반도의 소피스트들’,  뉴욕조선일보, 1999. 2. 22, 월, 2면)

 

헬레니즘의 발상지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를 논하던 철학의 도시였다.  유리피데스와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원형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문화의 도시요, 피디아스와 같은 대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 활동을 했던 예술의 도시이다. 또한 솔론과 페리클레스의 정치개혁으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치가 꽃핀 곳이요, 유명한 아테네대학이 있어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친 곳이다. 천재시인 Byron(1788-1824)은 아테네를 너무도 사랑하여 ‘아테네의 여인이여! 그대와 헤어지기 전 나의 마음을 돌려다오!’ 바이런(Byron)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자원했고, 그가 사랑하던 아테네를 위하여 36세의 젊음을 바쳤다. 인구 400만이 넘어 그리스 전체 인구의 2/5이 살고 있는 대도시이다. 자동차 매연 때문에 역사적인 건물의 보존에 문제가 생긴다.

 

BC 3,000경 아테나여신과 포세이돈사이에 이 도시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결국 누가 이 도시에 더 유용한 선물을 가져오느냐 ?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올리브기름을 내는 올리브나무를 가져왔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바닷물처럼 짠물을 가져왔다. 승부는 쉽게 아테나에게 돌아가서 도시이름이 아테네로 된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식용, 화장, 연로, 지혜, 생명, 죽지 않음(不死)을 상징한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를 씌워준다. 2004년 하계 올림픽 대회 때에도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올리브 잎으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주후 50년경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했다(행17:16-34). 당시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의 통치 밑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로마 제국을 정복하였다. 고대문명의 중심도시로서 누리는 명성과 웅장한 건물들은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조금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던 바울은 도시에 잡신이 너무 많음을 보았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The unkown god)을 위한 제단까지 세웠다. 바울은 이러한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아테네 대학은 오랜 학문적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신고전 양식의 대학건물 전면 회랑 벽에는 이 도시의 역사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아테네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는 이 벽화는 사도바울이 설교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다.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어 마침내 아테네를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아테네는 지진 권에 속하기 때문에 건물을 7층 이상 짓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래서 해발 158미터에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high city”)는 우뚝하게 돋보인다. 오늘날 아테네는 헬라풍이 없고 현대식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적인 유물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① 파르테논(Parthenon “처녀의 집”) 신전:아테네 신을 모심. 유엔이 지정한 인류문화재 1호; 주전 447-432년 건축. 전쟁 승리의 기념으로 지은 자축의 신전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는 주전 5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였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였다. 그는 아테네에 많은 건물을 지어 그리스 건축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 시대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들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아테네 중심부에 있는 바위언덕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파르테논(Parthenon)이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은 유엔의 유네스코(UNESCO 교육과학문화기구)가 지정한 인류문화재 제 1호이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페리클레시스 때에 지어졌다고 한다. 아테네 여신을 위한 신전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폭이 30.8m, 길이가 69.5m, 높이가 10.4m 되는 46개의 도리아식 석주(문양이 따로 없고 단순함)가 있어, 그리스 건축예술의 백미를 이룬다. 재미있는 사실은 파르테논 신전의 어떤 부분도 기하학적 직선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육안으로 쉽게 구별이 가지 않으나 이 신전의 모든 부분은 예외 없이 완만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물도 잘 빠지도록 바닥이 약간 둥글게 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전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기둥마저 수직으로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비스듬히 세워져 있어 910m 상공에 있는 가상의 한 꼭대기에서 모두가 정확히 만나도록 설계되었다. 이 신전에 모시고 있던 아테네신상(금으로 만듬)은 비잔틴 시대 때에 모두 녹여 성당을 짓는데 이용하여서 아테네 신상을 지구상에 없다.

 

바울은 이 도시에 와서 이미 지은 지 500년이 된 파르테논신전과 아테네 신상을 보았을 것이다. 입구에 곡물창고가 있으며, 민주주의의 회의 발상지인 부채꼴 계단 경기장이 있고, 승리의 여신인 니끼(=나이키 Nike)신전이 있다. 날개가 부러져 있는데 이는 다른 곳으로 날지 못하고 항상 여기 있어서 어떠한 전쟁에도 승리를 가져오게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일천 명의 무녀들이 머무는 봉납창고(트로필리아)도 있다. 그리고 농경의 신인 에렉시온(Erechtheion)신전이 있다.

 

 ② 아레오바고(Areopagus):“Ares의 동산”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해발 113m의 나지막한 바위언덕이다. 제우스의 아들 아레스(Ares)는 전쟁의 신(軍神)이었다. 라틴어의 표기는 마르소이어서 ‘마르소 언덕회’(The Mars Hill Society)의 모임장소로, 유력한 원로와 재판관들이 모여 역사, 철학, 또는 모든 종교문제들을 토론 규명하던 곳이다. 아레오바고란 명칭은 오늘날도 그리스 대법원의 칭호로 사용된다.

 

명칭의 기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기 전해진다. 자신의 역할에 호전적이고 다혈질인 아레스는 사촌형제인 헬리로티오스를 죽였다. 자기 딸을 겁탈한 데 대한 복수였다. 이로 인해 아레스는 다른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서편에 인접한 바위언덕이었다. 아레스는 무죄로 판명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아레스가 재판을 받은 곳은 ‘아레스의 언덕’ 곧 그리스어로 ‘아레오바고’(Areopagus)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유래에서 아레오바고는 원래 살인죄를 범한 사람을 재판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테네 시의회가 모이는 장소로 되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는 바위언덕을 지칭하는 지명과 함께 아테네 시의회를 뜻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에 이곳에 도착하여 명설교를 하였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터(아고라Agora)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 아테네는 당대 최고의 명문대학이 있던 대학도시로서 이곳에는 자칭 철학자들이나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사람으로 바울을 대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마침내 바울에게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바울로서는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서 복을 전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금이나, 은, 돌로 만든 신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말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했다. 사도행전 17:23-31까지 기록된 주요핵심 내용을 분석하면,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   창세기로부터 당시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던 서신서에 이르는 빈틈없는 논리로 온전한 신학을 갖춘 성공적인 설교였다.

 

에피메니데스가 처음으로 신들로 넘치는 아덴을 보고 ‘이곳에는 사람보다 신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군요 ?’라고 묻자, 니키아스는 웃으면서 ‘돌이 채석장에서 운반될 때마다 이 도시에 새로운 신이 하나씩 생긴답니다’고 대답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의분을 느낄 정도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 보았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고라 지역(성경에서는 ‘저자’로 나옴)에서는 철학자들과 모든 아덴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 그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히 듣던 사람들이 소란해졌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였고,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의 불멸은 믿었으나 체의 부활은 부정하였다. 그들에게 육체의 부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롱과 소란이 계속되자 바울은 설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에서도 바울은 소수의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의회 의원이었던 디오누시오와 같은 유력한 인물도 있었다.

 

③ 아고라(Agora):shopping center 아레오바고 회의가 실제로 열린 장소는 바위언덕의 정상부분이 아니라 아테네의 시장터 즉 아고라가 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많은 공공건물과 신전들이 들어서 있다. 아고라 지역은 아테네에서 가장 활발하게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이다. 1930년대 이래 미국 고고학 팀이 정밀하게 이 지역을 연구하였다. 또 아고라의 동편에는 스토아(Stoa)건물을 완전히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았다. 45개 석주가 2층으로 늘어선 115m길이의 아름다운 건물로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상기시켜 준다.

 

가난했던 아테네의 철인들은 이러한 주랑(柱廊)건물 스토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스토아 철학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겨났다.

 

발굴된 아고라 지역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체류하는 동안 매일 복음을 전한 곳이다. 왜소한 체구에 구변도 없던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의 본부가 있다. 오늘날 아테네는 로마와 함께 고색창연한 교회들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낮 시간 동안 교회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기도할 수 있다. 대부분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서도 케사리아니 수도원 안에 있는 교회가 인상적이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 수도원교회는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④ 올림픽 경기장:6,9000석 주전 776년부터 주후 500년 사이에 올림픽 경기가 있었다. 비잔틴 시대 때에 이것은 우상숭배라고 금지시켜 1500년간 중단되었다가 1896년, 알버뜨 꾸베르땡이 제창하여 고대 올림픽 정신을 이어 근대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100주년 되는 1996년에 아테네에서 개최를 열망했지만 미국의 힘으로 아틀란타에서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리스에서 화가 나서 국영항공기에서 코카콜라(아틀란타에 본사 있음)를 사용하지 않고 불매운동을 하기도 했다.

 

2004년도에 아테네에서 올림픽 경기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경기장에 가보면 한 동상이 있는데 좌우편으로 노인 성기는 발기되어 있고, 청년은 축 쳐져 있는데 이것은 운동을 하는 노인은 건강하고, 젊은이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별 볼일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도 세계올림픽 할 때마다 이곳에서 성화점화식을 가진다. 올림피아 동네는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마라톤도 멀리 항구에 있다. 1-3회 올림픽 대회 때에 마라톤의 거리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지만(42km) 4회 대회 (로마)에서 당시 구간이 42.195km가 확정되었다 (버킹검 궁전 경유를 여황이 원했기에)

 

⑤ 소크라테스 감옥:최후 1개월간 머문 후 독배를 마신 장소. 제자 크리토(Crito)의 탈옥 권유를 받고, 악법도 법이다면서 죽음을 택하여 평온하게 죽었다. 너 자신을 알라(델포이 신전, 아테네에서 200km 떨어져 있다.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의 신전으로 신탁을 받던 곳, 병자들을 치유하는  아스클레피온신전도 있다. 산세가 좋아 영험이 있다.) 2500년 전 소크라테스는 당시 집시법(집회시위) 위반의 체포당하고 사형을 받았다. 헬라 청년들을 선동하고 오도한다는 죄목이다. 당시에는 사형이 확정되면 24시간 내 처형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다음날이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날이어서 그 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1달간 기다렸다가 독배를 마신 것이다.

 

<외디푸스 신화> 오이디푸스(Oedipus, Sophocles(495-406 BC), Oedipus at Colonus)는 델포이 신전에 가서 무서운 계시를 받는다. “너의 아버지를 피하라. 너는 네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네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 그러자 그는 사랑하는 부모가 있는 코린토스(고린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운명에 쫓기어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저주 받을 결혼을 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낯선 땅으로 방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갈림길에서 마차 한 대를 만났다. 마차에는 노인 한 사람과 시종인 듯한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갈 길이 몹시 급했던지 오이디푸스에게 큰 소리로 비킬 것을 부탁했다. 노인까지 살해. 그 노인은 퓌티아 신전으로 가고 있던 오이디푸스의 친 아버지 라이오스 왕이었다. 오이디푸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마침내 신의 저주는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알아 맞추었다.<아침에는 발이 넷, 한낮에는 둘, 저녁에는 발이 셋 - 사람> 마침내 생모와 결혼하였으나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장님이 되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었다. 남자 아이는 동성의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성의 어머니에게 애정을 느낀다(Oedipus Complex). 엘렉트라(Electra, Euripedes(480-406 BC)는 자신의 오빠 오레스테스(Orestes)를 시켜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이른바 여자 아이가 동성의 어머니를 미워하고 이성의 아버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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