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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 12: 자기 의義

2009.11.04 17:46

김성찬 조회 수:935 추천:44

영혼기411: 자기 의義
2009.11.4(수)

사탄의 유혹은 비단,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 Hunger, Thirsty, Sexual desire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간교한 유혹은 '자기 의'를 드러내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그 약점에 스며든다.

마가복음 12장에 예수의 대적자인,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의 '자기 의義'를 부추기며 예수를 넘어 뜨리려 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침이니이다 - 마가12:14b -.

예수의 대적자들이 이 뜻밖의 립서비스는 진실을 가장한 유혹이었다.
당신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저들을 예수를 추겨세웠다.
그러나 그 사탕발림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이는 예수로 하여금 '자기 의'에 도취되어 죄를 범하게 하려는 간악한 흉계였다.

우리는 안다.
'자기 의'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큰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우리는 모른다.
'자기 의'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오늘도 자신을 넘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라는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친적이 있다.
물론 이는 약한 자의식을 지닌 인간들에게, 격려와 칭찬이 그 치료제라는 말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의'를 그 누군가가 부추겨 주기를 희원하며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충고보다는 아첨에 귀를 기우린다.

한 때,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라는 아첨이 인구에 회자 된 적이 있었다.
그 아첨에 눈 감기고, 귀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 아첨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오늘도 수요 기도회 후, 고질적인 '자기 의' 과시가 불꽃을 튀게 했다.
부딪힐 돌에 부딪힌 것이다.

자기 항변으로 이어지는 '자기 의'의 과시는, 바로 그 '자기 의'에 영적 종양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프다는 말은, 아픈 구석이 찔림을 받았다는 말이다. 나는 아니다 라고 항변하는 바로 그 자체가 자신이 그런 류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징표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예수의 '자기 의'를 부추긴 후,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마가12:14b- 묻는 유혹의 덫을 놓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부추긴 '자기 의'에 빠져, 올무에 걸려드는 우를 범하지 않으셨다.

잘한다, 잘하다 하면 고래가 춤을 출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고 탈선하곤 한다.

어찌 참 유대인인 당신이 압제자 로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 할 수 있느냐 라고 부추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국기에 대한 경례가 우상 숭배라는 신앙교육을 받았었다. 하여 난 국민학교 학생시절 내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 본 적이 없다. 아마 더 나아갔으면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의무조차도 나는 거부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난 균형잡힌 신앙공동체로 그 이후 진입했다. 물론 내 어린 시절 내가 소속된 신앙공동체가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사이비 종파는 아니었다. 다만 좀 지나쳤을 뿐이다.

저들은 교활한 정치적 질문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만일 압제자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한다고 예수께서 답했다면, 저들은 예수를 매국노라 욕했을 것이고, 만일 압제자에게 세금을 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답하셨다면, 저들은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를 예수가 범했다고 고발하려 들었을 것이다.

'자기 의'의 과시는 자신의 논리의 극대화로 이어진다. 내가 한 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그 날선 논리에는 타협이란 없다. 그러나 인간 세상사는 그렇게, 자기 의 또는 자기 논리만으로 헤쳐나갈 수는 없다. 논리를 뛰어 넘는 합리라는 적절한 무기에 우리에게 있다. 세상에서 제일로 무서운 사람이란, 책을 딷 한권밖에 읽지 않은 사람이란다. 이 말을 교회 내에 적용해 보면, 오직 성경 밖에 모른 사람들이 교회의 공동생활에 불화덩이가 되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래서 한 책의 사람이었던 존 웨슬리도 한 손엔 성경,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라고 말했다지 않던가? 바리새인들은 율법밖에 몰랐고, 헤롯당은 세상  권력밖에 몰랐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마가12:17a 하심으로,
그들의 외곬 논리를 뛰어 넘는 교훈을 선사하셨다.

하여 그들을 대혼란에 빠뜨리셨다.

저희가 예수에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마가 12:17b-

저들, 오직 율법 조문에만 문자적으로 목을 매달고 있던 바리세인이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권력 신봉자들인 헤롯당이, 그 자기 신념, 자기 의만 고집하던 이들이 예수의 신앙을 신앙되게 하는 지혜를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하여 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겼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존재하되 세상 혼잡 가운데 속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빛과 세상에 대한 균형잡힌 태도를 그들은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벌써 아직 아닌'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천국 시민들의 세상살이의 복음적 정의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장로 임직식 때마다 당부했다는 이 권고,

새벽기도회를 한 번도 안 빠진 좋은 장로는 드물다.
하니 장로로 장립받은 장로들은 일부러라도 종종 새벽기도회를 꼭 빠지길 바라오.

한 번도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은 이들의 자기 의는 새벽기도에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 자기 의로 남을 정죄한다. 새벽기도에 있어서 자시보다 약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새벽기도를 가지고 남을 비난하게 된다. 그 대상이 그 누구든지 간에. 그가 설령 그 교회 담임목사일지라도. 그 누구라도 무차별적으로 '새벽기도'라는 무리로 남들을 공략한다. 어찌 새벽기도 뿐이랴? 물질, 봉사 그 어떤 자기 의, 가 문제다. 항상 문제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14:1 -고 말씀은 당부하고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 절묘한 틈 사이에 기독교가 성장해 왔다.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이라는 삼각추 속에 복음 생명이 꽃핀다.


오늘도 기이하게 얽힌 물질 때문에, 서로가 협상이 가능한 모 교회 문제에 대해 당사자의 한 축인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협상의 진전을 이루었다. 내 것도, 네것도 아닌 것이 내이고 네 것인 그 거룩한 물질 때문에 협상이 가능했다.

애매모호함.

진리는 애매모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진리되게 하려면 우린 넉넉해질 필요가 있다.
우린 전혀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그 애매모호함이 그 일에 얽힌 모두를 자유롭게 했으면 한다.

자기 의로 그 누구를 비판하지 말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로마서14:2)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마서14:7-8)
기 때문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11-27 2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