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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하여

2008.07.13 09:37

관리자 조회 수:4502 추천:146


그, 나에 대하여 - 1부


참전 648일


1951년 10월 18일 오후 2시, 짙은 포연과 피비린내 속에서 태어나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까지 648일. 그 장구한(?) 세월을 나도 대한의 남아로 어엿이 민족의 수난에 동참했었습니다. 출렁대는 울 엄마의 뱃속에서, 그 파리한 젖 줄기를 마른 입술로 빨아대면서, 매캐한 포연에 쿨럭 쿨럭 거리면서 나도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 비극적 역사의 현장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어엿이 서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울 아빠의 수난과 숨 가쁜 도피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5년, 대책 없이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견딜 수 없어 한 밤중 방안에 백열등 환히 밝히고, 패물(牌物)로 다리놓아 건넌 동해안 - 그 구사일생, 바람 찬 흥남부두와 주문진 사이. 그 겨울, 공산당은 싫어요!


그 환희도 잠간, 1950년 6월 25일. 벗어나고자 할수록 더 조여드는 족쇄 마냥, 숨 돌릴 새 없이 밀려들어 온 천지를 뒤덮었던 붉은 깃발. 더 이상 피할 곳 없는 땅 끝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그 저주의 죽음은 그 땅에도 내리고. 죽음, 죽음들. 저승의 문턱까지 외삼촌 두 분만을 배웅하고 자신만이 살아남은 당신의 그 처절한 귀갓길의 죄책감속에 나도 떨고 있었습니다. 죽는 것이 대수롭지 않듯, 살아 있음도 결코 신나지 않은 삶. 그 비극의 현장에 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듯.


어떤 안주(安住)


그 분단은 우리 가족이 돌아가고픈 곳을 꽉 차단 한 후 싱겁게 막을 내렸고, 1979년 3월 신학교에 편입하느라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나는, 내내 울 아버지가 절규만 남기고 한줌 먼지 되어 한줄기 바람결에 훌쩍, 그 분이 오매불망 그리던 선영(先塋) 영변의 약산으로 떠나버린 내 나이 8살 때도, 이름이 바뀌던 14살 때도, 서울 가서 시험에 낙방 해 돌아온 17살 때도, 21살 때도, 29살 2월까지도 그때까지, 그때까지 시인 권일송을 술 마시게 한 땅, 바로 그 땅 목포에서 살고 또 살고 있었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별리(別離)


내 나이 8살 되던 해. 영창에 비친 달빛이 매우 영롱했던 어느 겨울 밤. 차가운 교회당 마루에 길게 누운 시신(屍身). 남긴 거라곤 삶은 달걀 2개 뿐. 사심 없이 남겨준 가난. 딸 다섯 만에 갑이냐, 을이냐 학수고대했던 옥동자 남진(南振 - 피난민이셨던 울 아빠가 남쪽에서 그 이름 널리 떨치라고 지어 주셨던 나의 아명)이의 입학통지서가 배달되기 하루 전날. 그렇게 한(恨) 많은 그분, 우리 아버님은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교회 처마 끝 고드름마냥 처마 끝을 달아내어 겨우 만든 심히도 비좁은 공간에 달랑 우리만을 남겨 두고. 언젠가 당신의 술심부름 한번 했다가 그만 엄마에게 들켜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우리 아빠를 위해 뭔가를 해 보여 드렸다는 뿌듯한 마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그 회색 추억만을 안겨 주시고 당신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영구차에 실려 부릉 떠나려던 당신을 울며 엎어지며 쫓아가던 나를 “장남은 데리고 가야지”라고 부추겨 주신 어떤 한 고마운 분의 지혜 덕분으로 용당리 공동묘지까지 따라 갈 수 있었고 비석 하나 세울 수 없는 당신의 외롭고, 초라한 묘소를 결코 잊지 않으려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내 기억 속에 각인해 보려 했지만 무정하고 외로운 당신께선 내 기억 속에 그 묘소 옆 돌쩌귀 하나로만 남으시고 영영히 한 많은 이 세상과 영별하시고 말았습니다. 무덤도, 기일(忌日)도 없는 아버지로 당신은 우리에게 남으셨습니다.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당신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매우 정직한 분이셨다고,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매우 훌륭했다고, 매우 총명 하신 분이셨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전하더이다.


어쩌면 그렇게 꾸부정하게 걷느냐고, 꼭 제 아버지 폼 같다고 말해 주는 당신을 아는 몇 안남은 지인(知人)들의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나의 혈관을 타고 도는 당신의 뜨거운 피를 내안에서감지 해 내곤 합니다. 엄마는 당신 땜에 겪은 고통과 핍박 때문에 우리에게서 죽은 당신의 실낱같은 영향력이라도 제거 하시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야속하고 밉던 무능한 남편이었지만 당신의 시신 앞에 엎드려 울며불며 “난 이제 어떻게 사느냐”고 당신의 존재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실토하신 우리 어머니. 그래도 무능한 당신을 기대던 우리의 의지가 무너지던 그 별리의 새벽.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음모를 당신의 시신 앞에서 꾸미고 있었습니다.


각개전투(各個戰鬪)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슬로건을 내 걸었던 이승만 정권의 시책에 반하여,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기약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습니다. 누나들은 누나들대로, 하나뿐인 네 살배기 남동생은 외할아버지 따라 깔따귀 득실대던 섬마을로 앞으로, 앞으로. 젖먹이로 엄마 떨어진 그 꼬마 동생 녀석 한밤중에 뒤가 마려도 맘 놓고 깨울 엄마가 없어, 일찍이 각성한 독립정신으로 바람 불고 무서운 밤 본채에서 한참 떨어진 귀신이 득실대는 칙간에서 공포에 떨며 엄마 그리워 울며 부르던 노래 ‘십오야 밝은 달 구름 속에 놀고.’ 일 년에 한두 차례 겨우 만난 엄마를 어차피 따라 갈 수 없어 “나 엄마 안 볼래, 안 보는 게 나아,” 그 섬마을 암태도 도창리 동구 밖을 바람처럼 울며 빠져 나가던 엄마의 뒷모습을 끝내 외면하던 너무도 무리하게 조숙(?)해 버렸던 애어른. 그 동생이 학교 갈 나이 된 7살에 이마에 밤알만한 곰발덩어리를 보듬어 안고 꿈에도 그리던 엄마가 사시는 땅 목포에 올라와 내뱉은 일성(一聲) “엄마, 나 이 아이스께끼 뒀다가 내일 먹을래.” 냉장고도 없던 시절 얼마나 우스웠던지, 얼마나 눈물겨웠던지. 그래도 그 동생이 목포에서 제일 좋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무 빽도 없이 반장이 되고 만날 백점만 맞고. 그해 우리 형제는 모두 우등상을 받아 오고, 가난한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뱁이여 그런 칭찬에 으쓱해했고.


세칭 똥비누(검정비누) 이고지고, 섬마을로, 섬마을로 장사 나간 우리 엄마. 오마고한 날이 하루도 더 남았는데, 학교 갔다가 돌아온 내가 뭘 몰라서, 너무 그 누런 조밥이 그렇게도 맛나서 야금야금 다 먹어 버렸을 때, 이제 우린 어떻게 하느냐고 눈물짓던 누나의 모습.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의 예상 밖에도 서둘러 하루 일찍 돌아오신 어머니. “남진아!” “엄마 - 아 , 흑 흑 ” 얼싸 안고 울며 뒹굴던 감격. 그 생명의 젖줄이여. 돌아가신 아버지의 헌 양복으로 초등학교 입학이 마무리 되고, 울 아빠가 사셨다면 모든 희망이 되었을 나는, “애들아, 오늘 받아쓰기 남진이만 백점이고 나머지는 다 빵점이다” 다소 역정 섞인 예쁜 여선생님의 선언에 내 주위로 몰려들던 그 부러워하던 시선들. 소풍 가던 날 먹을 것이 별로 없어 도시락만 싸들고 나서는데 “남진아, 너는 다른 애들이 돈을 대신 많이 받아 가는 줄 알 거야, 힘내!,” 격려해 주시던 어머니. 요즈음 포장마차만도 못한 하꼬방에다 동네 아이들을 고객으로 한 과자부스러기를 팔던 어느 날, 수소 풍선을 한 묶음 사오던 큰누나가 그만 정신을 잃어 그 끄나풀을 놓쳐 버리자, 그 눈물 아랑곳 하지 않은 풍선꽃송이가 둥실 둥실 훨 -훨, 철없는 아이들의 탄성 속으로 사라지던 안타까움에 이를 악물던 우리는 그래도 그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던 새 나라의 어린이였습니다.


어린 날의 감성 - 그 편린(片鱗)들


불쌍히 여기시는 은총으로 교회 마룻바닥을 밀고 닦으면서 그 처마 밑, 은총의 그늘에서 어머니는 예수를 남편 삼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삼아 건강하게 건전하게 성장해 갔습니다. 엄마는 늦게 오시고 사실 혼자 놀 곳이 없어 교회를 반 바퀴쯤 끼고 돌면 나오던, 안락하게 꾸며 있던 목사님 사택에라도 가끔씩 기웃거릴 때면 “ 야! 너, 집에 가서 놀아” 이렇게 문밖으로 내 몬 눈 주위가 시커멓고 항상 냉혹한 스크루지 할아버지(목사님의 아버님)땜에 상심한 마음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되돌아 나와 아무도 없는 불도 안 켠 싸늘한 방에서 홀로 눈물을 적시며 원한을 새기기도 했고, 그 기도대장 목사님의 식탁에 늘 보얗게 쌓인 흰쌀밥과 색깔도 곱던 달걀노른자와 고소한 냄새의 참기름이 늘 아른 거렸지만 그래도 나는 잘 자랐습니다.


땅거미가 길게 드리운 오후가 되면,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심방전도사가 되신 어머니의 귀가를 오거리에 세워진 전봇대에 기댄 채 기다리다가, 그림자 모습만이라도 비슷한 어머니가 나타나면 그쪽을 향해 단숨에 뜀박질을 해 댔지만, 그것은 그 무렵 바로 그 거리를 ‘독재타도’를 외치며 자유를 좇던 고등학교 형들의 무산된 혁명(4.19)처럼, 나의 질주도 신기루를 좇는 어린 대상의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1살 때, 초등학교 4학년. 좀 더 살기가 낳은 교회의 전도부인으로 옮기게 된 어머니를 따라 우리가 갔던 교회는 우리 외할머니의 “이곳은 번지가 좋아 과일이 끊이질 않는구나”라는 말씀처럼 먹을 것에는 별 어려움 없던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 중 제일로 즐거웠던 장소로 기억 됩니다. 교회 안에 마련된 서향집 사택에서 교회 형과 누나들과 항상 즐겁고 신나게 보냈던 일이 지금도 작은 흥분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국기에 대한 경례는 우상숭배라고 배워 한 번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 본적이 없는 자긍심 충만한 신앙인이었고 , 애국가를 부를 때도 ‘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기사 중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어 부르곤 했습니다. 한번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갑자기 온 사위가 어두워진 어느 오후, 교실에서 몇몇 친구들과 시험지를 채점 하다가 느닷없이 “ 남진아! 너 빨리 집으로 가거라. 잠시 후면 이 학교에 큰 재난이 닥친다”라고 말 하는듯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이 되자, 황급히 온다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학교 문을 빠져 나오면서 정말 그렇게 되길 소망 했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자 얼마나 서운 했던지…….


중학생 때, 딱 한번 친구와 싸운 일이 있었는데, 정식으로 결투하다가 그만 뒀는데 힘이 약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내가 싸운다는 게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생님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는데, 내가 싸움을 포기하자 기세가 등등해 비아냥대던 녀석의 모습이 자꾸만 엄숙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시는 하나님의 얼굴과 교차 되었었습니다. 모범생이었는데도 중간고사 기간 중 ‘성 베드로’라는 영화를 버젓이 교복 입고 보러 갔다가 그만 들켜서 근신 처분도 받고, 우등상도 못 받고 말았지만 그래도 종교 영화였기에 꼭 봐야한다는 주변의 권면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단 한편의 영화도 임의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낯선 이름, 낯선 시간 속으로


먹을 것이 풍족했던 그곳에서 나는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때만 해도 중학교 입시를 치르던 시절. 나는 꽤 공부를 잘하는 가난한 아이였습니다. 월사금을 대납해 주시던 우리 총각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를 격려해 주시며, 뭔가 입시에서 학교를 빛내는 성적을 거두어 주길 고대 하셨던 가 봅니다. 수석은 못했지만 나는 선생님을 실망시키진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삶에 획기적인 한 변화가 있었는데, 내 이름자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 아빠 술친구인 어느 어르신께서 지어준 이름이라며 늘 내 이름 남진(南振)이라는 이름에 불만이셨던 우리 어머니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이북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주소를 본적으로 삼고 있었는데, 박정희 씨가 등장하면서 현재 살고 있는 주소를 본적으로 하되 이름도 바꿀 수 있다고 공고를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적이 평안북도 영변군 태평면 상서리에서 전라남도 목포시 남교동 107번지로 바뀌었고, 내 이름도 거룩할 성(聖), 옥빛 찬(璨)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이름이 확정되기 오래 전에도, 우리 어머니께서 어떤 돌팔이 작명가한테 의뢰해서 지은 이름 ‘진오(振五)’라는 이름으로 잠깐 불렸다가 그만 동생이 다치는 사고가 나자, 이것이 하나님의 책망이라 여기신 어머님의 각성의 결과로 영영 허공 속에 묻혀 버리긴 했지만,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 거룩한 오늘의 이름이 확정된 것입니다. 나의 중학생활은 낯선 이름자로, 낯선 교정에서, 낯선 시간 속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웅변대회에도 참가하여 수상도 하고, 키는 작았으나 공부 꽤나 하는 바람에 친구들의 보호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벽(壁) 앞에서


그런데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것입니다. 서울고등학교 시험에 응시 했다가 낙동강 오리알. 나는 일 년을 쉬었습니다. 그해가 1967년, 박 정권이 김대중 의원을 떨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임시국무회의까지 목포에서 열면서 관권, 행정 선거를 기도 했던 그래서 전국적 관심을 모았던 소위 ‘목포 會戰’으로 불리던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던 해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열광 속에 파묻힌 ‘목포’는 실의에 빠진 나에게 어떤 위로로 다가왔던 것 같았습니다. 김 의원을 따라 다니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고, 그의 논리 정연한 웅변은 나를 늘 감동 속에 몰아넣곤 했습니다.


한 예로 박통이 일찌기 자신의 정적이라 여긴 김대중의원을 낙마시키려고 체신부 장관 출신 김병삼이란 후보를 정략적으로 내세웠습니다. 유달국민학교에서 행한 합동연설회에서 먼저 등단한 김병삼씨가 목포발전을 위한 장밋빛 공약을 한참이나 늘어 놓고 하단 했습니다. 어린 나는 그 다음에 올라 올 김대중 후보가 과연 무슨 공약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의구심을 내안에 던졌습니다. 걱정반 기대반 그의 연설에 귀기울이던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애하고 사랑하는 목포시민 여러분! 저렇게 목포발전을 위해 힘을 쓰겠다는 김병삼씨는 목포시장으로 모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해 보겠다는 이 김대중이는 국회로 보내 주십시오." 그분을 따라 다니다 악수라도 나누고 온 날은 날아 갈 것 같은 기분에 들뜨곤 했습니다. 그러다 한번, 그분의 싸인을 받았는데 나는 그 종이를 한동안 책갈피 속에 넣어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해 대통령 선거도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벽보를 구경하다가 내가 박정희 씨 벽보에 발길질을 해대면서 "지 동네만 퍼부어 주는" 운운 해댔는데, 바로 그 순간 사복 경찰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목도 하게 되었고, 나는 그 길로 파출소에 붙잡혀가 취조를 받았던 일이 그 해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벽이었습니다. 벽에 붙은 벽보도 나에게는 차 낼수록 더 단단해져 내 어린 발만 상하게 하던 숙명적인 옹벽이었습니다.


결국 목포에 있는 학교에 장학생으로 간다는 구실이 나를 그곳에 주저 앉혔고, 나는 1년 늦은 후배들과 너무도 다니기 싫은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너희들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나야 나!”라는 의식이 항상 내면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아무도 나를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않은 갈등으로 인해 나는 늘 괴로웠고, 자꾸만 나는 본의 아닌 자기방어기재를 실속 없는 양파 껍질 마냥 켜켜이 쌓아 갔습니다. 벽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 나의 고교시절은 암울 했고, 나는 지금도 동창회 같은 델 가지 않는, 그래서 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신접(神接)하던 날


이 고교시절 그래도 나의 교회생활은 열렬했습니다. 200여명 되는 학생회의 회장으로, 목포시내 교회연합 체육대회 3연패라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도 했고 학생들 앞에서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에 관한 기사를 본문 삼아 ‘동(動)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도 했던 감격이 있습니다.


아동기 때 - 그리스도의 교회, 중학생 전기 - 복음교회, 중학생 후기 - 기독교 장로교회 그리고 고등학교 이후 - 성결교회. 나는 특정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관계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도사로 좋은 평가를 받으신 어머님을 따라 이런 교파순례의 길을 고등학교까지 경험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어머님의 영적 고향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성결교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운동에 은혜를 받았고, 은사중심의 신앙에 뿌리를 내린 이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교시절 우리교회에 부임해 오신 목사님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셨습니다. 대전에 계시다가 갑작스럽게 받은 직통계시에 의해 10여 가정을 데리고 졸지에 남하하신 것입니다. “내년 6월에 한국에 큰 변란이 일어난다”고 하시면서. 교회의 분위기가 요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조성하는 붐과 거의 일치 했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뭐가 더 중요하냐?”라는 물음을 제기 하면서 학교 대신 교회로 향하곤 했고, 입신이나 방언을 못하면 신앙인 축에 끼지 못할 만큼 극단적인 신앙의 독선이 온 교회를 분열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나는 그런 신앙과는 거리를 두었으나, 그런 영적 분위기의 결과로 나도 새벽기도시간 기도 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그 목사님의 영향력은 내게 신접하는 신비를 맛보게 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있던 시절, 예비고사에 합격만 하면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갈 수 있었던 시절. 나는 고향 목포에 있던 교육대학(2년제)에 진학하였습니다. 가기 싫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돈벌이가 제일 속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친척 형님 한 분께서 완강히 거부하던 나를 붙잡고 “ 그래도 네가 빨리 돈 벌어야 어머님 짐도 덜고, 동생 문제도 있고 하니 군대 간 셈 치고 5년만 근무하다 다시 공부를 할 생각하고 진학해라”라는 현실적 대안에 굴복하여 초등학교 선생이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시름시름 속앓이를 하기 시작했고, 급속히 병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지긋지긋한 투병생활을 함께 겪으시면서, 우리 어머니께서는 “ 가기 싫은 학교 댕기느라 저렇게 된 것이여”라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의미 없던 교육대학을 마치고, 6개월 늦은 발령을 받고 지금은 광주광역시가 된 광산군 삼도면 대산리에 있는 삼도남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선생질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발령 받은 다른 2분의 선생님들과 40여분을 터덜거리는 시골 택시를 타고 들어가면서, 나는 이 한 곳에서 교직생활은 꼭 마칠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었습니다.


나의 교직생활은 질병과 현실의 부조리와 나의 학업에 대한 의지와의 피나는 싸움으로 점철된 5년 8개월이었습니다. 물론 제일 소중했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과 가르치는 스승 됨의 숭고함을 항상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 했지만. 역시 나는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솜털 같은 내가 모략과 중상, 불의와 부도덕,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세상에 피투되었음을 생생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도덕적이 되었고, 원칙적이 되었고, 신앙적 독선으로 치장해야 편했고, 불의에는 분연히 일어나 눈치 보지 않고 항거했으며, 비열한 모습들을 준엄하게 꾸짖어야만 했습니다. 가르치는 데는 정직 했고 어린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나 음흉한 미소를 띠면서 “김 선생, 애들한테 잘못해도 좋으니까 나한테 잘 해!”라고 회유하던 교장선생의 유혹은 냉혹하게 거절했던 미운 오리 새끼였습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8세에 아버지 잃고, 여인들의 치마 속에서만 자라난 나에게 성인 남자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결코 용납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이런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이 상황이 전쟁으로 발전 된다면,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시기 6.25동란 때와 같은 전쟁으로. 그러니까 우리 외가 동네, 조그마한 섬마을 암태도 도창리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어났던 - 묵은 원한, 각기 다른 입장, 사상 등 때문에 하루아침에 살육하고 살육 당하던 - 그 참혹한 현실이 바로 지금 나에게도 일어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린 것입니다. 공산 빨갱이들에게 끌려가 졸지에 생명을 잃은 우리 두 분 외삼촌의 절박했던 상황이 나에게 재현될 것만 같은 공포였습니다. 육지속의 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는 그들 사이에는 분명 깃털이 다른 한 마리의 외로운 새였습니다. 판이하게 다른 가치관, 예를 들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떤 선물을 한다는 것은 그 일이 다 끝난 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쯤으로 알았는데, 어떤 일에 앞서 돈을 건네는 뇌물이 관행된 그들의 의식구조를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탕발림을 해대고 뒤에서는 중상모략을 해대는 인간들의 비열함을 견뎌내기가 쉽잖았습니다. 하긴 술 한 잔 안마시고 맨 정신으로 그들 앞에 곧추선 내가 그들에게는 참으로 못마땅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목포교대 선배 되신 분이 일부러 찾아와 송정리 읍내에 날 데리고 나갔는데, 그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나를 데리고 불쑥 쳐들어간 곳이 송정리 윤락가였습니다. 그 분은 그곳의 단골손님인 듯 했고, 겉보기에도 신출내기 같아 뵈는 나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눈빛은 매우도 빛나보였습니다. 어떻게 처신 할 길 없이 당황해 하던 중, 그 선배가 여자아이 하나만 남겨 놓고 자리를 슬그머니 뜨는 것입니다. 큰일 났다 싶어, 그 선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넘어졌습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 보였든지 “이 선생님, 이 도련님 교육 좀 잘 시켜서 다음에 데리고 오세요. 호 호” 깔깔대며 방을 나서던 그 역겨운 분내 풍기던 그 아가씨. 겨우 그 황당함은 모면 했지만 그 후로 나도, 그 선배도 다시 서로가 만날 기회를 거의 찾지 못했던 것으로, 결코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


어떤 결단 -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한


나는 이런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으며, 신앙과 현실적인 삶에 대한 긴장과 갈등을 반드시 해소 해야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전에는 신학교에 가는 일, 목사가 되는 일은 나에게 기피과목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편을 택해야 했는데, 나는 깃털이 같은 새가 있는 곳에서 평생 연가(戀歌)나 부르면서 살기로 결단하게 된 것입니다. “ 가자! 한열아! 우리의 광주로.” 민주열사 광주 진흥고 출신 연대생 이한열군의 장례식에서 그의 어머니가 절정에 수놓은 한마디. 낯선 서울에 와서 맞아 죽은 아들에게 그 어머니는 최후의 안식처로 그의 분신을 안내한 것입니다. 얼마나 내 가슴이 찡 했는지, 얼마나 그 절규가 나에게도 위안이 되고, 고마웠던지. 그래 가라 한열아 차별 없고 질시 없는 우리의 광주로! 우리의 광주로! 나를 아무대서나 잘 적응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나를 피조하지 않으셨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은 한평생을 세상과는 적당히 담 쌓은, 아니 내 가치관과 신앙관에 부합한 공간에서 살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그곳이 신학교였습니다. “가자! 성찬아! 야쿠르트가 있는 곳으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물론 이런 이유로만 내가 신학교엘 가기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나의 육체를 좀먹는 병마와의 싸움 또한 그런 결단을 감행케 한 것입니다. 교육대학 시절부터 시름시름 앓던 나의 병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화 되어 갔습니다. 발령장을 받아 가지고 이 오지로 오던 날 우리 어머님께서는 일부러 동행 하셨다가 나를 외딴곳에 맡기고 돌아 서시면서, 복숭아 한쪽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아들 땜에 돌아가시는 길 내내 눈물이 앞을 가리셨노라 했습니다. 한약을 거푸 10제(200첩)나 달여 먹어야 할 때도 있었고, (나는 당시 나를 이렇게 수발 했던, 자신의 친 동생처럼 돌봐 주었던 그 하숙집 아줌마의 애정과 헌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의사의 묘방에 따라 내가 살던 집 정북 쪽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첫 번째로 발견한 황토를 파다가 물에 걸러 그 뿌연 물을 마시기도 했고, 몸에 좋다는 짐승과 파충류도 불사하는 몬도가네를 연출하곤 했습니다. 30세를 넘기기 어려울 거라는 어떤 진단과 자신의 불길한 예감은 나를 비탄 속에 빠뜨리곤 했습니다. 달빛도 유난히 밝던 어느 가을날 밤 운동장 미끄럼틀 위에 올라 앉아 하늘의 별을 세다가 느닷없이 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살같이 흐르다 사라져간 유성을 보며, 바로 저것이 나의 생명의 불꽃인가 생각했던 시간들.


그 무렵 나는 매일 밤 걸어서 30여분을 가야하는 시골 교회당엘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구렁이도 만나던 가로등 하나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길을 걸어 하루도 빠짐없이 그 아담한 교회당을 찾았습니다. “하루 2시간을 기도하지 않는 자는 C. C. C 맨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고자, 인간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병마와 현실적 갈등을 하나님께 호소 하고자 끊임없는 간구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시간이 계속 되던 어느 날 그 분께서 나에게 주신 한 말씀이 나를 확신케 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와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시103:1-5).” 할렐루야.


그날이 을묘(乙卯)년 10월 30일이었습니다. 나는 말씀 안에 확신을 얻었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일에 내 생명의 불꽃을 태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신학교 편입시험 인터뷰에서 “왜 선생 관두고 신학교엘 왔어요?”라고 묻던 교수에게 “가치 있는 일에 헌신코자 왔습니다”라고 대답 했더니 “교직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까?”라고 되물어서, 그때 내가 대답 했던 대답이 ‘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일이란 말은 어패가 있습니다. 그래, 어린이를 가르친다는 일은 그 어떤 일 보다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그 즐겁게 지내던 시골학교가 그립습니다.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이 불현듯 입니다. 어른들만 없다면. 금년 스승의 날에는 15-6년 만에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이제는 애 두, 셋 딸린 제자들이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고 아이들은 나를 무척도 좋아 했습니다. 바람 새는 소리 푹, 푹 나는 손풍금을 치면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함께 불렀던 싱그러운 봄날의 대합창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주경야독. 나는 이곳저곳, 더 좋은 학교로 전근 가는 교사들의 배웅만 해대며 그곳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나갔습니다. 교직생활 내내.


1979년. 그러던 나는 그 학교에서만 5년 8개월을 보냈고, 내 자신에게 약속 했던 대로 교직을 떠났습니다. 신학생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만 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해야 하는.


그리고 5.17


1980년. 그 참혹 했던 나날들.


5월 하늘이 유난히도 맑고, 대기는 무척이나 신선했던 그해 5월. 나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회오리바람 땜에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숨소리조차 부담스런 오후 5월 17일 모든 소망을 송두리 채 앗아간 공수특전단의 총검술 16개 동작과 입도 채 다물어 지지 않던 공포의 함성. 다 죽여도 돼! 남도 놈의 새키들. 거의 모두가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길 거부하던 까닭 없는 증오의 시절. 귀먹은 하나님…….


“우리 자식들은 절대로 전라도 놈 만들 수 없어!”


술만 취해대면, 남도 땅을 떠나지 못한 자신의 무력을 안타까워하면서 남도사람으로 자라 단지 그 이유만으로 까닭 없이 차별 받을 자식들의 내일을 미리 예견 하고 질러대던 아버지의 절규를 뒤늦게야 이해하게 된 1980년 광주, 서울. 아니 1980년의 대한민국. 내 조국(?). 어느 편이 불의를 행하는지도 구분도 않고, 남도 놈들 죽어도 싸다는 식의 발상과 설교가 횡횡하고, 진리 연 할 때 나는 우리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붙는 분노, 에어내는 비애, 뜬물 같은 치욕, 물새 같은 고독. 그러면서도 한마디 변호조차 할 수 없었던 부끄러움. 부러웠던 행동하는 양심. 살아 있음이 욕되던 나날. 눈먼 양심이여, 눈감으신 하나님이여!


여기까지.

사유(思惟)멈춤.


1992년 6월 19일(Fri.)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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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대하여 관리자 2008.07.13 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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