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진정한 회심(conversion)을 향하여

2008.01.13 22:56

김성찬 조회 수:938 추천:52

진정한 회심(conversion)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 내 흐느낌을 들으소서

Abba Father, hear my cry


신디사이저의 현란한 굉음(轟音).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신들린 듯한(?) 몸짓. 그것은 한 여름 밤의 열광 아니, 광란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열기 속에, 한 소녀가 파묻혀 울고 있었습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빼곡이 들어 찬 깊은 산 속 한 기도원의 칙칙한 성전 안,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소녀가 말입니다. 꾀죄죄한 조막손으로 하염없이 흘러 내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연신 훔쳐내던 한 상기된 소녀가 거기 동그맣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끝간데 없어 뵈던 그 밤의 열기를 잠재우기라도 할 양으로, 억센 한줄기 소나기가 휘몰아쳐 왔습니다. 덩달아 시원한 바람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열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식어 내리는 듯했습니다. 난 그제야 비로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몇 살이니?” 

그 아이는 살포시 눈을 뜨며 가느다랗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꼬마에요. 아직 어려요. ”

“---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우니. 도대체, 뭣이, 누가 니 가슴을 그렇게 미어지게 한다니. 그래 네 어린 가슴속에, 그 무슨 아픈 고백이 있길래 그리도 슬피 우냔 말야”

이건, 촉촉이 눈물 젖어 연한 게속살 같던 아이의 눈을 조용히 응시하던 나, 김목사의 자문자답이었습니다.

 

4박 5일의 열정 소나타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홀연히 임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에 취하여 춤추며 노래하며 그 험한 산비탈을 사뿐히 날아 내렸습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한 식경(食頃)도 채 못된 순간에, 그 감동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그 소녀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그 소녀의 눈물이, 가슴 가득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밤 이후 오늘까지 내내.


그것은 외경(畏敬)

 

남들은 그것을 광신적 열기라고 속단해 버릴 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그런 류(類)의 집회가 어린아이들의 건전한 신앙 성장에 있어, 암(癌)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쉽게 말해 버릴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소녀는 나의 뇌리에서 진즉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충격이었기에, 그 애절한 장면은 내 가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뇌리가 아니라 심비(心碑)에 말입니다. 그것은 전율이었습니다. 수박 껍데기만 핥듯 헛물만 켜던, 나의 알량한 신앙교육관에 대한 본원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 소녀의 눈물이, 어떤 광기의 분출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거룩한 영(靈)에 대한 불경(不敬)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깊은 영성은 그 ‘눈물’이 외경(畏敬)임을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바다에

 

그렇게도 간절히 울고 불며 매달려 통회하고, 베푸신 말할 수 없는 그 은사에 감격해 마지않던 그 어린 소녀의 눈물 앞에서, 나는 우리 교회의 신앙교육의 실체를 발견하게된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라는 말씀이 자꾸만 되살아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정이 잠자고, 눈물이 메말라 버린 세대에 그 소녀의 눈물은 우리가 다시금 회복해야 할 원색적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오랜 가뭄 끝에 소낙비를 몰고 올, 엘리야의 바다에 떠오른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왕상18:44)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가뭄에 시달려 온 것입니다. 오랜 가뭄,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죽여, 천하고,우스운 것 되게 했고, 깊은 죄의식을 무디게 해, 영적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도록 했으며, 지옥이 없듯 천국도 없어, 이 땅에 진화론적 복락원(復樂園)을 이루자고 스스로를 유혹한 우리 자신들의 건조한 신앙고백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심령 속에 파고들어, 우리를 불신과 무기력한 존재로 타락시키는 악령의 존재를, 이미 문제 삼고 있지 않는 근대적 이성에 젖은 신앙교육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가 자랑하는 고등한 종교교육은 영적 회심(conversion)을 구시대의 유물로나 여기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어린 것이 무슨 영적 감동이 있어 그렇게 통회하며 울었겠느냐고, 그것이 비이성적 광신적 분위기로 어린 것을 몰아 넣은 사이비 신앙의, 병리적 현상이 아니었겠느냐고, 반문하며, 질책하실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옆에서 한동안 지켜 본 그 아이는 자신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할”(빌 2:12) 존재인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바르르, 그 작은 영혼을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은 그의 ‘Journal'에서 어린이의 영적 체험에 대해 여러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웨슬레 선생이 생후 2년 반만에 사망한 한 여자 아이의 영적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 아이는 만약 오빠와 언니가 서로 화가 나서 지껄이거나, 경박하게 굴거나 하면,  날카로운 소리로 질책하거나 그들이 그만 두도록 부드럽게 간청했다. 만일 그녀가 아무에게라도 너무 날카롭게 말했다면 그녀는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상대방이 용서하여 줄 때까지 안정하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건강이 나빠진 후, ‘아바 아버지’라는 찬송가가 불려지면 특히 기뻐했고, “아바 아버지, 내 흐느낌을 들으소서”(Abba Father, hear my cry)라는 가사를 그녀 자신이 종종 부르곤 했다.”  그리고 1744년 9월 16일자에도, 웨슬레 선생은 ‘믿음의 온전한 확신 속에 하나님께로 간’ 네살짜리의 임종 직전의 회심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웨슬레 선생의 어린아이의 회심과 영적 체험관에 대해, 당시 어떤 이들은 “어떻게 그 어린 아이들이 그리도 성숙한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 선생은 “당신이, 글쎄, 그들은 대단히 어려서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안(靈眼)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설령 그들이 오십 살이 될지라도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나이가 몇 살 때이든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에도,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삼상3:10), 어린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오는 거한 골리앗(삼상17:45)을 물매를 던져 잡았던 것입니다.

  

박제된 하나님

 

그런데, 왜 이 시대의 어린이들에겐 그런 영적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멀리서 찾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소위 영적인 지도자인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어설픈 자유주의, 어설픈 인본주의, 알량한 교육학적 배경을 갖춘 우리들의 신앙교육관에 그 근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현학적이기만 하지, 체험적이지 못한 그래서  진정한 회심이 없는 허울 좋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이 없고, 내가 감동이 없으니까 저들을 파리한 영혼으로 만들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교육은 겉만 번지르한 종교적 교양인의 양성에 일조하고 있거나, 도덕 군자를 만드는 윤리나 도덕 시간과 엇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종교인은 만들 수 있었어도, 신앙인이 되게 하기는 실패한 것입니다. “살아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히4:12),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명심보감식 강의나 일삼는, 피폐한 강단(講壇)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엔 눈물이 없습니다. 통회도, 확신도, 능력도 없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도 없고, 전능(全能) 하신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저 그 하나님은 박제된 하나님이자, 빛바랜 화석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롬3:12)만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을 향하여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앉은뱅이된 채, 모든 상황이 끝나버린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아바 아버지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기시어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밤나무,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그 소녀는 그루터기였습니다. 그 그루터기에 새순이 돋아 나는 환상(幻想)이 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왔습니다. 그리고 한 거룩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신령한 찬송이 울려 나왔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다시 그 소녀가 보였습니다.  촌스럽게 열광하는 칙칙한 그 예배당 안에, 여전히 동그맣게 앉아 연신 눈물을 훔쳐내던 그 소녀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소녀가 연신 훔쳐내던 액체가 핏빛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핏덩이였습니다. 보혈이였습니다. 그 소녀가 예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이었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찬송의 열기는 더해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설픈 종교 의식에 만족하지 말고, 피묻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 거듭났습니까? 주의 보혈,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입니다. 주저 말고, 그 밤의 열기 속으로 뛰어 들어 가십시요. 나무 등걸이라도 붙잡고 늘어져 그 뿌리가 뽑히도록 힘써 간구하십시요.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은 악한 영들에게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영적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 피는 것을 보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conversion)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6-06 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