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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천


좋은 글에 감사드리고 신약의 복지사상은 차정식의 글도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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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에 나타난 사회복지사상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I. 머리말
외형상 흩어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향해 씌어진 주의 형제 야고보의 서신으로 알려진 야고보서는 신약성서 내의 유일한 지혜문서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문학 양식상 짤막한 교훈적 어록(paraenesis)의 수집물로 구분되는데 지혜문학의 성격상 그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단일한 핵심적 주제를 판별하기가 어렵다. 또한 이 문서가 질서정연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산만한 내용들을 통해 이 문서의 고유한 신학적 특징과 지향을 일목요연하게 규명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서가 야고보서 배후의 신앙공동체가 처한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든, 이 서신의 역사적 진정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 생산 배경과 관련하여 이 서신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향하여 씌어진 ‘언약적 서신’이었으며 ‘회람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Donald J. Verseput, “Genre and Story: The Community Setting of the Epistle of James,” CBQ 62/1(2000), 96-110.
통상적인 모티프로 구성된 전통적인 지혜의 어록들을 그 정황과 별 상관없이 편집 처리한 것이든, (아마 진실은 이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을 터이겠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여느 신약성서의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 또한 마찬가지로 역사의 산물이고 그 역사 속에는 특정 인간 집단의 경험이 응축된 사상적 입자들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상 가운데 사회복지사상에 특히 주목하여 야고보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사회복지사상이란 관점은 야고보서와 관련하여 비교적 생소한 관점이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체계적 이해를 대변한다면 신학은 필경 인간에 대한 복지적 배려를 빠트릴 수 없는 법이다. 야고보서에 반영된 신학적 관심사 또한 저자가 배려한 당시 신앙공동체의 삶이 질 높은 복지의 수준을 기대하는 방향으로 이끌렸을 법하다. 물론 그 복지적 관심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복지와 똑같은 내용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동체가 이 땅의 삶에 종말론적 긴장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삶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망을 지속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땅의 삶은 좀더 질서 있게, 건강하고 태평하게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역사의 파국에 대한 예언과 이에 따른 종말론적 긴장의 상황 속에서도 이 땅에서의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던 전통적 지혜가 부활하고 그것이 신앙적 삶의 긴요한 지침으로 제시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학적 맥락에서 지혜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실천 방식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논문에서 야고보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주제화하여 그것이 어떻게 사회복지사상의 재료가 되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첫째, 나는 한편으로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지혜와 말씀, 율법의 개념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이 문서가 조명하는 혀 곧 언어의 질서와 관련하여, 신자의 지적인 각성이 그 정신복지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검토해볼 것이다. 이는 사물을 합리적으로 분별하는 능력과 스스로 토로하는 신앙 내지 신념을 명민하게 변증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연계되거니와, 이는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정신건강을 증진하는 데도 유효한 기준이라고 판단된다.
둘째, 나는 야고보서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빈부갈등의 문제에 집중하여 부와 가난의 사회복지적 층위를 다뤄보고자 한다. 이는 가난이 단순히 경제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당시 종교의 중요한 구성 요건이었다는 점을 전제할 때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경제양극화를 넘어서 경제복지를 위한 대안적 신학사상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는 야고보서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공동체 치유의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치유와 복지의 상관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당시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의 병자 치유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의 의의는 무엇인지 평가함으로써 우리는 야고보서의 배후에 작동된 건강복지의 원리를 추출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치유활동이 특정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기보다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배려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내장된 의미를 우려낸다면 오늘날 치유사역에 적용할 만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II. 지적인 각성과 정신복지

1. 지혜의 본질

사회복지는 결국 인간복지이다. 복지를 시행하는 주체든, 그것을 수혜받는 대상이든,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지다우려면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에 대한 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복지의 삶을 향유할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지적인 발견과 함께 시작된다. 그 발견은 다시 자신의 향유적 삶을 배려하는 세세한 분별로 이어지고, 그 결과 복지의 필요성과 함께 그 경계와 한계를 동시에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실천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정신 건강에 대한 예방과 치료를 전제로 하거니와, 박종삼 외, 『사회복지학개론』 (서울: 학지사, 2002), 408.
그것에 대한 지적인 각성은 정신 복지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서에서 그 지적 각성과 자아 발견 및 분별의 핵심 원리로 제시되는 것은 지혜와 율법이다. 이 둘은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개념이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와 율법의 상호 연관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Donn F. Morgan, Wisdom in the Old Testament Traditions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그 태생적 전통이 다르듯, 본문에서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게 나타난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이를 다른 곳에서 저자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명명하며 ‘땅 위의 것’, 곧 세상의 지혜와 구별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견유철학과 스토아 철학 등에서 중시했던 지혜 개념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신학적 지혜 개념을 조형하고 있는 듯 보인다. Bo Reicke, The Epistle of James, Peter, and Jude (Doubleday: Garden City, NY, 1964), 14.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약 1:5-6). 그 지혜는 무엇보다 삶의 성숙에 기여하는 분별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생래적으로 복지로 충만한 탄탄대로가 아니며, 원하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고난과 역경이 반드시 뒤따른다. 그 과정에서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약 1:3) 알 때, 그 삶은 파선하지 않고 계속 항진할 수 있다. 삶에는 성숙한 인고가 필요하다는 그 앎을 추동하는 경험적 상식이 바로 지혜의 기본이다. 삶의 시련은 그 결과가 반드시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진일보의 도약을 위한 시험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제공된 성숙의 관문이기 때문이다(약 1:12).
하나님을 시험하는 분으로 설정한 예수의 경우나, 하나님의 그 자녀들이 감당할 만한 시험만을 허용한다는 바울의 입장(고전 )과 달리, 야고보서는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약 1:13). 그럼에도 그 시험은 견뎌내야 할 무엇이다(약 1:12). 그 시험이 고난을 수반할 때 그것은 오래 참으며 인내해야 할 사항이다(약 5:10). 야고보서에서 인내와 기도가 접속하듯이, 고난과 오래 참음도 긴밀히 연동된다. 저자는 그 모범적 사례로 구약성서의 선지자들과 욥을 제시한다(약 5:10).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한 인내하는 욥의 이미지는 욥기의 것이라기보다 ‘욥의 유언서’라는 위경문학의 전승에 의거한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Patrick Gray, “Points and Lines: Thematic Parallelism in the Letter of James and the Testament of Job,” NTS 50/3(2004), 406-424.
그런데, 하나님이 그 시험의 주체가 아니라면 시험은 어디서 오는가. 저자는 시험을 오히려 인간 내부의 ‘욕망’의 문제로 본다. 욕망에 해당되는 희랍어 어휘(epithymia)는 그 의미의 진폭이 매우 크다. 이 단어는 감정적 충동 내지 성적 욕구로 대표되는 ‘정욕’, 통제되지 않는 무절제한 욕심을 가리키는 ‘탐욕’, 중성적인 의미에서 삶을 구동하는 ‘의욕’ 등의 개념을 포괄한다. 이 희랍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Büchsel, “ἐπιθυμία,” TDNT vol 3, 168-171 참조.
야고보서의 해당 본문에서 이 단어는 두 번째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탐욕]에 끌려 미혹”(약 1:14)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탐욕은 삶의 일부이지만, 지혜롭게 절제되지 않은 채 그 유혹에 휘말릴 때 삶은 절단난다. 그 삶이 절단되는 과정을 저자는 삼단계로 압축하여 탐욕->죄->사망으로 번져가는 욕망의 과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험은 곧 유혹에 다름 아니다. 신약성서와 그레코-로마 시대의 맥락에서 시험에 해당되는 희랍어 πειρασμός는 ‘시험’뿐 아니라 ‘유혹’ ‘시련’ 등의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Seesemann, “πειρα κτλ.” TDNT vol. 6, 23-36.
지혜는 그 유혹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써 사람은 자신의 삶이 처한 형편을 잘 분별하고 통찰하여 욕망이 탐욕으로 번지지 않고 삶의 건강한 의욕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한편, 지혜는 단순히 분별지로서의 각성제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탐욕으로 번지려는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하여 구체적인 선한 행위로 결실되어야 한다. 추상적 관념과 논증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약 3:13) 나타내 보일 때 그 지혜와 총명은 내실 있게 정신복지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지혜를 땅위의 것과 위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구별한다(약 3:15). 땅위의 지혜가 내포한 특징은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을 유발하면서 자랑에 빠지기 쉬우며 결국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지혜는 전후 문맥을 고려해볼 때 사변적이고 쟁론적인 말로써 구축하는 일종의 수사학적 지혜이다. 화려한 수사학으로 치장된 장광변이나 설교는 결국 말재주의 수준에 머물면서 자기 자랑에 빠지기 십상이다. 또한 논쟁적 언변이 상대방을 자극하여 피차 이기고 지는 승부 게임으로 변질되고 그 와중에 진리의 본령과 무관한 ‘독한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이는 야고보서에 의하면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야기하는 ‘정욕의 것’ ‘귀신의 것’일 뿐, 진정한 자기 각성과 진리의 실천에 이르게 하는 하늘의 지혜와 다르다. 위로부터 난 하늘의 지혜는 성결과 화평, 관용과 양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상태를 특징으로 한다(약 3:17).
지혜는 결국 분열을 넘어선 화평, 곧 ‘샬롬’의 경지를 지향한다. 샬롬은 전체적인 것, 하나로 통합된 하나님의 질서로 복지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그것은 신학적 우주론과 인간론에서뿐 아니라 인간 개개인과 사회 전체의 통합적 복지 개념으로 통용될 만하다. 특히, 지혜와 관련하여 샬롬의 원리는 인간의 욕망을 조율하는 합리적 척도로서 기능한다. 자기의 탐욕에 미혹된 시험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인내하며 선한 의욕을 부르는 시련의 과정으로 여겨 연단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내면에 화평을 심을 뿐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로 우뚝 서서 진리를 말하며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약 3:18)이야말로 정신복지의 근간을 이루는 셈이다. 이는 위로부터의 지혜가 자폐적 관념의 추구와 개인의 심리적 만족에 함몰하지 않고 이 땅의 분열을 다스리며 복지 세상을 일구려는 하나님의 샬롬 지향적 뜻임을 밝히 드러낸다. 이처럼 야고보서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 통합은 신적인 거룩함의 표상이며, 분열은 극복해야 할 악으로 유형화되어 인식된다. John H. Elliott, “The Epistle of James in Rhetorical and Social Scientific Perspective: Holiness-Wholeness and Patters of Replication,” BTB 23(1993), 71.


2. ‘자유의 율법’

율법은 흔히 억압과 구속의 이미지를 동반하여 부정적 인상을 준다. 신약성서에서 율법은 바리새 계열의 전통적인 해석의 틀을 신랄하게 비판한 예수의 경우나, ‘몽학선생’(paidagogos)으로 빗대어 평가한 바울의 경우 모두에서 부정적인 구시대의 유산처럼 비친다. 그러나 예수나 바울 모두 율법의 정신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듯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율법의 영향은 그 대결적 국면에서든, 윤리적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그 수용적 측면에서든,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변수였다. 근래 유대교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틀을 벗어나 당시 유대교 사회와 그리스도 공동체의 역동적인 변화란 견지에서 율법에 대한 신선한 해석들이 제출되어왔다.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77); Heikki Räisänen, Paul and the Law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James D. G. Dunn, Paul and the Mosaic Law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1996) 참조.
야고보서는 놀랍게도 그 율법에 새로운 해석의 옷을 입힌다. 그리하여 저자는 율법을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을 응축한 핵심은, 바울도 공감하듯(갈 5:14), 이웃 사랑의 계명(레 19:18)이다. 그럼에도 율법이 믿음과 무관하거나 적대적인 부정적 가치로 비쳐지는 것은, 야보고서의 함의에 따르면, 그것을 실천 가치로서 받아들여 온전히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는 가르침에는 율법이 그 순기능을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믿음도, 그 믿음으로 구동되는 삶도 무기력하고 무질서해지리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지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정신복지를 뒷받침하는 삶의 지렛대로서 그 방향을 선도하는 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을 판단하고 심판할지언정 심판받지 않는 고유한 신적인 기원을 갖는다(약 4:11). 율법의 입법자와 그에 따라 심판하는 재판관은 단 한분 하나님으로, 인간들은 오로지 율법의 준행자로서 그 가르침대로 행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약 4:12). 물론 여기서 관심의 초점이 되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율법은 그 교훈으로 정제되지 않은 인간의 성급한 말과 그 인간을 성찰케 하고 그 행실을 판단하는 말씀의 역동적 상호 관계에서 제 기능을 수행한다. 야고보서에서 무엇보다 경계하는 정신적 혼돈의 근원은 성급하고 왜곡된 언어의 질서이다. 정신복지의 보존과 증진 차원에서 충동에 이끌린 성급한 말은 늘 경계해야 할 삶의 허방이다. 그것은 성내는 것과 밀접한 상관이 있으니, 사람들이 성내면서 말을 하거나 말로 성을 내기 때문이다(약 1:19). 그것은 곧 돌이킬 수 없는 말의 실수를 불러오고 그런 실수는 때로 치명적으로 우리 생명을 해롭게 한다. 그러므로 말의 실수 유무는 온전한 인간됨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까지 제시된 것이다(약 3:2). 말을 주업으로 삼는 선생들은 그들이 내뱉는 말로 인해 더 큼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약 3:1), 말이 빌미가 된, 말로 인한 모든 결과는 최후의 심판정에서 각자가 제시해야 할 정신의 지문으로서 증거 자료가 된다.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혀는 그 자체로 “불의의 세계”이며 불로서 “삶의 수레바퀴” 이 흥미로운 희랍어 문구(trochos tēs geneseōs)는 ‘생성의 바퀴’ ‘존재의 바퀴’ ‘운명의 바퀴’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대체로 그 기원을 고대 희랍의 오르페우스 신화에 근거한 영혼의 환생 개념에서 찾는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개념은 ‘생의 모든 범주’를 가리키는 좀더 보편적인 메타포로 사용되는 듯하다. F. 무쓰너/윤선아 역,『야고보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285-286.
를 불사르는 가공할 만한 몸의 지체이다(약 3:6). 여기서 문제는 그 불이 ‘지옥불’에서 발원된다는 사실이다. 정신복지의 견지에서 더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지옥불로써 불의의 세계를 창출하는 그 혀의 말들은 악과 독만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지적대로, 그 제어되지 않은 혀로부터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옴으로 말미암아 말의 문제는 샬롬의 질서에 치명적인 해악이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혀 이미지와 그 신학적 배경에 관해서는 Jung-Sik Cha, “Beyond the World of Evil: The Jacobian Theology of the Tongue in James 3:1-12,” Proceedings of the Congress of Asian Theologians (1998), 73-88 참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향해 저주하는 혀의 악행이 용납될 수 없는 것(약 3:9)도 마찬가지의 창조론적 맥락에서다. 이에 기초하여 한 논자는 “[야고보서의 전체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믿느냐 안 믿느냐를 결정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안진호, “하나님의 형상과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위,”『신약논단』11/1(2004), 205-220 참조.
이는 또한 샘이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하는 자연 현상(약 3:11-12)에 비추어 보더라도 명백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위반이 되는 셈이다. 언어의 왜곡과 분열 현상이 자아의 분열을 반영하고 그것이 곧 정신 분열과 직결되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언어의 윤리적 타락은 제 존재 본연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언어의 윤리학은 언어의 존재론으로 소급시켜 논의할 수 있으려니와, 야고보서가 퇴락하기 쉬운 말의 대척점에 “마음에 심어진 말씀”(약 1:21)을 설정하여 율법의 자유하게 하는 기능을 중시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의 출처는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일 터이다. 그 말씀이 마음에 심어졌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거듭 반복하여 듣거나 읽고 마음에 그 교훈을 새김으로써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억이 그 당사자로 하여금 율법을 단순히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율법을 통해 진리의 교훈을 알고서도 그것의 실천 없이 다만 듣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자신을 속이는 짓이 된다(약 1:22). 거울을 통해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자마자 곧 그 형상을 잃어버리는 망각의 병통(약 1:23-24)은 실천이 부재한 들음의 반복이 빚어내는 오류로서 말씀이 결실치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본문의 맥락에서 그 망각을 극복하는 기억의 거울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본성’과 ‘하나님의 율법’이다. Luke Timothy Johnson, “The Mirror of Remembrance(James 1:22-25),” CBQ 50(1988), 636 참조.
그러나 말씀이 마음에 심어져 기억과 성찰을 통해 행함으로 이어지면 거기에는 반드시 경건의 결실이 있게 된다. 반대로 그 전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말씀과 그를 통해 내세우는 경건은 그야말로 ‘헛것’이 되어버린다. 그 참된 경건의 내용인즉 밖으로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안으로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요약된다(약 1:27). 그 율법의 교훈을 기억하여 그대로 실행할 때 그것을 들은 자들은 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울러, 심판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율법을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으로 자리매김한 까닭이다.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앞서 제시된 “마음에 심어진 말씀”과 동등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온전한’ 율법은 온전하지 않은 율법을 따로 상정한 것이 아니다. 이는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율법, 삶의 목표로서의 이상적 온전함을 나타낸다. 이 문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사람이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James Hardy Rope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St. James (Edinburgh: T & T Clark, 1916, 1973), 177-178 참조.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하여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온전성과 함께 그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 의한 그 말씀의 온전한 이행과 준수이다.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최고의 법’으로 친 신학적 입장에서 율법의 정죄를 받는 대표적 행태는 빈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다(약 2:9). 이는 다른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이 한 가지로 인해 실족할 수 있을 만큼 말씀의 본령에 해당되는 중요한 선결 조건이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약 2:13)할 만큼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인데,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하는 것은 긍휼에 정면으로 위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가 정신복지에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은 공동체 내에 소외된 타자를 만들어 결국 화평의 질서를 깨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차별적 인간 대접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위반함으로써 그 당사자의 인간적 도리와 윤리적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억압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된 존재로서의 자아상은 설사 자신을 경건한 종교인으로 내세울지라도 자기모순과 기만의 족쇄에 차여 정신복지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에 야고보서는 그 부정적인 순환의 회로를 차단하고 근본적으로 새롭게 출발하도록 돕는 신학적 원리로서 지혜와 율법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성찰의 능력이 생기고 언어가 순화되며 화평의 질서를 일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 궁극적 목적이 물론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겠지만(약 1:21), 그 구원의 과정에서 정신복지의 수준이 극대화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귀결일 터이다.

III. 빈부문제와 경제복지

1. 사상으로서의 ‘가난’

야고보서에는 가난의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이 피력되어 있다(약 1:9-11, 2:5-12, 5:1-6). 그것은 가난 자체에 대한 이론적 논의보다는 가난한 자에 대한 애정 어린 배려와 동정으로 나타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그러한 관심이 부자에 대한 적대적 관계 속에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빈자와 부자의 관계가 상하 우열 관계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전복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9-10)는 진술대로, 빈자와 부자는 그 위상의 전복적 해체를 불러오는 종말론적 사건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김명수, 『성서주석: 야고보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80에 의하면, 이는 “공동체 내에서 차별을 폐지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을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함을 훈계한다. 그러나 그 ‘균형’이란 것이 현실 속에서는 항상 상대적이고 모호하다.

그런데, 그 관계의 전복은 자동화된 진로인가?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이 땅의 삶이 가난했다는 사실만으로 높아지고, 부자로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낮아지는 것인가? 또 그것을 굳이 양쪽 다 자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빈부문제와 관련하여 야고보서에서 제출하는 신학적 전망은 이 땅에서 일구어내는 경제복지와는 어떻게 연계되는가? 일견, 빈부문제에 대한 야고보서의 이러한 과격한 이해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는 화가 있으리라는 예수의 지상수훈(눅 6:20, 24)이나 거지 나사로는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만으로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안을 얻고 부자는 사후 재난을 당한다는 누가복음의 비유(눅 16:19-31)를 연상시켜준다.
그러나 이러한 빈부 이해의 배후에는 그보다 더 앞으로 소급되는 사상사적 풍경이 깔려 있다. 그 사상사적 흐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Martin Dibelius, James, revised by Heinrich Greeven & tr. by Michael A. William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39-45; F. 무쓰너, 앞의 책(1987), 158-169 참조.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회가 안정을 구가할 때 가난은 본래 불운한 것, 또는 게으름의 결과로 좋지 않은 것 등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국가적 강성함을 잃고 고난의 역사를 행진할 때 가난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 유리한 특별한 상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아가 멸망당하면서 포로나 유랑민으로 살았던 불운한 시대의 백성들을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비참한 사회적 현실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한 자들로 조명되는 한편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겸비한 자들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의 범주가 동일시되거나(시 86:1f, 132: 15f), 가난한 자의 대적을 하나님의 대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시 109:31).
종교적 사상으로서 가난을 이해하는 이러한 흐름 속에 부자들은 주로 지혜문헌을 통해 질타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부로 인해 죄악에 빠진다고 여겨졌고(잠 15:16f, 시락 20:21, 34:5), 부의 파멸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제출되기도 하였다(잠 23:4.f, 전 5:12ff, 시락 11:18f). 아울러, 가난한 자의 재기와 부자의 퇴락이라는 전복적 희망이 하나님의 권능이 실현되는 징표로 이해되었다(시 113:7f, 삼상 2:7f). 이러한 빈부 이해의 틀은 헬레니즘의 침탈과 맞서 저항하던 마카비 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불의한 부자들과 싸우는 가난한 경건주의자들의 대결 구도로 나타나는데 그 일련의 증거들이 이 시대에 생산된 묵시문학에서 탐지된다(에녹1서 94ff, 솔로몬의 시편 1:4ff, 5:2, 10:6, 15:1). 이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경건한 자들의 이름을 내걸고 가난한 자들의 선봉에 서서 외세와 내부의 부유한 귀족들과 싸웠다.
예수의 시대에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한 자들은 이러한 종교적 사상으로서의 가난-경건의 열정을 물려받은 자들이었다. 예수는 그 제자들과 함께 자발적 가난의 삶을 추구했다. 예수의 자발적 가난과 그에 연계된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난 이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차정식, “초기 예수 공동체와 가난의 유형학,”『신약성서의 사회경제사상』(서울: 한들출판사, 2000), 145-182.
부자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자신을 따르라(막 10:21)는 예수의 제자 소명담은 단순히 제자도의 기준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의 배후에는 부자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동참하는 유일한 길은 그 소유한 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푸는 것밖에 없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이는 또한 동시대 유대교의 경건주의적 전통과 긴박한 종말론적 기대에 부응한 빈부의 이해를 대변하거니와, 야고보서에서도 일관되게 스며 있는 신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이때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나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종말론적 백성의 표지로서 체화된 종교적 삶의 양식이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선택하였기에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외려 영광스런 약속의 조건이기도 하다.
예수의 이러한 자발적 가난의 전통을 계승한 유대인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약성서에서 일단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로 범주화되어 나타난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다음을 참조할 것: 차정식, “‘예루살렘 성도’의 가난, 그 배경과 내력,”『신약성서의 사회경제상』(서울: 한들출판사, 2000) 183-221.
이방인 교회의 대표 선교사로 활동한 사도 바울은 이들을 돕기 위해 이방인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모금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위치에 있던 이방인 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영적인 채무감을 느끼고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하는 일종의 호혜적 코이노니아로 인식했다는 것은 빈부 문제에 대한 예의 신학적 전통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합의에 따라 진행된 이 캠페인은 단순히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호혜적 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협약에 머물지 않고 그 모든 이들이 빈부의 격차를 넘어 하나님의 한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한 교회라는 평등주의적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AD 70년 이후 예수 재림과 종말의 열기가 점차 둔화되면서 물질적 부의 추구에 대한 인식도 비교적 너그러워져간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식민정책에 따라 도시화가 진전되고 교회 공동체 내에도 부자와 빈자의 경제적 격차가 생기면서 공동소유와 각자의 필요에 따른 균등한 공동분배라는 초대교회의 이상은 적잖이 퇴조했을 터이다. 바울이 적절히 표현한 대로, 이방인 교회의 경제신학은 본래 부요한 그리스도가 성도를 위해 가난하게 된 것은 그들로 부요하게 하기 위함(고후 8:9)이라는 적극적 방향으로 전개되어갔다. 이러한 지향 노선은 이방인 교인들이 일상생활을 통해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데에 강한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인 교회와 달리 예수의 자발적 가난의 후예라고 자부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빈부의 격차로 인한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이상의 문제, 곧 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신학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법하다. 그들이 추구해온 고결한 가난의 이상이 부의 축적을 통해 위세를 부리려는 교회 안팎의 일부 부자들을 통해 훼손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때 바울에 의해 주도된 이방인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교도들이 수용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들은 시종일관 가난을 경건의 개념과 등치시켜 신학화함으로써 예수의 생활 스타일을 고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야고보를 위시한 예수의 혈육을 통해 계승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세력은 외적으로 화려한 팽창과 부흥보다는 내부적으로 소박한 삶을 통해 경건한 가난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예수의 리더십을 계승한 야고보의 삶과 역사적 위상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John Painter, Just James: The Brother of Jesus in History and Tradit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9); 제임스 D. 타보르/ 김병화 옮김, 『예수왕조』 (서울: 현대문학사, 2006).
이처럼 전통화된 가난의 신학은 훗날 유대인 그리스도교도의 이름조차 가난한 자들을 통칭하는 ‘에비오나이트’(Ebionites), 예수의 역사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나조리안’(Nazoreans)으로 불리게 하였을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과 그 종파적 분기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Hans-Joachim Schoeps, Jewish Christianity, tr. by Douglas R. A. H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9); G. Strecker, “Ebioniten,” RAC 4, 487-500; Stephen Goranson, “Ebionites,” ABD II, 260-261; _______, “Nazarenes,” ABD IV, 1049-1050.


2. 경제양극화의 현실과 대안

야고보서가 상정하는 지역의 공간적 배경은 농경 활동이 주업으로 이루어지는 곳이지만(약 5:7) 그것은 품삯을 주고받는 고용생산의 체제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밭의 경작에 지주와 일용노동자가 동떨어진 신분과 위계 속에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열악한 현실이었다(약 5:4). 이렇게 축적된 부는 도시화를 뒷받침하는 경제적인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편중된 부는 다수의 삶을 질적으로 배려하는 복지의 증진과는 무관하게 소수 부유층의 향락을 위해 사용되었을 게 뻔하다. 또한 일부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상행위를 시도함으로써 부의 축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동력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도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와중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도시마다 회당을 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했다. 예수와 바울의 선교 행적에서 밝히 드러나듯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심점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회당공동체였다. 야고보서 역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는 신앙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저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한 온갖 폐단들이 이러한 회당공동체 내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야고보서 2:2-3에 나타난 상황은 일종의 사회적 ‘유형’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 단락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당시 철학 논쟁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디아트리베’(diatribē)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주제 또한 물질주의적 탐욕에 물든 당시 직업 철학자들에 대한 견유철인들의 비판 내용과 유사하다. 실제로 루시안(Lucian) 같은 당시의 풍자가는 일부 철인들이 후견인들의 영혼을 개선하는 것보다 그들이 제공하는 물질적 안락함에 더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교 회당에서 후원자들을 기려 아버지, 어머니로 받들어 존숭하는 위계적 태도를 지양하는 반면 호혜적인 관계 가운데 형제, 자매로서의 도리를 강조한다. Pheme, Perkins, First and Second Peter, James, and
Jude (John Knox Press, Louisville, 1995), 107-109.
실제 회당집회의 자리에서 생겼을 법한 일을 제시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유형은 셋으로, 회당의 지도자(또는 관리자) 그룹, 부자, 그리고 가난한 자이다. 부자는 금가락지와 아름다운 옷으로 특징지어지고, 가난한 자는 남루한 옷으로 표상된다. 이들의 옷차림새는 그들의 실질적인 삶의 내용과 무관한 외양을 대변한다. 그런데도 그 장식적 외양을 잣대로 부자를 좋은 상석으로 인도하고 가난한 자를 발등상에 앉힌다면 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부당한 차별이라는 것이다. 이 차별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모두 한 공동체의 성원이기 때문이다. 형제나 자매로서의 그 관계가 물질적 소유의 많고 적음, 외양의 남루함과 화려함으로 인해 파괴된다는 것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약 2:4). 여기서 ‘판단’이란 심판의 의미를 지닌다. ‘악한 생각’이란 악한 동기, 곧 빈자를 물리치고 부자와의 호의적인 관계로써 특혜를 얻으려는 타산적 동기를 암시한다. 가난한 자 앞에서 거만하고 부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이 이해관계에 민감한 인간의 통상적 심리이지만, 그것은 차별대우로 이어지고 외양에 따른 차별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범죄에 해당되고(약 2:9), 형제를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판단하는 것(약 4:11)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경제적 기준에 따른 공동체 내부의 차별적 대우는 빈부의 양극화를 고착된 구조로 승인함과 동시에 결국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폐단을 낳는다. 이러한 경제 양극화의 희생자는 가난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 경건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가난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부요하게 하고 그들을 약속한 나라를 물려받을 상속자들로 세워주었다(약 2:5).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영적인 신분을 무시당하고 단지 경제적 이유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되며 부자들이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부당하다(약 2:6). 그들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받았던 바, 그 이름이 비난당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약 2:7). 그 아름다운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명예로운 이름, 곧 ‘예수’이다. 유대교에 기초한 당시 종교문화사적 관행과 신학적 인식에 따르면 특정한 신성의 이름과 그 이름을 지니고 다니는 이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했다. 본문의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은 그 이름을 지닌 자들이고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로 전제된다. M. Dibelius, 앞의 책(1975) 140-141 참조.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부당한 일이 한 공동체 안팎에서 자행되었다면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복지적 삶이란 보장될 수 없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 그로 인한 차별과 박해,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체제로 승인하고 고착화하는 악한 동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무관한 죄악된 소행이다.
그러면 이러한 열악한 현실 속에서 바람직한 신학적 대안은 무엇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공동체가 건강을 회복하여 빈부격차와 차별 없이 호혜적 복지의 관계로 재정비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야고보서가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지만 단호하고 구체적이다. 무엇보다 앞서 부에 대한 건전한 신학적 인식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풀의 꽃’과 우리의 지상적 삶과 함께 존재하다가 스러지는 한시적 가치이다(약 1:10-11). 이러한 종말론적 인식이 제대로 작동하는 한 재물은 결코 자랑거리가 못된다.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재물을 내세워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약 4:16). 종말론적 인식으로 투철하다면 부자들의 재물은 마땅히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쌓아놓고 독식하는 걸 목적으로 재물을 추구해온 부자들은 앞으로 고생과 통곡을 면치 못할 것이다(약 5:1). 왜냐하면 그들의 그 재물은 아무런 이타적 소용이 되지 못한 채 썩어버릴 터이기 때문이다. 말세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은 그러한 어리석은 축재의 증거로 장차 심판의 때에 부자들의 죄악상을 고발할 증거들로 제시된다(약 5:2-3).
부자의 회개는 그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활수하게 나눌 뿐 아니라 그동안 부당하게 수탈한 임금을 품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사회정의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약 5:4). 그렇게 부당하게 수탈한 재물로 그들은 사치와 방종으로 마음을 살찌게 하는 오류를 범했으므로(약 5:5), 그것을 바로잡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부자의 그 마음은 황폐한 채로 쇠잔해질 것이고 가난한 자의 열악한 삶은 더욱 악화된 채로 방치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지의 삶과 거리가 멀다. 복지는 영혼의 건강에 대한 배려로만 충분치 않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말씀만을 앞세워 빵의 공정한 분배를 외면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향해 의도하는 신정의 치세를 이루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 궁핍한 이들은 그 말씀을 먹을 기본적 신체 에너지조차 고갈되고 말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발적 가난의 삶을 추구한 예수조차 그 자신이 가르친 기도문에서 인간을 위해 구해야 할 첫째 항목으로 “우리에게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마 6:11)를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경제적 부가 한쪽으로 편중된 사회구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에 기여하는 체제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신학적 정당성을 얻는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 개혁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신앙공동체 내부의 쇄신 또한 야고보서에서 절박한 과제로 대두된다. 그것은 신앙적 경건의 개념을 좀더 전향적으로 재정의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건은 흔히 내면적 신앙 수련에 국한하여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고 다소 폐쇄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저자는 여기에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실천적인 믿음을 추가한다(약 1:27). 사회적 약자를 경제적으로 돌보는 일은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는 정의의 구현이란 맥락에서 경건과 별도의 일이 아니라 그 핵심적 구성 요소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시도한 ‘경건’ 개념에 대한 포괄적 연구로 다음을 참조할 것: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자원부 편, 『하나님 나라와 경건』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이러한 지론은 야고보서의 본문에서 거듭 강조되는데, 특히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행하는 예전적 축원을 비판할 때 빛을 발한다. 한 공동체 내에서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예전적 축원은 예나 지금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지만(약 2:17, 26) 아무리 강렬한 믿음이 보태진 축원일지라도 거기에 구체적인 행함이 빠져버리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약 2:26). 그 축원이 진정성을 띠려면 그 헐벗고 굶주린 자의 필요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유익함이 즉석에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약 2:16). 경건의 개념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포함하듯, 그리스도인의 믿음 또한 한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와 이로 인한 양극화의 현실에 긴밀히 대처하여 그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소하는 데까지 미쳐야 생동하는 믿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중앙과 지방간의 지역적 양극화로 고민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치유를 위해서도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성서신학적 통찰로 다음의 논고를 참조할 것: 차정식, “양극의 무기물에서 다원의 유기체로-양극화 문제에 대한 성서신학적 통찰,” 『기독교사상』568 (2006/4), 22-36. 한편, 이러한 양극화 해소를 통한 경제복지의 증진은 사회복지의 모든 실천 분야에 걸쳐 강하게 요청되는데, 특히 공공부조(public aid)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장인협, 『사회복지학』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171-180.


IV. 공동체 치유와 건강복지

1. 치유와 복지의 상호관계

신학적으로 생명이 창조의 선물이라면 그 생명의 건강한 존속과 향유는 그 선물의 중요한 목적에 해당된다. 성서는 그 생명이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을 인간의 죄악에 따른 보응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 질고와 죽음이 불가피한 삶의 귀착점으로 판명되는 한 그 대응방식은 하나님의 그 판결에 대한 신실한 순복과 수용만이 정답이다. 그러나 그 판결이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나기까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확신과 회의 사이에서 적잖이 망설인다. 또한 많은 질병의 경우 죽음으로 직결될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치유의 문제가 발생한다. 치유는 심신의 병든 부분을 바로잡아 건강한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이 치유의 활동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정도와 세세한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학적인 처방과 종교적인 개입이 병행되는 추세로 일관되게 진행되어왔다. 성서에서도 인간 복지에 대한 일관된 신학적 관심의 차원에서 질병 치유 주제는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다. John Wilkinson, The Bible and Healing: A Medical and Theological Commentary (Edinburgh: Handsel; Grand Rapids: Eerdmans, 1998); John Christopher Thomas, The Devil, Disease, and Deliverance: Origins of Illness in New Testament Thought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Howard Clark Kee, Medicine, Miracle and Magic in New Testament Tim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참조.

구약성서에서 질병, 특히 세균에 의해 전염되는 질병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존하기 위해 사전에 예방하고 퇴치해야 할 대상이었다. 제사장은 의사의 역할을 겸하면서 질병의 진단과 판정뿐 아니라 성결하게 하는 제의적 절차를 관할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제의적 기능, 신탁을 묻는 기능, 재판과 교육의 기능, 정치적 기능과 함께 마귀를 쫓는 정결 의식 수행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대 근동에서 축귀와 질병 치료의 전문 제사장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경우는 일반 제사장들이 이 기능을 두루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진,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 제사장의 기능,”『한국기독교신학논총』27(2003), 5-38 참조.
이는 사람의 피부병과 관련하여 규정한 레위기의 조항들에 대표적으로 드러나 있거니와, 타자 전염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그러한 위생 관념은 의복이나 주택에 생기는 곰팡이 색점에 대한 관리 방식으로 확대하여 나타나기도 하였다(레 13-14장). 이러한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은 산후 조리 방식에도 적용되었고(레 12장), 특히 음식 규례에 철저하게 반영되어 먹을 수 있는 정한 짐승과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짐승의 항목을 구분하기까지 하였다(레 11장).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이러한 규정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동체 단위의 생활 반경에서 의식주와 사람의 신체에 연관된 세균 전염병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할 경우 공동체의 전멸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이러한 정과 부정의 원리는 부정한 자를 공동체에서 격리하여 솎아내는 배제의 규율을 성립시켰다.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 방식으로는, 시체에 접촉되어 부정한 의복을 물에 빠는 행위, 산혈이 그치고 정결하게 되기까지 기한을 채우며 기다리는 것, 피부병 환자를 일정기간 동안 격리시켜 가두어두는 것, 곰팡이 핀 의복을 불에 태우거나 물에 빠는 것 등과 같이 소극적인 행위에 머물렀다. 그것의 체계적인 제도화와 제의적 고착화는 결국 정과 부정의 배타적 경계를 확대, 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학적 인식의 지평이 확대됨에 따라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ㆍ부정의 경계는 철폐되었다. 사도행전 10:9-16이 시사하듯, 그것은 선교적 팽창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의 건강복지에 점차 무기력한 방기 내지 고작해야 현상 유지의 수준을 겨냥할 따름이었다. 다시 말해, 환경의 오염과 생명의 질병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 사회의 복지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활성화시켜 신학적으로 계도하고 적극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 치유법을 계발하는 노력이 미미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현상을 추수하며 고착화된 전통을 반복하는 미봉의 대처방식으로는 건강 복지의 차원에서 개인 생명의 존엄한 가치와 공동체의 안녕을 보장하기가 어려웠을 법하다.
신약시대에 예수는 이러한 정ㆍ부정의 차별적 경계에 맞서 카리스마 넘치는 치유자로 활동하였다. 예수의 주된 행적이 치유 활동에 집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예법이 설정한 경계 밖으로 밀려 죄인의 부류로 취급받던 민중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포용의 동선을 개척했다. 레위기의 해당 율법 조항들이 ‘배타’에 치중했다면 예수의 치유신학은 ‘포용’으로 특징지어진다. Santiago Guijarro, “Healing Stories and Medical Anthropology: A Reading of Mark 10:46-52,” BTB 3/1(2000), 102-112. 한편, 예수의 치유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한 방식을 취했고 야고보서의 경우가 공동체 치유의 성격을 띠지만, 양자는 죄의 용서와 질병 치유를 동궤에서 인식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그는 그들과의 접촉 현장에서 무엇보다 치유 사역에 관심을 보였다. 신체적 질병과 장애뿐 아니라 정신적 질병을 그는 축귀 사역을 통해 치유했다. 예수는 질병의 원인이 부분적으로 죄에 있다는 전통적 이해를 용인했다. 이에 따라 그는 치유 명령을 죄의 용서로 대신하기도 했다(막 2:5). 이 경우 치유는 속죄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수의 질병 치유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생명을 깨끗하게 회복시키는 맥락에서 제시한 복음서의 기록은, 그가 부정함을 부정하다고 진단, 규정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소극적인 방식을 넘어 그 부정함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의 원인을 절단함으로써 정과 부정의 전통 제의적 체계를 전복시켰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치유 사건(막 5:1-20)에서 예시되듯, 예수의 치유 활동은 당시 유대 민중의 질고 밑바탕에 그들을 정치ㆍ경제적으로 수탈하고 문화적으로 억압해온 근본 체계로서 로마의 식민정권과 헬레니즘이라는 세계화된 이교 문명이 자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비판한 측면도 엿보인다.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차정식, “예수의 반(反)헬레니즘과 탈식민성,” 『한국기독교신학논총』24(2002), 101-138.

이와 같이 예수의 치유 사역은 단순히 치유 사건을 통한 개인의 건강 회복에만 머물지 않고 한편으로 사회적 재활과 갱생의 길로 나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길을 방해하는 강압적 체계에 대한 사회 비판을 겨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치유 사역은 개인의 기적적 변화를 통한 단순한 흥행성 이벤트가 아니라 부정의 원리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이 건강한 사회 성원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어엿한 지상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건강 복지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는 그의 치유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 차원에서 추구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 땅에 도래하여 생명을 훼손해온 기존의 억압적 체계와 부당한 질서를 뒤집는 새로운 역사의 표징으로서 치유활동을 선보였던 것이다.

2. 공동체 치유의 방식과 의의

예수의 치유 방식은 주로 말씀을 통한 명령이었지만, 그 능력의 배양을 위해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막 9:29). 기도와 기적의 신학적 얽힘은, 적어도 마가복음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가변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즉,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도로써 행사되길 바랄지라도 이는 하나님의 뜻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제한 조건을 갖는다는 것이다(막 11:22-24, 14:36)). 나아가 그 기적을 간구하는 기도의 효용성이 기도하는 자의 인간관계에 용서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어떤 거리끼는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막 11:25). 복음서의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할 때 기도를 그 실천방식으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평상시 기도로써 그 힘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의 치유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예수가 기도의 힘을 강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경각지경에 처한 상황에서 그는 기도를 그 위기 타개의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도가 병자 치유의 직접적 방식으로 등장한 것은 교회가 세워지고 체계가 잡혀가면서부터이다. 선교 초기 단계에서 예수의 치유 방식을 모방, 변용하여 말씀 명령으로,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첨부하여 행한 병 고치는 활동의 예가 탐지되지만(행 3:6), 이후 교회는 그것을 제도화하여 공동체 치유라는 독특한 방식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야고보서의 본문에 나온다. 오늘날 복지로서의 치유는 임상사회복지의 개념으로 정착되어 논의되는데, 이 범주에도 개별치료와 가족치료의 모델이 공존한다. 이소희 외, 『사회복지개론』 (파주: 현학사, 2002), 113-138.
이러한 발전 과정은 치유가 단순히 제의적 정결예법도 아니고 선교적 팽창의 기폭제에 국한되지도 않는, 건강한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춘 복지적 관심사로 부상해나갔음을 의미한다.
야고보서는 병자와 치유를 말하기 전에 고난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질병보다 더 큰 복지의 반대 범주로서 고난은 그 원인과 관련하여 신학적 설명이 분분하다. 본문에서 저자는 그 원인을 설명하기보다 선지자들과 욥의 경우를 빗대어 그 고난을 오래 참으라고 권면한다(약 5:10-11). 원인을 확실하게 해명하기 어렵고 인위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고난은 인내가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 인내의 저변에는 고난이 다하면 새로운 기쁨의 삶이 시작된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신학적 전망이 작동되고 있으며,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이”(약 5:11)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고난의 현실 속에 처한 당사자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빛과 어둠이 일상에 번갈아 존재하듯, 인간의 삶 또한 즐거움과 고난의 반복적 교차가 연속된다. 신자의 삶도 이러한 큰 틀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 천변만화하는 일상적 삶의 대표적 대응방식으로 고난당하는 자에게는 기도를,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찬송을 요청하는 것이다(약 5:13).
고난 가운데 가장 통상적이고 대표적인 고난이 질병으로 인한 고난임을 저자가 직시하고 그것의 대응방식으로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행전에 비친 치유기도의 사례와 달리, 이 본문에서 저자는 공동체 성원들의 합심기도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 본문에 따르면 병든 자가 공동체 내에 발생할 경우,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권리가 주어진다. 여기서 장로가 유대교 전통에 따라 단순히 공동체 내의 연장자를 뜻하는 일반명사인지 교회의 제도에 따라 규정된 특별한 직분을 가리키는지 토론의 여지가 있다. 대체로 교회의 본격적인 제도화 이전 단계에서 장로는 권위 있는 연장자로서 한 가족의 가부장이나 공동체의 수장으로서 존경을 받는 자였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장로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 R. Alastair Campbell, The Elders: Seniority within Earliest Christianity (T & T Clark, 1994); Roland E. Murphy, “Elders as Honored Household Heads and Not Holders of "Office" in Earliest Christianity,” BTB 33/2(2003), 77-82.
그러나 “교회의 장로들”이라는 문구에 비추어 그들은 교회 내의 직책을 가리키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다고 판단된다. 바울서신에서 언급된 은사로서의 병 고치는 능력은 성령의 자율적인 활동으로 규정된 바 있다(고전 12:9, 28, 30). 그러던 것이 교회의 조직화에 따라 야고보서의 단계에서 그 능력이 장로라는 직책에 연계되어 은사의 제도화를 가져왔으리라 추론된다. M. Dibelius, 앞의 책(1975) 252-254 참조.
여기서 특히 장로라는 직책이 등장한 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안수의 권한(딤전 4:14)이 치유에서 활용된 안수기도의 방식과 친숙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여하튼, 특정한 치유의 은사를 지닌 개인이 아니라 ‘장로들’이라는 복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공동체 치유의 기본 내용이었다(약 5:14). 주의 이름은 예수의 이름이 마귀를 제압하는 압도적 우위의 권세를 발휘하여 축귀의 수단으로 활용된 전승을 반영한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유대교 전통에 연계된 민간요법의 접속이라 할 수 있다. 그 기름의 마법적 효력에 의지하기보다 주의 이름을 통한 영적인 권세의 역사를 기대하는 공동체의 합심기도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치유 기도를 병든 자를 구원하는 믿음의 기도로 규정한 것, 치유 결과가 병자의 속죄로 나타난다는 것, 아울러 상호간 죄를 고백하는 것이 병의 치유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약 5:15-16)은, 앞서 설명한 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근원으로 믿음과 용서를 중시하고 치유의 결과를 죄사함으로 이해한 예수의 경우로 소급된다. 이 공동체적 치유의 근간에는 공동체가 그 성원들에 대해 책임지고 전반적으로 돌본다는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치유할 병의 원인에 대한 이해 방식에는 이원론적 상징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Martin C. Albl, “"Are Any among You Sick?" The Health Care System in the Letters of James,” JBL 121/1 (2002), 123-143.

이러한 공동체에 의한 참여적 치유 기도의 의의는 첫째로 공동체 성원들 가운데 서로 죄를 고백하는 활달한 소통의 노력이 치유의 내적인 동력으로 계발되었다는 데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질병을 공동체 성원들 간의 소통 부재로 인한 관계 봉쇄와 단절의 영향으로 보았음직한 증거이다. 그렇게 공동체 성원들 사이에 죄가 고백되고 하나님께 범한 죄, 특정 질병의 원인일지 모르는 그 죄가 사해질 때 그들의 합심기도는 이른바 ‘의인의 간구’로서 역사하는 힘이 커진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치유 기도는 공동체의 복지를 해치는 질병을 몰아낼 수 있다는 적극적인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는 훈계에서 암시하듯, 질병과의 적극적인 싸움만이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는 단순한 상식을 재확인해준다. 이와 관련된 ‘믿음의 기도’는 인간의 질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의탁과 신뢰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요컨대, 야고보서에 의하면 치유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로서의 믿음과 생명의 건강한 복지에 대한 적극적인 신념으로서의 믿음이 만나는 자리인 셈이다. 전자가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로 나타났다면 후자는 인간 경험의 산물인 기름을 바르는 상징 행위를 통해 암시되고 있다. 이는 신앙 치유가 의료적 치유와 배치되지 않고 그 병자의 건강복지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서로 공조하고 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