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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 조의금 사절에 대한 반추(反芻)

2008.08.01 10:32

김성찬 조회 수:791 추천:23

영혼일기 23: 그 조의금 사절에 대한 반추(反芻)

2008.07.31(목)



전(前) 총회장 김용은 목사님의 부음을 들었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부음이었다.
빈소는 군산중동교회다. 먼 길이다. 더군다나 그 서해안 고속도로는 절정에 오른 휴가철 차량행렬에 극심한 몸살을 치루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동행자를 찾았다. 고인의 맏아들이신 김영곤 목사님께서 속해 있는 서울북지방회 회장 강종춘 목사께 전활 넣었다. 그네들은 의무적으로라도 반드시 조문을 나설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금시초문이란다. 영곤 선배는 한 동네 식구들에게도 그 부음을 알리지 않았다. 동네가 다른 나는 나지만, 한 동네 식구들에게조차 연락을 안했단다. 과연 그는 그다. 그러나 이런 애사(哀史)에 연락을 두절한다는 것은, 이후로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라던데, 설마. 그러나 그건 아닐 거다. 그건 그 선배가 그동안 보여준 은둔자적 행보의 연장선일 뿐일 것이다.


그 동네 분들과 함께 조문 길에 올랐다.
그런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 빈소에선 조화도, 조의금도 일절 사절이란다.

신선한 뉴스였다. 그러나 우린 모두 반신반의했다.


 

교계의 큰 별 고 김용은 목사님은 향년 91세의 일기로 천국에 입성하셨다.

그분의 목회 일생은 한국교회 수난과 부흥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분은 개척목회에서 승리하신 분이다. 남다른 물량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은 순교적 영성을 온몸으로 구현하며 한 평생을 살아오신 한국교회사의 산증인이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가문은 순교의 피로 세운 영광스런 가문이다.

 

그러니까 6.25동란 시에 전도사였던 김용은은 어머니와 아들, 동생 내외와 조카들을 잃었다. 도피한 복음 전도자 김용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공산당원들은 그 가족들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다했지만,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 윤임례 집사를 비롯한 그의 아들, 동생 내외, 어린 조카들, 그리고 친구를 무참히 살해했다. 칼로, 총으로, 우물에 수장까지 시키며. 그 공산당원들은 그가 섬기던 두암교회에 1950년 10월 19일을 기점으로 예배 중지령을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 그의 온 가족과 성도들을 몰살(沒殺)할 계획으로 교회와 4채의 마을 가옥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공산당의 모진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교회당을 온몸으로 사수하던 김용은 전도사의 어머니 고 윤임례 집사는 결국  그 집요한 박해자들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머리 뒤쪽에 선명한 칼자국을 하늘영광의 상처로 남긴 채. 고 윤임례 집사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해하려든 공산당원들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야한다" 고 외치다 순교 했다고 전해져 온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도 7번이나 총살당할 뻔했던 위험 속에서 기적같이 살아 난 김용은 전도사는, 왜 하나님 내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항의했으나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토로했다. 그러다 그는 유다서 6절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처소를 떠난 천사를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는 말씀을 듣고 눈물을 펑펑 쏟은 후, 그의 일생의 고비 때마다 앞서 행하신 하늘빛의 인도함을 받아 중동(군산) 지역에 이르렀고, 바로 그 빛이 멈춘 곳에 그는 교회당을 세워 오늘의 기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내가 이 일에 당당한 증인인 것은, 지난 십여 년 전 나는 김용은 목사님의 회고록 출판을 돕느라, 소설가 이승우 씨와 함께 고 김용은 목사님을 직접 인터뷰했었고, 그 때 ‘그 하늘빛’에 대한 그의 생생하고 감격적인 고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빈소에 들렀다.
조문을 끝내고 영곤 선배와 잠시 그 슬픔을 나누었다.
여전히 우리 관심사의 하나는, 그 조의금 사절에 있었다.


“우리 아버님은 돈을 남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고 김용은 목사님은 땅 없고, 집 없고, 통장도 없는 3무 신앙철학을 굳게 지켜내셨다.

그동안 기거하시던 교회가 마련해 준 집도,  나 죽거든 이 집을 고군산 열도 섬 목회자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내 놓아라, 라고 진즉 유언하셨단다.

 

섬 목회자들의 하룻밤 안식처. 낭만이 깃든 이 말속에는 섬 목회자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다. 섬놈(? ; 섬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즐겨 비하해 부른다)들은 인사를 적어도 세 번한단다. 왜냐하면 안녕, 인사하고 집 나섰다가 심해진 풍랑에 다시 발길을 되돌리길 적어도 세 차례 정도 치른 후, 굿바이 한다는 말이다.  그런  섬마을 목회자들에게 다시 돌아 와 하룻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유숙할 터전이란, 실로 절실한 소망이리라. 그런데 고 김용은 목사님께서는 바로 그네들의 사랑방이 되신 것이다. 평생 그 보호자이셨던 것처럼. 하나님 품에 안기시면서 한결같이. 과연 숭고한 어른이시다. 


영곤 선배는 평생 돈 남기신 일 없으신 아버님의 삶을 받들어 조의금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평생 돈 남기신 일 없는 아버지는 매정한 아버지다. 남들에게는 무욕의 성자로 사셨으나, 자식들에게는 무일푼의 유산을 강요하신 잔인한(?) 아버지다. 언젠가 아침 마당에서 자수성가하여 일가를 이룬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이 자식들에게는 국민주택규모의 집 한 채만을 유산으로 주기로 하고, 그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의 그 말을 듣던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바보 같은 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그 고생 끝에 모은 재산을, 애석한 마음이 일었다. 누가 저에게 저런 잔인한 마지막 희생까지 강요했을까? 인생은 새벽빛을 기다리는 과정 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빛이 문제다. 김용은네나, 성완종네나 그 새벽빛이 문제다. 그 새벽빛이 미웠다. 그 예수가 미웠다.


그 마지막까지 아버지는 시리도록 매웠다. 그 아들은 안다. 무일푼의 유산으로 빛 되신 아버지. 그 맏아들 영곤 선배는 담담히 그 강요된 ‘살아 순교’를 묵묵히 제 몫으로 챙겼다. 그 순교일념이라는 가문의 전통을 물질적 유혹이라는 가문의 위기에서 그는 지켜냈다. 물질순교가 제일 큰 순교가 된 오늘. 과연 그네는 명실상부한 순교의 가문이었다.


‘조의금 사절’


아마도 그런 결정은 분명히 영곤 선배의 몫이요, 결단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은, 그 우매한 효심에 더한,
그동안 그 선배가 우리에게 보여준 정적인 소극성과 피안적 영성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현실 도피적 영성이 오늘, 우리네 동적이고 차안적인 현실참여를 무색케 한, 강렬한 역동적인 또 하나의 순교행위임을 증거 해 보였다. 그래, 그 조의금 사절은 세상 물정 모른, 기발한 은자의 출세(出世)였다. 우리의 계산속을 일순무력화 시키는.


난 이렇게 믿어 왔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는 법이라고.

(일정한 경제적 바탕을 갖추는 것이 ‘항산’이고, 일정한 정신적 안정을 기하는 것이 ‘항심’이다.)
다시 말해, 돈도 있어야 그 숭고한 정신도 구현할 수 있다고 난 믿었다.

우리 주님께서도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래서 난 돈 때문에 애걸복걸한 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난 봤다. 날 돌아 봤다.

항산이 항심을 낳는다는 말이 얼마나 세속적이며, 귀족적인 발상인가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눅6:20a).

우리 주님 예수께서 평지 수훈에서는 하신 말씀이다. 평지 수훈이라 함은 땅의 복음이라는 말이다.

이 땅에서도,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난, 그 말씀을 영곤 선배가

그 매정한 아버지와 조의금사절로 그 화해를 완결 지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물 어린 눈동자에서

오늘,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