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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그에 대하여

2008.10.28 23:44

김성찬 조회 수:959 추천:25

영혼일기  109: 그에 대하여

2008.10.29(수)

 


그 흑색선전이 막판 전세를 뒤집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이다. 그가 부임하면 원로목사에게 월 1회 강단을 내어주고, 사례비로 10만원씩을 드리기로  삼자(三者)가 묵계했다는 흑색선전이 그 판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었다는 거다. 별별 잡소리들이 난무했지만 정말 그런 낭설이 분분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아니었을 거다. 아니었길 바란다.


그는 허탈해 했다.

모처럼 연결된 그 접속에서 그는 이렇게 농을 던졌다.

“그까짓 10만원을 드려, 돈 백 만원은 드려야지. 껄껄.”

그는 과연 배포가 큰 사람이다. 


그는 배포가 크고, 화통하다. 이 황당하고, 치욕적인 참극 속에서도 그는 여유를 부린다. 하룻밤 뒤척였을 뿐, 이젠 평정심을 찾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그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었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결코 그의 초연함을 초연함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좋은, 실력 있는, 폭넓은 시야와 비전 함양을 위해 남들 쉬고, 놀 때 피눈물을 흘리는 노력의 노력을 경주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우수한 실력으로 명문고교를  졸업했고,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 당연히 신학의 길에 들어섰었다. 그 후 그는 고려대학교에 편입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 명문 사학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다. 인문대학 수석을 했고, 총장이 주는 금메달도 받았다. 교학처 직원이 그에게 이 성적표로는 세계 어느 대학이라도 갈 수 있고, 미국 명문 학교로 진학하는데 큰 자산이 될 거라고 평해 주었단다. 그만큼 그는 학문의 길에서도 최선을 다한 성실하고,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 후 그는 목회의 길에 접어들었었고,

그가 신학교 시절부터 거친 교회는 우리교단의 큰 교회들이었다. 신길, 증가 등등.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에게 맡긴 양떼들을 전심전력하여 양육했고, 그가 맡은 부서는 배가의 배가를 이루었단다.


그 후 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좋은 목회가가 되려면 시야를 넓히고, 국제적 감각도 익혀야 된다고 생각하여, 그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과감하게 미국으로 건너갔다. 큰돈도 없이 낯선 땅에 공부하러 갔다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영어로 공부하는 풀러신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당당히 그 학교에서 요구하는 토플 550점 이상을 받아 낸 것은 물론이다.


그의 목표는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였다. 하여 그는 미국에서 제일로 큰 성결교회 유니온 성결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바로 그 까다로운 교회에서 그는 사역자가 되었다. 무임 목회자가 천지인 그 땅에서 그가 유니온 교회 이정근 목사님의 눈에 든 것은, 그 서울대 출신 이정근 목사님의 사역자 채용 테스트를 당당히 그가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의 남다른 열심과 꿋꿋한 기백이 한 몫을 했지만, 이정근 목사님께서 제출하라고 한 대학교 성적표가 또 다른 역할을 했다는 거다. 그가 서울신대는 물론 고려대학교 성적표(All A+)를  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성적표로 미 명문대학이 아닌 미국 최고의 명문 교회의 사역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젊은 날에, 공부해야 할 때 남다른 피와 땀을 흘린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 유니온 교회에서 그는 방황하는 1.5세, 30대 그룹을 맡았단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신앙생활을 부실하게 하는 그네들을, 그는 남다른 친화력과 열정과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먹이고, 재워주는 헌신으로 배가의 배가를 이루었단다. 그렇게 학문에 매진하며, 목회에 최선 다한 4년여를 보낸 후, 그는 귀국을 결심했단다. 반드시 좋은 자질을 함양해서 꼭 내 조국에 돌아 와 목회하겠다고, 그가 태평양을 건너면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니온 교회를 사임했단다. 이정근 목사님께서 “정 목사 한국 돌아가면 후회할 거야. 내가 이 땅에서 목회할 수 있도록 최선 다해 도울테니까, 내 곁에 당분간 있어 줘.” 이런 이 목사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국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유니온 교회를 자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부흥하는, 세계적으로 성도 양육에 전범이 된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자비량으로 8개월간의 인턴 목회자로 그 교회의 알찬 목회를 배웠다고 한다. 여기에 그의 숭고함이 있다.


그리고 그는 무작정 귀국한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역지가 절 간 같은 미자립 교회였다. 장암예향교회. 그 교회를 산속으로 옮겨 놓고 떠난 선임이자 동생인 목회자의 뒷감당을 해 내면서 그는 그 광야와 같은 사역지를 꿋꿋이 지켜냈다. 그가 하나님께 왜 하소연하지 않았겠는가?


“주님 나를 그동안 각별히 훈련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훈련시킨 그 모든 것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는 사역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날까지 저는 이곳에서도 준비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실 기회를 감사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이곳이 싫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한번 원 없이 목회사역에 전념할 수 있는 목양지를 저에게도 한번 허락해 주십시오.”


그는 그 외딴, 소외된 땅을 갈무리했다. 부지런히 샘도 파고, 중고 목재 가게에 가서 등짐 져 나른 목재들로 마당에 정자도 마련하고, 잔디도 심고, 앞 뒤 텃밭에 상추도, 배추도, 호박도 심으면서, 동료 선후배 목사들을 불러 없는 살림에, 코스트코산 삼겹살도 땀을 뻘뻘 흘리며 구워 대접하면서, 그는 그 땅을 뱃속 출출한 사람들이 아무 때나 들릴 수 있는 맘 편한 안식처를 만들어 냈다. 말씀과 독서로 보내는 시간 틈틈히 월동준비와 체력 강화를 위해 아름드리 밤나무를 힘껏 찍어내어, 담벼락 가득 장작을 쌓아 놓는 겨울채비를 아끼지 않았다. 서부 개척사의 한 주인공처럼.


그리고 그는 그 사무실에 인터넷도 설치하지 않고, 지난 5년 동안 단 하루도 교회를 비우지 않고, 기도와 독서에 독서로 자신을 관리해 왔다. 그는 주일 낮, 오후, 수요일 예배의 설교를 늘 원고화 했고,  그 원고가 한 박스 이상이나 모아져 있다. 사모님과 두 사람만의 새벽기도도, 철야기도도 그는 거른 법이 없었다. 그가 학창시절 최선 다했던 것처럼, 그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영적 자기 관리보다 우선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작가 이문열이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습작 박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개 한편의 소설을 잘 다듬어 등단하는 작가들이 숱하게 많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왜냐하면 문예지에서 작가라고 원고를 청탁해도 넘겨 줄 원고가 없기 때문이란다. 달랑 한편으로 출세했기 때문이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난 속으로 생각해 왔었다. 정승일 목사의 설교 박스를 보면서, 저분은 다른 교회로 부임해가서 날마다 심방만해대도 적어도 5년 이상은 설교하는데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부러워했었다. 그는 새들백교회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과 교재들을 번역해 놓고,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해 놓았었다. 그리고 부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 전, 뜻밖에 같은 감찰회 월광교회 강석창 목사님께서 은밀히 불러 우리교회 후임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셨단다. 그래서 그는 그 일 년 전부터 월광교회로 부임하게 되면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를 기도하며, 탐구하며 일 년을 보냈단다.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귀한 선배님. 치리목사이신 안상원목사님의 지연도, 학연도, 혈연도 따지지 않는 공평무사한 치리에 그는 매우 감사해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그 드물게 볼 수있는 준비된 귀한 목자가,

엊그제 그 사무총회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유탄에 피살된 참극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샌드백(Sand Bag)이 되어 버렸다.

그 누군가의 화풀이의, 전혀 근거 없는, 모함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는 기도했을 것이다.

주님, 이것도 더 좋은 목자로 거듭나게 하시는 훈련입니까?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동네방네 방을 붙였다.

“미목연 데리고 놀러 갑니다 - 미목연 회장 정승일”


바보. 

넌 간도 쓸개도 없냐?

난 그 글을 지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기차는 달리고 있다.

개인적 아픔은 아픔이고, 공동체를 위한 의무는 의무라는 듯,

그 무엇도 괘념치 않는 행보로,

그는,

우렁찬 함성을 발하며,

그 이미 허락하신 그 큰 비전을 위해 내일로, 내일로. 

줄달음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