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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그를 위하여

2008.10.29 23:38

김성찬 조회 수:695 추천:21

영혼일기 110: 그를 위하여

2008.10.29(수)



다시 묵은 먼지를 털어낸다. 옛적에 읽었던 막스 디몬트(Max I. Dimont)의 『유태의 역사(JEWS, GOD & HISTORY)』다.


“독일인은 아직도 야만 민족에 가까웠던 때문인지, 유태인에 대한 박해도 가장 야만적이었다. 보통 중세의 반 유태적인 조치로 생각한 대부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것으로, 독일의 토양에서만 생길 수 있었다. …… 그런 집단의 하나는 단원들이 팔에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아름레더(완장)라고 불렀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태도는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내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신병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병적 상태는 언제 표출되는가?

인간이 아름레더(완장)를 차는 순간이다. 특히 제 분수에 넘치는 완장을 찰 경우, 사람들은 그 정신병적 상태가 더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교회에도 완장들이 활보하기 시작했다. 양같이 순하던 신자가 직분이라는 완장만 차면, 완력이라는 감각도 모른 채, 완력을 구사하는 비극을 연출하곤 했다. 그래 완장이 완력이다. 교회 안의 직분(완장)이 그 본디 신앙심마저 깔아 뭉개버리고, 그 완장 본연의 정신병적 상태에만 충실하게 한다. 이 땅의 가치 전도된 교권(敎權)에 순치(馴致)된 완장 찬 평신도 리더들. 그들도 이런 집단 정신병적 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일개 교회 안에서부터, 지방회, 총회를 집단적으로 누비며, 완장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다. 반칙, 변칙, 음모, 협잡, 살육, 살해. 그들은 이런 류(類)들이 비극이라는 감각도 없는 채, 그 비극 속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완장은 힘의 공백기에 더한 정신병적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 이번 10.26사태가 바로 그 단적인 증거다. 그들은 온갖 유언비어, 허위사실을 부추기며, 스스로 완장 찬 이들의 그 정신병적 상태를 극명하게 표출시켰다.


사실 이렇게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일기가 좀 무리하고, 살벌해 졌다. 나도 내 완장이 조여 오는 악한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보다. 오늘 하루 내내, 교단 연합적인 일을 도모하는 현장에서 얼굴을 맞댄, 그 어느 발칙한 완장 찬 평신도 때문에 나도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져 있다. 정말 우리는 모두모두, 하루하루 그 정신병적 위기의 강을 건너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새벽부터 임원회가 있었고, 그 대화중에 서울중앙지방회 안에서 벌어졌던 10.26 존속살해 사건에 대한 대응책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폭격을 당한 쪽에서 강공책을 구사하려는 모양이다.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그 혐의자들을 세상 법정에 형사고발을 할 태세란다. 한 평생 목양일념으로 살아 온 원로의 명예를 짓밟고, 젊을 피를 갈아 마신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거다.


설마. 난 그렇게까지 확전시키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설마가 사람을 잡지 않았던가?

알 수 없다. 아니 한번 본때를 보여 줄 필요도 있다. 오늘도 서울북지방회 10.26사태에 대해 몇, 몇 사람들이 전활 걸어 왔다. 그런데 그네들의 이야기. 그 생사람을 잡은 근거와 이유가 전혀 사실무근한 내용들이었다. 그런 허위 사실에 근거한 유언비어 정도는, 그 유언비어의 진위를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는 당회원들이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해명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그네들이 수수방관했을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아무리 법정으로 그들을 끌고 가서 그 음모를 단죄를 한다 해도, 그네들은 그 짓밟힌 명예를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 루우엘 하우(Reuel L. Howe)의 지적대로, “인간이 파괴한 생을 인간이(인간의 제도)가 회복시킬 수 없다. …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상하게 하는 역량이, 우리가 타인을 치유하는 역량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우린 망각해선 안 된다.


막스 디몬트(Max I. Dimont)는 묻는다. “유태인들은 어떻게 그 모진 박해와 살육 속에서도 살아남았는가?” 그리고 어느 역사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민족이 살아남는 비밀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다.”


그렇다.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능력 여하에 내일의 성패가 달려있다. 난 우리네 사랑하는 젊은 정 목사가 그 상처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는 그럴 것이다.  난, 그가 그런 역량을 지닌 사람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그의 독서일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생존하게 된 비결은 토라를 확장하여 윤리적인 신학 체계를 마련했으며, 공동체의 법률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비록 왕국이 멸망했음에도 토라를 마음과 영의 요새로 변모시켜 그 안에서 안전하고 보다 만족스럽게 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의 보호를 받지 못한 그들은 토라 안에서 외적인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I : 성경속의 유대인들』).


그리고 정 목사는 말했다.

“유대인이 토라를 보호해 왔던 것이 아니라, 토라가 그 유대인들을 보호해 왔었다는 사실을 그 책에서 발견했어요.”


그래 그 말씀이 오늘의 그를 보호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완장 찬 이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분은 복수혈전을 벌리지 않으셨다. 그분의 대응방식은 범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분은 바로 그 원수들이 못 박은 십자가상에서 그 용서와 사랑을 완성하셨다. 그 오신 본디 목적을 이루셨다. 그래 사명자의 사명은 그 박해, 핍박, 살해의 현장에서 그 빛을 발하는가 보다.


루우엘 하우(Reuel L. Howe)는 “사랑스럽지 못한 이를 그의 가장 사랑스럽지 못한 순간에도, 사랑하는 능력을 지닌 그 사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십자가 위 뿐이다.”라고 갈파했다.


속죄(atonement)는 하나 되려는(at-one-ment) 갈망이다. 분리는 죄악이다. 그 분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속죄다. 그 분열이 있는 신앙공동체에 속죄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한다. 그래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기를 소망한다.


“인격적 상처(person-hurts)를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길은 인격적 치유(person-healing)뿐이다.”(루우엘 하우(Reuel L. Howe))

 

그를 위하여,

그래 말씀의 보호만이 아니라, 그를 오해하여 가해한 이들의 자발적인, 그에 대한 인격적인 치유가 필히 요청된다. 그리고 반드시 그를 위한 새 길을 열어 주는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은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동시에 누려야할, 하나님의 복(福)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