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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신학 거듭남

2012.10.11 21:34

구재천 조회 수:893 추천:25

거듭남 이란 표현에 육적 영적 보다 위로부터(from above) 남이 적합한표현이 아닌가 쉽네요. 성서신학적으로 중새의 책으로 배재욱교수의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아래 참조.

배재욱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8.04.20
책소개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배재욱의 『초기 유대교와 신약성경의 중생』. 저자가 독일 튀빙엔 대학교 신학부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요한복음의 중생>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중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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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유대교와 신약성경의 중생


배재욱 대한기독교서회 2008. 304p.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배재욱의 『초기 유대교와 신약성경의 중생』. 저자가 독일 튀빙엔 대학교 신학부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요한복음의 중생>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중생의 초기 유대교적인 배경을 다룬 다음에,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을 주석하여 그속에 나타난 중생사상을 전승사적으로 살펴본다. 아울러 부록에서는 신약성경 '디도서' 3장 4절부터 7절까지 나타난 중생사상을 다루고 있다.제1장 서론:과제와 질문
제2장 신약성경의 중생 사상에 대한 연구사
제3장 중생 사상의 구약성경적인 배경
제4장 초기 팔레스틴 유대교에서의 중생 사상
제5장 쿰란-에세네 공동체의 중생 사상
제6장 헬레니즘 유대교에서의 중생:요셉과 아스낫
제7장 전승사적인 연구와 신약성경의 중생 사상
제8장 디도서 3:4-7에서의 중생과 그의 전 역사
제9장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제10장 생수의 강과 중생
제11장 결과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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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구원의 이미지에서 중생부분을 참조바랍니다. 

 

  • books.google.com
    Brenda B. Colijn - ‎2010 - 335 페이지
    "The New Testament does not develop a systematic doctrine of salvation," writes Brenda Colijn.

  • http://books.google.co.kr/books?id=XWj__iL0czgC&pg=PA118&lpg=PA118&dq=regeneration+in+the+new+testament&source=bl&ots=erI6KTha-K&sig=ZKzcwIfJnevYP2cYoMoBs0ZnHlE&hl=ko&redir_esc=y#v=onepage&q=regeneration%20in%20the%20new%20testament&f=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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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문헌의 중생. 이 논문 참조해주세요.

    김희성(서울신대 신약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신학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교단신학은 이미 우리 교단이 천명한 사중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앞으로 우리 교단신학은 사중복음에서 추출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웨슬리 회심기념강좌에서 발표될 사중복음에 관한 연구논문들도 교단신학 정립의 밑거름들이 될 것이다. 이처럼 교단신학 정립을 위해 중요한 사중복음은 중생으로부터 시작한다. “중생”이 없으면 그 다음의 “성결”, “신유”, “재림”의 세 항목은 그 빛을 바래게 될 것이다. 사중복음이 힘을 갖고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중생”이 있음으로써 이다. 이처럼 교단신학이 함축된 사중복음에서 중요하지 않은 항목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중생은 참으로 중요한 항목에 해당한다. 2001년도 웨슬리 회심기념강좌에서 첫 번째로 중생을 다루게 되어서 기쁘고, 또 감사하게 생각한다. 본인은 중생에 관한 연구를 모든 신학과 신앙적인 삶의 규범인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 그 중에서도 중생을 시사하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요한문헌(요한복음과 요한일서)으로 한정하고, 본문을 공시적(synchronic)으로만 살펴보려고 한다. 이 논문이 교단신학 정립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2. 몸 말
    중생이란 개념은 신약에서는 비교적 후기문서에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통하여 등장한다: 딛 3:5의 “중생”(παλιγγενεσία), 벧전 1:3.23의 “거듭나다(ἀναγεννάω), 요 1:13; 3:3.5.7.8; 요일 2:29; 3:9; 4:7; 5:1.4.18의 “나다”(γεννάω). 우리가 살펴볼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는 “나다”(γεννάω)만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처럼 사용된다: 요 3:3에서 “위에서 나다”(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요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γεννηθῇ ἐξ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요 3:8에서 “성령으로 난 사람”(ὁ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ξ πνεύματος), 요 1:3; 요일 2:29; 3:9; 4:7; 5:1.4.18에서 “하나님에게서 나다”(ἐκ θεού ἐγεννήθησαν)로. 이러한 용법을 통해서 나타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중생을 차례로 추적해보자.
    1) 요한복음의 중생
    사람들은 중생의 개념을 우선 요한복음의 γεννηθήναι ἄνωθεν(요 3:3.7)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 어구의 올바른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에서 이 어구가 어떤 어구와 병행이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어구는 γεννηθήναι ἐκ θεού(요 1:13), γεννηθήναι ἐκ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요 3:5), γεννηθήναι ἐκ τού πνεύματος(요 3:6.8)와 병행하며 서로 동의어적이다. 먼저 요 1:12-13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신자는 그의 자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 이러한 선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 됨의 근거가 따라온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ἐκ θεού ἐγεννήθησαν)이다.
    다음으로 두 어구 γεννηθήναι ἐκ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와 γεννηθήναι ἐκ τού πνεύματος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구에 의하면 사람은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성령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 가능성이다. 성령으로 난 것(τὸ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ού πνεύματος)은 육으로 난 것(τὸ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ής σαρκὸς)과 엄격하게 이원론적으로 맞서있기 때문에(참조. 요 3:6), “육의 영역에서 영의 영역으로 향하는 모든 질문과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헛되게 된다”. 영의 영역 안에 있는 생명에로의 통로는 성령에 의한 ‘태어남’을 통해서만 열린다. 그러므로 육으로 난 사람, 자연인은 영의 영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령으로 난 사람만 생명의 영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나는 것, 그것은 기적인데, 성령을 통해서 발생하는 믿음(참조. 요 21장)의 기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새 생명을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γεννηθήναι ἄνωθεν”, “하나님께로서 출생”(γεννηθήναι ἐκ τού θεού)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γεννηθήναι ἄνωθεν에서 ἄνωθεν(= ἄνω + 출발점을 표시하는 부사어미 θεν)은 “위로부터”, “새롭게”, “처음부터”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그리이스 교부들과 많은 현대 학자들은 첫 번째 의미를 선호한다. 그 반면에 저스틴을 중심으로 한 많은 교부들과 번역본들은 두 번째 의미를 선호한다. ἄνωθεν의 의미를 바르게 택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이 단어는 세례요한의 증거에 속한 요한복음 3장 3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출처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거기서 이 단어는 분명히 ‘하늘로부터’라는 어귀와 다음처럼 병행적으로 사용된다:
    ὁ  ἄνωθεν ἐρχόμενος  ἐπάνω πάντων ἐστίν (요 3:31a)
    ὁ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ἐρχόμενος [ἐπάνω πάντων ἐστίν] (요 3:31c)
    그러므로 ἄνωθεν은 ‘다시’ 혹은 ‘새롭게’라는 뜻보다는 ‘하늘로부터’를 지시하는 ‘위로부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출발점을 표시하는 부사어미 θεν을 뺀 ἄνω도 예수님의 유대인과의 논쟁담화에서 예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가를 언급할 때 한번 사용된다(요 8:23). 거기서 ἄνω는 유대인의 출처인 κάτω와 대비되며 분명히 “위”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아래에서 났고(참조. ὑμείς ἐκ τών κάτω ἐστέ)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하지만, 예수님은 위에서 나서(참조. ἐγὼ ἐκ τών ἄνω εἰμί)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가를 표현할 때 ἐκ ών ἄνω와 ἄνωθεν을 동의어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ἄνωθεν의 이러한 의미를 신자들의 근원을 말하는 요한복음 3장 3절의 ἄνωθεν에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자의 영적 근원은 그 모형을 그리스도의 근원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다”로 번역된 γεννηθήναι ἄνωθεν은 “위로부터 나다”의 의미이다. “그것은 제2의 출생을 의미한다(첫 번째 출생과는 다른 종류이기는 하지만)”. 이 결론은 이 말씀과 연결되어 나오는 육의 출생과 영의 출생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원론적인 사상을 통해서 확실시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이원론에는 “다시”나 “새롭게”가 아니라 “위로부터”만 대응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김희성, 『신약의 성령론』 제 11장 요한복음의 성령론에서 요약해보자.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스스로 인식의 원리가 된다. 그는 중생한 사람에 의해 인식되는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근원이다. 그는 스스로 인식한다. 동시에 신자의 고유한 주체로 증명됨으로써 신자들을 직접 이러한 인식의 순환고리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순환은 개개의 영 경험에 특징적이고 영을 받은 자에게 대단한 확신을 준다.” 그럼으로써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내적 현존을 인식하는 동시에 죽은 자를 살리는 ‘아직은 아닌’ 종말의 사건이 ‘이미’ 현재가 됨을 경험한다. 그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 안에 있는 참 하나님을 알며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알고 선포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요한복음의 중생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생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육적이며 인간적인 존재가 성령(에 의해 일어나는 믿음)의 기적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속한 영적이며 신적인 존재로 변하는 것이며, 거짓, 어둠, 종, 죽음의 영역에서 진리, 빛, 자유, 생명의 영역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의 내적 현존을 인식하는 동시에 죽은 자를 살리는 종말의 사건을 현재에서 큰 확신으로 경험한다. 그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예수 안에 있는 참 하나님을 알며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알고 선포할 수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렇게 중생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성령에 의하여 큰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다.
    2) 요한일서의 중생
    요한일서의 중생은 “하나님께로서 나다”(γεννηθήναι ἐκ τού θεού)란 어구를 통해서 규정된다. 이 어구가 요한일서의 후반부에만 다섯 군데(요일 2:29; 3:9; 4:7; 5:1; 5:18) 나온다. 요한일서의 중생은 이 어구가 그곳에서 취하는 의미들의 총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 어구가 나오는 다섯 군데를 전후 문맥과의 관련성 속에서 차례로 살펴보자.
    ① 요일 2:29: 만일 너희가 그가 의롭다는 것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라.
    (ἐὰν εἰδήτε ὅτι δίκαιὸς ἐστιν, γινώσκετε ὅτι καὶ πάς ὁ ποιών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ἐξ αὐτού γεγέννηται)
    여기서 “그”는 앞 절의 재림하는 “그”(요일 2:28d)를 받는다. 재림하는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참조. 요일 2:24-27).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는 또한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심판은 “담대함”(παρρησία: 28c)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μὴ αἰσχύνομαι: 28d)에서 시사된다. 인상적인 것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이야기하는 요일 4:17에서 담대함은 사랑과 결부되어 있다: 사랑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29a의 ἐὰν-조건절은 긍정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들은 분명히 그가 의로우신 줄(참조. 요일 2:1)을 안다. 여기서 “그”는 본 구절의 문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 예수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갑작스러운 교체가 주어져서 “그”는 하나님이다. 이 해석은 요한일서의 사용된 “나다”라는 어구 중에서 나머지 네 개의 용법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독자들이 그 사실과 함께 의를 행해야 하는 것도 안다를 의미한다.
    독자들이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과 자기들도 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진술 다음에 다음과 같은 (생략된 결론과) 부연설명이 뒤따른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안다”. “안다”(γινώσκετε)는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이 부연설명에는 앞 구절로부터 도출되는 결론(“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의를 행해야 한다”)이 생략되어 있다. 의를 행하는 자가 그에게서 난 자이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났다”라는 구절은 2:29-3:10(3:1-3제외)에서 동일하게 만든 여러 다른 구절들과 다음과 같은 일련의 반제적 쌍을 형성한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났다(29de)
    (πάς ὁ ποιών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ἐξ αὐτού γεγέννηται)
    죄를 행하는 자마다 불법도 행한다(4ab)
    (πάς ὁ ποιών τὴν ἁμαρτίαν καὶ ἀνομίαν ποιεί)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6ab)
    (πάς ὁ ἐν αὐτῷ μένων οὐχ ἁμαρτάνει)
    죄를 범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했다(6cd)
    (πάς ὁ ἁμαρτάνων οὐχ ἑώρακεν αὐτόν)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7bc)
    (ὁ ποιών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δίκαιὸς ἐστιν)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8ab)
    (ὁ ποιών τὴν ἁμαρτίαν ἐκ τού διαβόλου ἐστιν)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9ab)
    (πάς ὁ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ού θεού ἁμαρτίαν οὐ ποιεί)
    의를 행하지 않는 자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다(10ab)
    (πάς ὁ μὴ ποιών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οὐκ ἐστιν ἐκ τού θεού)
    이러한 용법에 의하면, 의를 행하는 자는 죄를 행하는 자와 대조적으로 명백하게 맞서있다. 죄를 행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며 불법을 행한다. 반면에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라는 두 구절들(29de와 9ab)이 서로 교차대조를 이룬다는 점이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29d), 그에게서 났다(29e);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9a), 죄를 범하지 않는다(9b). 이러한 구조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의를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조된다.
    다음에 나오는 요일 3:1-3은 앞의 29절을 해석한다. 특히 ἵνα-절(3:1)이 앞 구절의 하나님에게서 남을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하여 하나님께로서 남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동의어가 된다. 신자는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선물이고 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이 예수의 파송과 희생 안에서 계시되었다. 그러한 파송의 목적은 “우리가 그를 통해서 살고(4: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기 위함이다. ‘칭하다’와 ‘이다’는 유대적인 이해에 의하면 동일하다. 저자에게는 이러한 동일성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칭한다는 진술에 분명하게 ‘그리고 우리는 자녀이다’를 덧붙이기 때문이다. 자녀 됨은 아버지가 그 아들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그렇게 확실하게 부어주신 한에 있어서 유효하고 더 이상 뒤엎을 수 없다.”
    신자의 하나님의 자녀 됨은 제한적이고 잠정적이다(3:2).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를 넘어가는 어떤 것이 미래로부터 기다려진다. 그것은 그것이 나타날 때에야만 비로소 실재가 될 것이다. 신자는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희망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라 그에 대한 희망이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함에 대한 희망은 확실한 희망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그가 어떠한지 그를 처음 보게 될지라도,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의 동일함에 대한 희망은 현재적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희망에 적합하게 소극적으로는 죄에서 정결해야 하고(3:4-9) 적극적으로는 형제애를 행해야(3:10-24) 한다.
    ②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πάς ὁ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ού θεού ἁμαρτίαν οὐ ποιεί)
    이 구절은 요일 3:4-10의 두 번째 논쟁 가운데 다음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1. 논제:
    a) 긍정적: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고(7b)
    b) 부정적: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8a)
    2. 전승의 시사: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8b)
    3. 결론
    a) 긍정적: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9ab)
    b) 부정적: 의를 행하지 않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10c).
    9ab절은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는 7b절의 긍정적 논제에 대한 긍정 표현의 결론으로 제시되었고 이 긍정 표현과 10c절의 부정 표현의 결론은 6절과 병행한다:
    6ab: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9ab: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
    6c: 죄를 짓는 자 마다 10c: 의를 행하지 않는 자마다 .
    그를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병행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그 안에 거하는 자”와 대체될 수 있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와 대체될 수 있어서 서로 동의어적이다. 이러한 동의어적인 구절들의 반복을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가 강조된다.
    9절은 다음처럼 교차대조적으로 작성되어 있다:
    A: 9a: πάς ὁ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ού θεού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B: 9b: ἁμαρτίαν οὐ ποιεί (죄를 범하지 않는다)
    C: 9c: ὅτι σπέρμα αὐτού ἐν αὐτῷ μένει (그의 씨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B′: 9d: καὶ οὐ δύναται ἁμαρτάνειν (그리고 그가 죄를 범할 수 없다)
    A′: 9e: ὅτι ἐκ τού θεού γεγέννηται (그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가 2번 교차대조적으로 사용되고 그 이유가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서 ‘신자(=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가 강조되고 있다.
    우선 7절의 논제에 의하면,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고,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2장 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그들은 의를 행한다. 9절에서는 그 구절이 교차대조적으로 작성이 되어 결론으로 제시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남’의 결과물인 의를 행하는 것과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상호 교환적이다. 독특한 것은 “낳다”(γεννάω)라는 단어가 요한일서에서는 결코 마귀와는 함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마귀가 하나님과는 달리 창조적 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낳음은 새 것을 만들고,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한 것을 근거로 이 역사에서 구해내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난 자에게, 죄의 역사에서 더 이상 지배받지 않는 자에게 실로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해당된다.” 여기서 “죄를 짓지 않음”은 6절에서처럼 신자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실현으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진술에 대한 이유가 “이는 그의 씨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는 말로 주어진다. “씨”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다(Augustine, Bede, Bengel, Dodd, Barclay). 둘째로 성령이다(Calvin, Meyer, Brooke, Strecker, Wengst, Klauck). 셋째로 신적 생명의 요소이다(Huther, Smith, Westcott, Bruce, Kistemaker). 넷째로 그리스도이다(Karl). 다섯째로 사랑이다(Bultmann).
    씨는 이상에서처럼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Smally, Schulz, Marshall, Hiebert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두 개념을 함께 갖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놀라운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씨가) 그 안에 거한다”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 어구는 하나님께로서 나는 사건을 시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신자들의 도덕적인 행동에 동기를 주고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이 어구는 하나님의 “씨”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안에 거한다고 한다. 그 반면에 그 어구가 나오는 6절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물론 “씨가 그 안에 거한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낳은’과 같은 경우처럼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근원을 형성하고 공존하면서 지속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6절에 의하면 신자의 ‘거함’이 죄로부터 자유함의 조건인 반면에 9절에 있는 ‘씨’의 ‘거함’은 죄로부터 자유함의 전제로서 나타나고, 이 두 ὅτι-절들은 이 자유를 지속하는 소유처럼 묘사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 두 개가 함께 가는가? 그것들은 정말로 함께 간다. 확실히 9절의 주장은 자신을 죄없다고 생각하는 미망(迷妄)에 대한 경고가 있는 1:8이하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은 ὁ μένων ἐν αὐτῷ(6절)가 9절에는 빠져있지만 6절에 있는 것(...)과 비교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 모순의 해결은 σπορά(‘씨’)의 μένειν(‘거함’)이 하나님의 ἀγάπη(‘사랑’, 3:1)의 선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사랑은 신자에게 잃어버려지지 않는 가능성으로 머물러서 그가 실로 죄를 범하지만 항상 그 선물을 요청할 수 있게 한다.”
    신자들이 받은 선물은 상실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며 그것은 항상 실현되어야 할 가능성이다. “가능성의 선물은 항상 요구를 수반하고 그래서 요구 자체는 선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선물과 요구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선물이 앞서고, 기독교인의 실존의 근거를 공급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일체가 된다.”
    사랑이 그 안에 거한다는 근거,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제시된 후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진술이 나온다. 죄를 짓지 않는다(9b)는 확정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9d)는 확정에로 옮겨간 데에는 발전이 있다. 9b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실적인 상태만을 내포하고 있다: 죄를 피하고 죄 없이 거할 수 있다. 그러나 9d에서 새로워진 첨예함으로 나타난다: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에 대한 가능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죄는 불가능한 것, 제외된 것, 황당한 것으로서만, 우리가 우리가 아니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만, 우리의 미래로서 고려된다.”
    이러한 첨예화된 긍정적인 결론에 10절의 부정적으로 표시된 결론이 따른다. 거기서 앞 구절의 하나님에게서 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와 대조되어 나온다. 여기서 부정적으로 표시된 것으로부터 앞의 긍정적으로 표현된 결론(9절)에서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태도가 다루어졌다는 것이 확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자녀의 대비 후에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가가 매끄럽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제시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해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자, 사랑을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실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께 속한 신자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분명히 형제 사랑과 의를, 다시 말하자면 형제 사랑으로서 의를 행하는 것이다.
    ③ 요일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안다.
    (πάς ὁ ἀγαπών ἐκ τού θεού γεγέννηται καὶ γινώσκει τὸν θεόν)
    이 구절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형제애를 논하는 4:7-12을 연다. 그리고 8절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요구: 서로 사랑하자(7a)
    요구에 대한 근거: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7b)
    긍정 표현의 결론: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을 안다(7cd)
    부정 표현의 결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8a)
    근거: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8b)
    7a에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요구가 직접 명령법 형식으로 주어진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이미 앞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빛 가운데 거한다(2:10)고 했으며,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에게서 난 신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3:10-11)고 호소했다. 이제 여기서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가 신자들의 신분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요구의 근거가 곧바로 7b에서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함께 사용된 εἶναι ἐκ은 사랑의 기원과 본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말씀은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랑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요구는 그들의 고유한 근원에 대한 호소이며 그들의 사랑은 이 근원의 드러남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어 7c절에서 긍정 표현으로 결론을 내린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다”. ‘하나님께로서 남’은 과거형식으로 표명되었다. 그것은 신적인 출생이 자신의 삶에서 사랑의 실천에 사실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앞서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자명한 추론이 행해진다: 사랑이 하나님에게 속한다면,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으로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이 근원은 그에게 본질적으로 걸맞지 않고, 그의 고유한 본성에 있지 않고, 그가 그것을 하나님에게로부터 새롭게 얻는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남의 증명과 표명이다.”
    이러한 결론에 “하나님을 안다”(γινώσκει τὸν θεόν)가 덧붙여졌다. 이 보충구는 현재시제(γινώσκει)로 되어있다. 그것은 하나님 인식이 사랑하는 자와 사랑의 하나님 사이의 교제의 지속적인 표징으로서 효과적으로 머물러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을 통하여 사랑 받게 됨의 상관개념이다. 사랑의 근원과 근거로서의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랑의 실천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는 그 인식을 그 자신이 사랑함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이 긍정 표현의 결론에 부정 표현의 결론이 뒤따라 와서 앞에서 언급한 것의 반대의 경우를 다룬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 부정으로 표시된 단순과거(οὐκ ἔγνω: “모른다”)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시한다. 과거의 회심의 시간을 시사하는 그 인식 행위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거나 이미 무산된 것이다. 신자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는 자기의 인식을 거짓으로 입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인식이 실제로 하나님 인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결론 다음에 그 근거가 따라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은 7b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다”라는 말씀을 받는다. 이 두 말씀은 동일하게 여겨진다. 마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병행구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d)가 “그는 빛 가운데 있다”(1:7a)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4:16d에도 다시 등장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사랑의 본성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요청의 근거를 지시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처럼 정의는 아니다. 또 그 문장은 “사랑이 하나님이시다”로 거꾸로 읽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언제나 주체로 머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랑을 단순히 동일화할 수도 없고,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진술에서 “하나님의 실재가 다루어진다. 사랑이라는 표시는 고유한 하나님의 특성에 대한 언급도 아니고 그의 사역의 묘사만도 아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말해진다. 하나님은 그의 본성에 의하면 사랑이다. 그것이 철두철미 그의 실재를 만든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다. 그는 이 실재를 제외하고는 더 자세히 묘사할 수 없고 이 실재로만 묘사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의 배후에 있는 어떤 다른 감춰진 실재도 아니고 그러한 실재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끔 외면만이 아니라 그 자신을 계시했다’(Büchsel, 69쪽). 그는 사랑의 존재로서 계시하고 그의 계시 속에서 일해 왔다. ‘그는 그의 모든 행동 안에서 그렇게 존재한다. 계시하는 하나님이 실제 하나님이다’(Gaugler, 221쪽).”
    이상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 것이 확실하다.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한 자만이 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신학적인 인식이 그 인식에 의해 새겨지고 규정된 태도와 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이 인식이 거꾸로 그러한 태도의 실행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④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πάς ὁ πιστεύων ὅτι Ἰησούς ἐστιν ὁ χριστός ἐκ τού θεού γεγέννηται)
    이 구절(1ab)은 5cd와 테두름을 형성함으로써 요일 5:1-5을 한 단위로 만든다. 이 단위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승리’를 말하는데 다음처럼 구성되어 있다:
    논제(1abc):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특정 방향의 전개(1defg):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
    인식기준 제시(2abcd):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을 안다
    설명(3abc):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이것이다
    그의 계명을 무겁지 않다
    근거(4ab):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것이 세상을 이긴다
    설명(4cd): 세상을 이긴 이김이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
    수사학적 질문(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
    이 본문에서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1-3만 다루도록 한다.
    강조되어 맨 앞에 나오는 “...자마다”(πάς ὁ)로 논제가 시작된다. 이 어구는 다음에 오는 진술만 그 어구를 통하여 표시된 것에 적용된다는 것을 명백히 제시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논쟁적인 의미를 갖는다: “ ... 하는 자마다, 그리고 그만이.”
    “믿는 자”는 현재분사로 표현되어서 개인의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믿음을 묘사한다. 그것은 내포된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믿는 진리에 대한 능동적이며 인격적인 위탁을 포함한다.
    πάς ὁ로 도입되는 말씀(Ἰησούς ἐστιν ὁ χριστός)은 부정으로 된 대응하는 말씀을 앞의 요일 2:22에서 갖는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구절“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이 5절에 나온다. 이것은 4:15에도 나온 것이다. 이 두 형식은 기독론에 관한 요한공동체의 근본적인 고백에 해당한다. 이 기독론적인 진술은 인간 예수의 낮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는 적들에 대한 논박의 목적으로 주어졌고 그 맥락에서 하나님의 실재로서 자기 자신을 주는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4:15(과 2:23)에서 그 기독론적인 진술이 “고백하다”와 결합된 반면에 여기 기독론적인 진술은 “믿다”와 결합되었다. 이 사실은 사상의 발전을 시사한다. “고백 때에는 이 문구가 크게 발설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하고도 그렇게 좋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공중 안에서 그렇게 말하는 모두는 이 문구를 근본적인 신앙물로서 내면적으로도 몸에 익혀야 한다는 것을 위한 전제로 머문다. 공공적인 고백은 그것을 통하여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깊이가 더해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하나님에게서 났다’의 은유로 표현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났다.” 이 은유는 이미 앞에서 의를 행함(2:29)에, 죄 없음(3:9)에, 그리고 사랑의 실천(4:7)에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은유는 신앙의 행위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 자신을 성육신 한 구세주에게 위탁한 자를,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자를 하나님은 죄의 역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세상을 세상으로 만드는 사랑의 원칙을 통하여 그 규정에서 해방시키시고, 새롭게 만드신다. 그러한 자가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다.”
    이어서 이러한 논제가 특정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전개는 언급되지 않은 다음과 같은 중간 진술을 전제한다: 신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물론 그를 그러한 자로 만드신 자,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언급되지 않고 전제된 진술의 술어가 논제 전개의 주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논제는 형제 사랑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낳으신 자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들을 사랑한다.” 그에게서 난 자들은 물론 동료 신자들,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들이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합이 반영된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하나님에게서 난, 즉 참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다른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함께만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첫째로 신자는 이중적으로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로. 둘째로 ‘하나님에게서 남’은 고백하는 신앙과 실천하는 사랑과의 결합 안에서만 실현된다. 이러한 결합이 요일 3:23에도 나온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계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서신 전체의 사고 흐름을 내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전개 다음에 형제 사랑의 인식기준이 제시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을 안다.” 이 구절은 가장 어렵지만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앞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함께 간다. 그리고 3:23에 의하면 그의 계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계명들은 여러 번 신자의 전체 태도에 현저하게 영향을 미치는 형제애의 계명에로 수렴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제 사랑은 형제 사랑에 관한 그의 계명을 실행하는 것에서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에 의하여 야기된 사랑은 그 자체 밖에서는, 즉 그것의 수행 밖에서는 하등의 인식근거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지는 이론적으로 토론될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실제로 그리고 정말로 형제애의 실행에 매진하는 데에서만 증명된다.” 형제 사랑의 인식기준의 제시 때에 형제 사랑의 주체와 그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한정된다: 형제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 이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의 자녀들(=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구원공동체의 회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외의 이웃들이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형제 사랑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신학적인 사변으로 공동체를 얕보는 적들과의 첨예화된 논쟁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인식기준 제시 후에 하나님 사랑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하나님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그것과 함께 실제로 형제애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은 계명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의 행동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의 수행에 있다. 형제 사랑을 지나쳐버리는 하나님 사랑은 없다.
    하나님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확정 후에 계명에 대한 설명이 따라온다. 그의 계명들은 무겁지 않다. 계명들은 신자들을 기죽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부과된 짐이 아니다. 이 구절은 “힘과 격려의 환영받는 근원으로서” 계명을 따르고 형제애의 실행에 매진하라고 독자들을 초대하고 격려한다.
    ⑤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οἴδαμεν ὅτι πάς ὁ γεγεννημένος ἐκ τού θεού οὐχ ἁμαρτάνει)
    이 구절은 요한일서의 맺는 말(5:14-21)에 속한다. 이 맺는 말은 후에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여 기록된 후기 혹은 추신 혹은 부록이라고 한다. 이 추신은 두 부분(14-17; 18-21)으로 나누인다. 첫 번째 부분의 주제는 기독교인의 기도이고, 두 번째 부분의 주제는 기독교인의 앎이다. 5:18은 두 번째 부분을 연다. “우리가 안다”로 도입되는 진술은 요한공동체의 전승의 믿음의 보화에서 따온 특별한 귀중품들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기도의 들음(5:14-15) 이외에 신자의 “하나님에게서 남”이다. 이 어구는 신자들은 그들의 존재의 새로운 근원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된 결과가 뒤따른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요일 3:9을 받아 사용한 것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5:16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받는다. 사망에 이르는 그리하여 “공동체와 단절하는 죄를 범한 자는 결코 하나님 안에 그의 근원을 갖지 못한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3:10)는 그렇게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과 사랑의 교제에서 완전히 떨어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요한일서의 중생은 역시 하나님께로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지지는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유보되어있다.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에게서 났음과 같이 동일한 의미로 사실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났음과 하나님의 자녀 이 두 가지는 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종말에 확립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됨은 잠정적이다. 신자는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이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됨에 대한 희망이다. 이 희망이 현재를 규정한다. 신자는 그 희망에 적합하게 살아야 한다.
    중생, 즉 하나님에게서 났음에 관한 진술들의 진리는 체험, 혹은 경험 및 그와 동등한 것에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요일 3:9에 의하면 개인의 경험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에 관한 진술들은 신앙적인 진술이다. 믿음 안에서만 그것은 사실이 된다.
    요한일서는 중생의, 즉 ‘하나님에게서 남’의 “어떻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전제된다. 관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신자의 삶의 “어떻게”에 집중되어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어두움이 없는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참조. 요일 1:3.6 이하)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는 중생의 도덕적인 결과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남’의 결과로 드러난 삶만이 중생을 실증하기 때문이다.
    중생을 실증하는 행위는 의의 행위, 죄를 짓지 않음, 형제를 사랑함, 예수를 믿음 등이다. 이러한 신앙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씨”, 즉 사랑이 신자의 속에 부어져서 거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실재를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는 이 실재를 제외하고는 더 자세히 묘사할 수 없고 이 실재로만 묘사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한 자만이 하나님을 안다. 이 인식은 그것에 의해 규정된 태도와 불가분리 하게, 마치 이 인식이 그러한 태도의 실행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진 사랑은 신자에게 잃어버려지지 않는 가능성으로 머물러서 그가 실제로 죄를 범하지만 항상 그 선물을 요청할 수 있게 한다. 이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며 항상 실현되어야 할 가능성이다. 사랑의 가능성으로서의 선물은 항상 요구를 수반하고 그래서 요구 자체도 선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그것의 판단 기준은 형제를 사랑하고 의를 행하느냐 하는 것, 즉 형제 사랑으로서 의를 행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난 모든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요한복음의 중생과 요한일서의 중생은 다음과 같은 개념범주를 갖는다. 요한복음에서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성령에 의하여 발생한다. 중생은 성령으로 남, 하나님께로 남, 위로부터 남이다. 육적인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적인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은 종말의 사건을 현재에서 경험하고, 성령의 내적 현존을 인식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확신하고 그를 그렇게 고백하며 유일한 참 진리이신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 선포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렇게 성령으로 중생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성령의 내적 현존과 내적 증거 가운데 큰 확신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다.
    그 반면에 요한일서에서 중생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목적으로 사랑의 부어주심에 의하여 발생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랑 부어주심을 통하여 새롭게 된 사람이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이다. 그러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종말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중생에 관한 진술은 신앙진술이다. 중생은 신앙진술로 표현되기 때문에 중생은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중생의 발생에 관해서가 아니라 사랑, 의, 죄짓지 않음, 믿음 등의 성결한 신앙행위에 관해서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요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러한 신앙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씨”(사랑)가 부어져 신자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생의 개념범주에서 포함되는 것은 성결이다. 성결한 삶이 중생의 증명이다. 그리고 부각되는 것은 사랑의 순환이다: 사랑의 하나님에게서 사랑이 부어져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다. 그렇게 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이 그 안에 거함으로써 형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상과 같은 중생의 개념범주에서 두 개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에서는 중생의 발생에 초점이 놓여진다면, 요한일서에서는 중생 이후의 신앙행위에 관심이 집중된다. 요한일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앙행위만이 중생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중생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서 발생한다. 요한일서에 의하면 중생을 증명하는 신앙행위는 사랑의 부어주심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동전의 한 면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개념을 서로 보완하면 양면의 동전을 형성하듯이 중생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생에 관한 한 성령을 통한 중생이 관심의 알파이며 오메가이다. 그러나 중생은 영 경험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증명될 수 없고 오직 사랑(과 의)의 행위로만, 성결한 삶으로만 증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생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믿고 산다.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행위 없이 성령을 통한 중생은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령을 통한 중생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실행과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성령을 통한 중생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실행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 현존과 내적 증거도 중요하다. 동시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실행, 성결한 삶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령과 그러한 삶만이 우리의 중생을 실증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하여 중생한 자만이 하나님과 바른 사귐을 나누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