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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2008.09.30 12:29

관리자 조회 수:3

관상기도-과연 성경적인가 <생명샘>관리자http://www.koabbey.com/zbxe/175182007.04.26 08:57:42 (*.233.147.39) 43934 / 0 0http://cafe.daum.net/life0675관상기도-과연 성경적인가 글쓴이 : 생명샘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을 혼동하지 말자

-관상기도, 과연 성경적인가-

한 동안 한국교계에서 새로운 사역이나 가르침에 대한 시비가 다소 뜸해진 것 같더니, 요즈음 한편에서 ‘관상기도가 성경적이냐, 아니냐’로 찬반 양론이 일어나고 있다.

한쪽에서는 관상기도의 유익을 조용하게 전파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 사교의 관행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도 존경 받는 일부 목회자들이 관상 기도를 전파하고 있음에도 주로 개혁주의자들이 비판자로 나서고 있다. 왜 한쪽에서는 관상 기도를 지지하고 다른 쪽에서는 반대를 하는가?

필자는 가능하면 교리 논쟁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한다. 교리 논쟁에 휩싸이다 보면 논리를 개발하고 논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영성의 정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이고 주요한 진리가 무지한 자들의 손에서 능욕 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것도 진리를 사수하는 말씀의 사역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역이나 가르침과 한국 교계

사실 필자는 이 때문에 관상 기도라는 말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임재 기도라는 말을 선호하고, 임재 기도의 성경적 근거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해 온 사람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생소한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앞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새로운 운동이나 가르침이든지 한국적 상황에 전파할 때는 신학적 여과 작업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 없이 소개자들이 그대로 소개하다 보니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새로운 영적 사역이나 가르침을 전할 때는 상당한 사전 준비와 교리적 작업이 필요함을 역설해 온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외국에서 좋다고 하여 여과 작업 없이 한국에 소개할 경우 반드시 비판의 포탄 세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소개자나 전파자들이 한국적 상황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70-80%가 장로교단과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곳이며, 타 교파 소속이나 신학을 전공한 분들은 기분이 편하지 않겠지만, 많은 경우 새롭고 생소한 사역이나 가르침에 대해 비판의 기치를 높이는 곳도 장로교단이나 개혁신학자들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입되는 능력사역이나 영성사역은 대부분이 개혁신학과는 상관이 없는 신학이나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많은 경우, 미국에서 그런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칼빈과 개혁신학이라면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들이 보기에 개혁주의자들은 걸핏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비판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교회에서 명 설교가로 인정 받는 존 맥아더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은사 I&II]는 전형적인 영적 무지의 소산이지만 체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한때 능력사역의 전파자였던 존 윔버는 개혁신학이 이단으로 취급하는 퀘이커 교도였는데 공교롭게도 관상기도를 전파하는 리차드 포스터 또한 퀘이커 교도 출신이다.

같은 현상이나 사실을 말하더라도 이들의 용어는 장로교단이나 개혁 신학의 그것과 다르다. 그 결과 개혁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여 새로운 사역이나 가르침을 한국 교계에 소개하려는 몇몇 사람에게, ‘개혁 신학을 공부하라, 그렇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라는 조언을 해주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 결과 그들은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를 받아 지금도 힘들어 하고 있다.

필자가 개혁 신학의 산실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할 때 교수가 자주 하는 소리는 ‘우리는 교리를 중시하지만 저들은 체험을 중시한다’였다. 조직신학 과목 첫 시간에 교수는 ‘개혁 신학은 유일한 바른 신학이고 다른 신학은 이단적인 것들이다’(Reformed theology is the theology. All the others are heretics)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것들은 정말 위험하고 오만한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또 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이 말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바탕한 교리를 중시하지만 너희는 바른 교리와는 상관 없이 체험만을 중시한다.’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너희는 신학적으로 틀렸다. 즉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명제가 개혁주의자들의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고민해 보지 않고 개혁주의 전통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현상이나 가르침은 일단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많은 개혁주의 교단들은 어떤 새로운 사역이나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고 확장되려고 하면 목사 고시에서 이런 문제들을 제시한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_____을 논하라.”

일단 이렇게 되면 어떤 운동이든 개혁주의 입장에서 난도질을 당한다. 빈야드 운동, 교회 성장 운동, 능력 사역, 영성 사역, 관상 기도 운동 등.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필자는 새로운 사역을 소개할 때 가능하면 장로교와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수용 가능한 방법으로 이론이나 사역을 전개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적인 상황에서 쉽게 비판되고 많은 경우 ‘주변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좋은 것도 적합한 용기에 담지 못해서 버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년 전, 필자는 음성 듣기 사역을 하기 전에 한국의 장로교나 개혁 주의자들을 감안하여 나름 대로 개혁 신학자들 중에서 음성 듣기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을 선택하여 어느 정도 신학화 작업을 했다.

꼭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새로운 사역-찬양, 방언 등-과는 달리 음성듣기나 예언사역은 별 시비 없이 한국 교회에 무난히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음성 듣기나 예언 사역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나 정죄가 없음은 물론 요즈음 음성 듣기 사역을 실제로 하고 있는 정통 교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배들의 나쁜 유산-부수적인 교리로 갈라지는 것

로마 교회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의 기치를 높이 들고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신앙의 거인인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즈윙글리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문제로 서로가 대립했다.

성찬식 때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하느냐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양측은 심각한 설전을 벌였던 것이다. 마침내 이 꼴을 보다 못한 헤세의 필립 (Philip of Hesse)은 양측에게 화해를 종용했다.

1529년 가을, 양 측은 아름다운 도시 마부르그에 모여 협상을 진행했다. 그들은 15개의 협상 안건 중 14개의 기본 사항에 대해 합의를 보았으나, 마지막 한 건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여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찬식 때,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하느냐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즈윙글리는 ‘성찬식 때 그리스도가 상징적으로 임한다’고 주장했고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칠판에 기록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식 때 실제로 임한다는 사실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루터는 죽을 때까지 스위스의 개혁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그치지 않았다. 루터는 자기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영에 미혹된 사람이며 진정한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고 공격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두 거성이 이와 같이 본을 잘못 보였기 때문에 이러한 나쁜 전통이 오늘날 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로버트 D. 린더는 말한다 (Robert D. Linder, Christianty Today, Vol XIL No 3, p. 43).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성찬식의 그리스도의 임재와 같이 구원에 필수적인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는 부차적인 교리-세례냐 침례냐 등-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전력을 형제끼리의 불화로 소모전을 벌인 적인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은 공통의 주적인 마귀만 좋은 일을 시킨 셈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시비가 일고 있는 주제들을 보면 견해 차이, 시각 차이, 성경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많다. 그렇다고 필자는 성경의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 육체의 부활과 재림 같은 근본적인 교리 차이를 용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거나 성경 해석의 시각 차이에 의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부차적인 교리에 대해, 일부 정통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이나 견해와 조금만 다르면 쉽게 판단하고 정죄해 온 경우가 많다.

그렇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이 속한 교파나 교단에는 ‘이단성’이나 ‘사이비성’이 없는가? 대 교단의 교권주의, 물량주의, 금권선거로 인한 타락상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잘못된 기적종식론 (cessationism) 을 신봉하고 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오늘날 신실한 수많은 신자들이 증거하는 기사와 이적이 이제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적인 견해’가 아닌가?

또한 오늘날 전 세계의 선교 현장에서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는 축사나 영적 전쟁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수많은 사역자들이 그 중요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정통교회는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교인들이 귀신 들려있거나 귀신의 공격을 받고 있음도 모르고 또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기적종식론자들이나 영적 전쟁을 무시하는 자들이 이단인가? 그들은 다만 신학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다른 수많은 신실한 신학 교수, 목사나 신자들이 인정하는, 자기들이 보기에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이단이니 이단성이니 사이비니 하면 함부로 정죄하는가? 자기들과 신학적 입장이 다르고 전통이 다르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밥 파산티노는 미국에서 반 이단 운동에 수십 년간 종사해왔는데 그는 [마녀 사냥](Witch Hunt)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이 생소하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주된 이유는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errors in thinking and the misuses of logic)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D. A. 카슨도 [성경해석의 오류](Exegetical Fallacies)에서 잘못된 성경 해석, 잘못된 논증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남가주 얼바인 소재 크리스천 연구소(CRI)의 연구원인 로버트 M. 보만도 [정통과 이단](Orthodoxy & Heresy)에서 무분별한 이단 정죄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의 대상이 되는 문제점에 대해 구체적인 신학적 논쟁을 하기보다는 비판자들의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일단 눈이 멀어져 있는 그들에게 아무리 내 주장을 전개해도 ‘그건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논쟁이 평행선을 이루고 결국 부질없는 소모전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잘못된 예

기독교인은 동성연애자이자 식인종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은 희한한 죄명으로 핍박을 받았다. 2세기경 마르크스 아루렐리우스 황제 때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이 근친상간을 저지르며 식인종같이 인육을 먹는, 사회 기강을 저해하는 불법집단이라고 정죄했다.

기독교인들이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성찬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동성연애나 근친상간으로 보였고 식인종의 행위로 보였다.

이때 기독교 변증가인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황제에게 보낸 ‘기독교인을 위한 탄원서’에서 로마 당국의 무고에 항변했다. 일방적으로 한쪽 이야기만 듣지 말고 소문대로 정말 기독교인들이 짐승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죄나 식인종 같은 죄를 저지른다면 실제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조사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 정죄해도 늦지 않다고 변론했다.

방언하는 자는 신비적 열광주의자들이다

교회사학자인 빈손 사이난의 [말세에서](In the Latter Days)에 의하면, 중세기에는 방언하는 그 자체를 귀신들림증의 증거로 삼아 끔찍한 마녀 사냥을 자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교회는 교회에서 피아노나 오르간이 마귀 소리를 낸다고 사용을 금지한 적도 있다.

20세기초에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을 하자 성령세례와 성령의 (외적인) 능력을 강조한 R. A. 토레이 신부조차 방언을 ‘원숭이 장난’이라고 불렀으며 오순절운동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운동이 아니라 “남색하는 자들의 운동”이라고 혹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성령운동하면 곧 방언운동으로 오해받아 왔다. 모 유명한 지도자는 ‘방언이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저질화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주류 교단―장로교나 감리교―의 목사들이나 신자들도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통하여 방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제 방언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례는 줄어 들고 있다.

또한 유수장로교 신학교의 P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방언을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부정한 후에 어찌된 일인지 결론 부분에 가서는 공중예배 이외의 모임에서는 방언을 해도 좋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런 신학 증명방법이 어디 있는가? 아무튼 방언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현실이 그러하니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어느 큰 교회를 담임하다 은퇴하여 세습 논란이 일고 있는 K 목사는, 방언하는 것은 몽롱한 환각주의이자 신비주의자라고 매도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수천 명의 목회자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스런 일인가?

북 치고 기타 치는 것은 무당굿이다

방언 외에 한국 교계에서 거센 반발을 자아낸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활발하게 드리는 찬양 예배이다.

필자는 이미 1990년 초에 기타 치고 북 치면서 손을 들고 손뼉 치며 활발하게 찬양하는 교회를 섬긴 적이 있다. 그러자 보수 교계 일대에서는 난리가 났다. 북 치고 기타 치는 것은 ‘무당굿’ 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교회 예배의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역 교회협의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찬양하는 어느 다른 단체의 모임을 ‘무질서하고 광란하는 사교 집단’이라고 정죄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이제는 무당굿하고 광란하는 집단으로 전염된 것을 본다. 찬양 예배 시 북 치고 기타 치고 손 들고 손뼉 치지 않는 교회가 드물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반대하고 비판한 대로 새로운 신학을 정립했기 때문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교인들이 좋아하더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대답이다.

이전에는 신학적 전통적으로 볼 때 ‘무당굿’이고 ‘광란’이라고 정죄하더니 이제는 자기 교인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해서 바른 교리의 정립은 아랑곳없이 ‘저요, 저요’ 하면서 찬양 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물량적인 성장주의의 환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장자 교단인 예장○○의 총회장인 0 목사조차 필자도 참석한 사석에서 “그렇게 (찬양) 하지 않으면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찬양 예배를 받아들이는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들보다 좀 앞서가고 자기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영적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역사인가를 알아보는 겸손이 없이 무조건 비판하고 정죄하다가, 그것이 추세가 되고 양적 성장에 도움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런 사과나 신학적 정립도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임재 기도를 너무나 좋아한다. 필자는 예배나 집회 때에 회중 전체를 상대로 임재 기도를 자주 인도한다. 그러면 심지어는 초신자들조차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쉽게 음성을 듣는다.

“주님이 저에게 이런 위로(소망, 안위)의 말씀을 주셨어요.”

“주님이 저에게 이런 죄를 회개하라고 하셨어요.”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군요.”

우리에게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도 훈련을 통해 배운 것을 바로 그들의 교회에서 적용하는데, 교인들이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며 너무나 좋아한다고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책에서 이런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어떤 체험을 한 연로한 청교도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길이 메말라서 그는 우물가에 앉아 식사용으로 호주머니에 간직한 빵과 물을 조금 마셨다.

거기서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다가오셔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가 오십 년 동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 것을 통해 얻은 지식보다 짧은 한 순간의 체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또한 기도의 용사인 브리지 허만은 [창조적 기도](Creative Prayer)에서, “한 시간 동안 (임재기도와 듣는기도를 통해 주님을) 그렇게 듣는 것이 일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거나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인간성의 신비와 신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필자는 얼마 전 유명한 L 목사가 관상 기도(임재 기도)에 심취한다고 했을 때, ‘아, 이분도 이제 영성에 눈을 뜨는구나’라면서 기뻐했다. 더 나아가서 이분이 임재 기도의 열매를 맛 본 듯한 발언을 했을 때 더욱 기뻤다. 이전에는 비록 그가 뛰어난 설교가로 알려져 있지만 모 설교 비평가의 말처럼 ‘적당하게 은혜 받고 적당하게 교양 지키기에 좋은 설교’를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분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교회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부교역자에게 나누어 주고, 수평 이동 신자는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물론 진위 여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임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런 체험을 하여 행동에 옮긴다면 아마 한국 교회의 위상은 수직 상승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필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임재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교인 숫자나 세상의 영광은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천국 상급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수만, 수백만의 교인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교인 ___만 증가 운동’을 벌이는 대형 교회나 대형 교단은 이 세상에 교세 확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분별조차 못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숫자 늘여서 무엇 하겠다는 것인가? 크다고 무조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은가?

예배드리는 자는 모두 모로몬교도들이다?

방언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고 신유하는 것이 어째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인가? 사교나 사이비 집단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나쁜 것인가? 사교나 사이비 집단의 주인은 마귀이며 마귀는 하나님의 것들을 먼저 도적질하여 남용하고 왜곡하여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명수이다. 외형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들의 논리를 따르면 정통교회의 모든 예배 형식도 이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모르몬교는 예배 시 그들이 섬기는 신을 찬양하고, 그들의 경전을 강해하고, 기도하고, 헌금한다.

-A교회는 예배 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설교하고, 기도하고, 헌금한다.

-그러므로 A교회는 모르몬교회다?

불신자들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신(神)은 모두 똑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들은 비록 외양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임을 안다. 왜? 그들이 섬기는 신과 신자가 섬기는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이다. 외양은 비슷하지만 외양에 담긴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르몬교와 기독교는 외양은 같지만 본질이 다르듯,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 체험과 마귀가 주는 신비 체험을 구분해야 한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신비 체험조차 잘못된 것으로 보는 비판자들이야 말로 마귀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 좋은 것들을 하나님은 행하지 못하시고 마귀만 행한다고 생각하는가?

일부 비판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시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는가? 내가 체험이 없다고 해서 남의 건전한 체험까지 도매금으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매도하는 비판자들이야말로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을 혼동하는 오류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가르침이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은 벌떼처럼, ‘그건 사이비 종교에서 하는 짓’이라면서 비판한다.

필자는 그런 사람들이 의심스럽다.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경건 훈련을 하길래 하나님이 하시는 좋은 일을 잘 모르고 마귀가 하는 좋은 일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이런 주장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외양이 같으면 내용도 같은 것으로 단정하는 오류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부정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예를 들면, 자유주의자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창조설화나 홍수설화 등이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와 비슷하다고 하여 성경 기록은 이들의 설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설화가 오히려 성경의 기록을 왜곡, 오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성경의 영감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한 자들이 생소한 영적 체험을 한 자들을 비판할 때 흔히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체험이 없는 자들에게는 영적인 실상의 ‘내용’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고 비기독교적인 것들과 비슷한 ‘외양’만 보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아는 제한된 경험과 단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잘못 비판하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체험주의자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무체험이나 나쁜 체험을 근거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는 불건전한 이성주의자, 사변적인 논리주의자란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 찬양하거나 기도할 때 똑같은 가사와 구절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힌두교에서 ‘만트라’라고 반복하는 것과 연관시켜 마귀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 반복하는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인가? 성경 말씀 암송은 수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즐겨하는 경건의 방법이다. 성경 암송의 핵심은 반복이다. 그러면 이것도 사교적인 것인가? 찬양할 때 은혜가 넘치거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면 같은 구절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간다. 때로는 한 구절을 30분이나 한 시간 동안 반복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외양은 같지만 내용은 다른 것이다.

사탄은 복사와 오남용의 천재다.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왜곡하고 남용하는 천재다. 부부간의 섹스는 성스러운 것이지만 홍등가의 섹스는 죄악이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나 복음성가조차 당시인들이 술집에서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에 기독교적인 가사를 붙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사이비 종교에서 어떤 것을 하니까 기독교에서 해서 안 된다’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오히려 사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것들을 먼저 도적질하여 오남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 것으로 회복해야 한다. 신자들은 그런 것들조차 ‘구속’(redeem)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오류

생소한 영적인 현상의 원인은 하나님, 마귀 및 심리적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이 셋이 섞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잘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을 분석하는 한 가지 유효한 방법은 ‘열매’로 판단하는 일이다.

성경이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은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을 때, 과연 그 체험으로 인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말씀에 더욱 순종하고,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욕심에서 점점 멀어지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의 합작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반문해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일 중에 100% 하나님의 사역이 과연 몇 개나 있는가? 100% 영감을 받았다는 기록된 성경의 구절에 대한 해석조차 사람마다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나는 나의 정욕과 마귀의 영향에서 100% 벗어났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이단 중에서도 최고의 이단이다. 죄나 마귀의 영향에서 100% 벗어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구원은 받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편견과 오류에 차 있기 마련이다.

정통을 표방하는 교리를 따르고 그러한 교단에 속하기만 하면 아무런 잘못도 없고 아무런 오류도 저지르지 않는가? 무오한 성경은 변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은 변하거나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통찰력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개혁 되기는커녕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우리 전통에서는 그런 걸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린 신학은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다.”

100% 완벽하고 무오한 전통이나 신학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는 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라는 겸손하고 개방된 자세를 취해야 한다.

걸핏하면 주어진 몇 가지 교리 공식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만불손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을 이런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한다(엡 1:17; 벧후 3:18). 신학 좀 공부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오만불손하게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여 세상의 부귀 영화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씀(빌 3:7-9)을 곰곰히 묵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되면 신학을 통해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경거망동한 것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자의 소치였는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일반 은혜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오류

학문이나 과학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 자체를 보고 가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정통교회도 문명의 이기인 음향시설이나 자동차, 출판, 매스컴을 사용하여 전도한다. 사교 집단도 그렇게 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이단인가?

어떤 비판자는 오늘날 찬양 음악이 ‘비트’(beat, 북을 두드리는 것)를 사용한다 해서 그것은 마귀 음악이라고 정죄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마귀를 부를 때 그런 음악을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한때 교부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 악기 사용을 금지했다. 타락한 세상에서 환락과 흥분을 돋우기 위해 악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런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예배를 드릴 때 시편을 부르라고 했다. “ . . .singing of psalms with grace in the heart . . .(마음으로 시를 부르며….)(신앙고백 21-1장). 다른 노래를 세상적이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 이전만 해도 미국의 청교도들은 찬양할 때 단조롭게 창(chanting)만 하면서 멜로디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는 로마 천주교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일부 정통 장로교단의 헌법 책에 보면 psalms를 ‘시편’이 아니라 ‘찬송’으로 번역하고 있다. 잘못된 번역이다.

오늘날 단조롭게 시편만을 그것도 ‘창’으로만 부르는 교회가 있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준수한다는 교단 중에 이렇게 찬양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임재 기도를 통해 거룩하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직접 한 번이라도 만나보라. 자신이 견지했던 그 잘난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신학-그렇다고 명제 신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것인가를 깨달을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무한 광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편파적인 증거 제시의 오류

정통 교회 에서도 애매하고 어려운 성경 구절이나 영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소논문을 쓰면서 어떤 구절에 대해 내로라 하는 주석가들의 주석을 수 십 권 비교 분석해 본 적이 더러 있다. 동일한 구절에 대해 전혀 상반된 해석을 한 사람들도 있고, 비슷하지만 뉘앙스나 표현이 다르게 주석한 책들도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한 구절에는 ‘한 가지 해석’이라는 성경해석학의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이들 중 대부분은 잘못된 것이고 비판자들의 주장대로 이단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또한 교회사의 기록이나 간증에 대한 것도 누구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상이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해석, 증거 및 (나쁜) 간증 몇 가지를 제시하고는 마치 전체가 그런 것같이 확대 포장한다. 그러면서 좀 다르게 해석하면 성급하게 정죄한다.

이것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이다. 필자는 법과대학원에서 법정변론서 작성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변론서 작성에서 나의 고객에게 유리한 판결만 인용하고 불리하지만 중요한 판결을 인용하지 않으면 연구 태만으로 인해 심각한 감점을 받는다.

몇 년 전 미국에서는 오클라호마 시 소재 연방 청사를 폭파하여 백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인 티모씨 맥베이에 대한 사형 집행이 5월말로 예정되었다가 잠시 연기되었다. 그 이유는 FBI가 당시 수사기록 일부를 피고측에 전달하지 않아 재판이 왜곡될 수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 사형 집행이 한 달간 중지되었고 피고측은 그 수사기록을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단이나 사이비 시비를 걸어오는 일부 기독교계의 비판을 살펴보면 세상 법정의 발 밑도 못 따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터무니 없는 인신 공격, 편파적인 증거 제시, 일방적인 성경 해석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대적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학자나 신앙인의 양심으로는 할 수 없는 억측과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만일 세상 법정에 이런 식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변론서을 제출했다면 그 사람은 아마 태만과 편파적인 견해로 인해 법정모독죄로 구속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워낙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을 비판하기에 그들의 저서나 글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졸업 후 필자가 영문 모를 영적 광야에 갇혀있을 때, 솔직히 말해서 개신교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저서나 글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슈퍼 신앙인이라서 그런지 말씀 보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식의 글들 뿐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식이었다. 영성의 깊이가 너무나 피상적이었다. 그러다가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글들을 접하고 나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신학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중세의 영성가들은 이론적 신학이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자들이었다.

사소한 잘못을 해도 마녀 사냥이나 종교 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정죄 받아 처형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원에서 소극적인 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누린 하나님과의 임재 체험을 종교개혁가들은 신비주의로 치부하여 내팽개쳐버렸다. (사실 로마 천주교도 임재기도나 신비체험을 부인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진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만일 오늘날의 개혁 신앙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중세의 신비주의자는 물론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는 물론 심지어 칼빈 조차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무오한 성경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의 신학은 변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임재 체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화려하고 바른 것 같지만 영적 능력이 결핍되어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면서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누린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의 체험은 어디론가 가고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는 메마르고 미지근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지도 못하여 안팎으로 지탄을 받고 있지 않은가!

임재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체험은 신자를 거룩하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주며, 거룩한 신자만이 능히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길 수 있다.

오만한 기각’(cavalier dismissal)

어떤 미국 목회자가 어떤 사람의 이마 위에 ‘간음’이라는 단어가 보여 그 사람에게 “만일 지금 당장 간음행위를 중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경고한 결과, 그 사람이 혼비백산하여 회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어느 비판자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 사람의 이마 위에 쓰여진 ‘간음’이란 글씨를 보았다니. . .”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를 비판하는 한국의 모 신학 교수도 이 미국 목사의 비판서를 보고 베꼈는지 ‘간음’이란 글씨를 보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왜 말도 안 되는가? 필자에게는 너무나 말이 된다. 필자도 그런 체험이 더러 있고 다른 신실한 신자들도 그런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체험이 없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것은 자기가 모르고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것은 다 잘못되었다는 영적 교만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오만한 기각’이야 말로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새로운 성경 해석에 대해 기존의 전통주의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이다. ‘오만한 기각’이란 논리적 오류의 한 형태인데, 상대방의 어떤 주장에 대해 성경적, 체험적, 임상적으로 자세히 따져 보지도 않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집어치워!”라는 식의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D. A. 카슨은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소리가 아람어인가, 한국어인가. 바리톤인가 소프라노인가”

“신자가 귀신 들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여보게, 초능력적인 계시와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꼴불견이고 역겨운 일일세.” 이 말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부흥 운동을 주도하던 초기에 웨슬레가 소속해 있던 영국 국교회(Anglican)의 버틀러 감독이 웨슬레에게 한 말이다.

비판자가 너무나 확신 있게 하는 소리이고, 많은 경우 영적으로는 무지하지만 이름 난 목회자나 신학자가 하는 말이므로 실질적인 체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쉽게 단정한다.

이런 수법은 비판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패거리 수법’이다. “유명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유명한 어느 목회자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

한 쪽 견해만을 가진 사람 백을 동원하고 천을 동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인 견해가 될 수 있을까?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도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비류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웠다(왕상 21장). 그렇다고 이런 증거가 진실인가? 비판자들은 오히려 진실한 한 사람의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차 대전 후 어느 유명한 물리학자가 어느 학회에서 ‘이론적으로 로켓트는 뜰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얼마 후 로켓트가 떴다. 로마의 어느 장군은 요즈음 무기가 너무 발달하여 더 이상 발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어느 한 분야의 권위자이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한 권위가 다른 분야의 권위를 자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문성으로 인해 사고가 굳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는 폐쇄적일 수 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잘못된 권위에 의지하는 것”과 비슷한 오류이다.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것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강해설교가인 존 맥아더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비성서적이고 성경 외의 계시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 수많은 신실한 신학 교수나 목사들 및 신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런 은사를 여러 가지 사역에 은혜롭게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좁은 신학적인 입지와 체험 결핍 및 나쁜 경험을 통해 이런 것들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 류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많은 경우 그가 큰 교회의 목회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가 말한 것이니 맞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가끔 설교나 강의를 통해 자기들도 잘 모르면서 어떤 영적인 현상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비판한다.

D. A. 카슨은,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믿는 논리상의 오류를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것’(simplistic appeal to authority)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안과 전문의사가 위장병에 대해 말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다 믿어야 할 것인가? 물론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전문 분야가 다르고 그 분야에 대해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설교가이고 목회자라도 자기가 방언 못하고 음성 듣기 못하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는 그렇게 하는 초신자보다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그 말에 권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이 권위자인 것처럼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음성 듣기를 잘 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결핍), 음성을 듣거나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의 오류를 한 두 번 목격했기 때문에(나쁜 경우를 체험함), 존 맥아더 류의 의견에 쉽게 동조한다. 자기들이 모르는 좋은 경우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들이 직접 경험한 한 두 개의 나쁜 경험으로 전체를 평가해 버린다. 심각한 자기 만족과 게으름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또 한 사람 뛰어난 설교자이자 유수신학교의 학장까지 겸하고 있는 찰스 스윈돌은「하나님의 뜻에 담긴 신비」(The Mystery of God’s Will)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 계시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성경 외의 계시를 낮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나의 사역을 볼 때 나는 신빙할만한 그런 계시를 본 적이 없다. (무체험의 의한 주장). 한편, 나는 진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성경 외의 계시를 의지하여 많은 문제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나쁜 몇 가지 경우를 경험함).

그러면서 그는 잘못된 경우 한 가지를 예로 든다. 이처럼 ‘무체험’과 ‘나쁜 몇 가지 경험’에 의한 주장은 은사 반대자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주장이다. 한 때 방언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런 식으로 반박했고 또 어떤 새로운 영적인 현상들이나 가르침에 대해 그렇게 반응해 왔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D. A. 카슨이 말한 ‘논리적 오류’에 의할 때, 이런 주장은, 좋은 경우가 수없이 많은 것은 모르거나 무시하고 ‘제한된 몇 가지 증거에 근거하는 오류’(appeal to selective evidenc), 몇 가지 나쁜 경험을 통해 전체를 모두 나쁘게 평가하는 ‘근거 없는 일반화 또는 과대 진술’(unwarranted generalization or over-specification) 및 무체험 때문에 생긴 ‘세계관의 혼란’(world-view confusion)의 논리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존 맥아더나 찰스 스윈돌같은 같은 사람이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도 실제로 음성을 듣는 사람은 “내가 듣는데 자기가 무엇이라고 없다고 하느냐?”라고 반박할 것이다.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나쁜 경우를 목격한 사람은 그들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믿어질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존 맥아더나 찰스 스윈돌을 존경한다. 그러나 제발 이런 주장들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교만과 무지를 나타내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얼마나 목회를 오래했고 (기껏해야 몇 십년 아닌가?) 또한 얼마나 광범위한 목회 경험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기껏해야 기적종식론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교회는 2천 동안 전 세계에 걸쳐서 수십 억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모든 사람들의 케이스를 일일이 다 점검해 보았단 말인가? 어떻게 자기 개인의 제한된 경험이나 나쁜 경험 몇 가지로 하나님의 선물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좋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히포의 어거스틴, 로마의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 얼마 전 소천한 한경직 목사 등- 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왜 편파적인 몇 가지 증거가 마치 전체인 양 잘못 제시하여 수많은 양무리를 오도하고 있는가?

무체험이나 나쁜 체험에 근거한 주장

생소하고 새로운 영적 현상이나 성경 해석에 대해 반대하는 제 일의 이유는 비판자의 직접적인 체험 결핍이나 한 두 가지 나쁜 경험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 체험했다는 사람이 말썽만 부리더라.”

“하나님의 음성 들으면 무엇하나, 사랑이 있어야지.”

얼핏 들으면 성령 체험 안 하면 말썽 부리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풍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성령 체험이나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은사이지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 체험한 사람 중에서도 말썽부리지 않고 착실한 사람이 많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중에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성령 체험도 없이 말썽 부리는 사람, 하나님의 음성도 못 들으면서 사랑도 없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는 은사와 열매를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은사 없는 자가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런 편견 저런 신학으로 은사도 제대로 개발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자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아니다.

기득권 유지와 보호, 시기로 인한 정죄

제사장의 무리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고소했다. 그러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저의가 다른데 있음을 금방 알았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 27:18).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을 때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따랐다. 그러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제사장의 무리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행 5:17).

오늘날에도 한국 교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평소에는 반목하던 여러 교파들도 어떤 새로운 영적 운동이나 현상을 주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면 시기가 가득하여 서로 공조하여 그 사람을 정죄하여 매장해 버린다.

표면적으로는 교리가 어떻느니 무엇이 잘못되었느니 하지만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패막이, 몰려가는 교인을 잃지 않으려는 집단이기주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속죄양으로 그런 운동이나 가르침을 정죄해 버린다. 마치 무력으로 예수님을 잡아들인 제사장의 무리들처럼 큰 교세를 물리적으로 과시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교인은 내 교회의 양, 내 교파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용어 사용의 트집을 통한 오류

필자는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학자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너무나 평범하고 보편적인 말이지만 일반 평신도들이나 개혁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목회자에게조차 생소한 전문 술어가 너무나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담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것은 행위 언약이고 타락 이후의 구원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구속사역에 힘입어 구원 받는 것이므로 은혜 언약이다.

-자연, 인간의 재능을 일반 은혜 또는 일반 계시라고 부르고 성경과 같은 계시를 특별 은혜 또는 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아담의 타락에 전체 인류가 어떻게 가입했는가에 대한 견해 차에 따라 실재론(실제로 아담의 허리춤에 있었다)이 있고 대표론(아담은 언약의 대표이다)이 있다.

-성경은 모범적으로가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구원을 위한 신자의 부르심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내적 부르심(소명)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외적 부르심(소명)이 있다.

필자가 위에 강조한 단어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처럼 많은 ‘전문 술어’를 사용한다. 특히 개혁신학이 더 그렇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문 술어를 통해 성경의 주제를 잘 개념화시키는 사람이 유능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은 자기들은 이처럼 무차별적으로 많은 전문 술어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누가 자기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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