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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다섯 째 - 나의 길

2008.03.07 18:21

김성찬 조회 수:99

누가복음 13장 33절우리는 인생을 길에 비유합니다. 나그네 인생은 길을 가고 갑니다. 이정표를 따라 가기도 하고 앞선 사람을 따라 가기도 합니다. 때론 이정표도 앞선 이도 없는 길을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앉기도 하고, 뒤로 돌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러 어떤 용기 있는 이들은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내가 곧 길이요, 라고 선언하신 분이 계십니다. 세상에 오신 구세주. 그분은 자신이 길 자체, 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 하늘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the way)이 자신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나의 길. 그분이 가셨던 그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하나, 주님께서 가신 길은 외길이었습니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길로만 그분은 나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이 길은 다니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창(窓)이요, 벧세메스로만 가야 하는 어미 소의 길(삼상6:12)이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 그 길은 외길이었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습니다. 돌아서거나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오직 전진. 결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음을 익히 아셨고, 굳건히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도 입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천성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 주저앉거나 뒤돌아 설 수가 없습니다. 곁길은 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이 길로만 매진해 나아갑시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시다. 왜냐하면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좁지만 갈수록 넓어지고 형통해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 주님께서 가신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은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죽음은 고난의 극치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하늘을 진동했던 군중의 환호가 어느 한 순간, 심장을 찔러대는 저주로 돌변해 버린 배반의 비애. 제자들마저 자신을 저주하며 달아나 버린 십자가상의 뼈를 저미게 하는 고독. 이런 것들이 그 죽음의 길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서웠던 길 골고다의 길 모진 언덕 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 우리가 애잔한 감격으로 불러대는 복음 송가의 한 귀절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런 치욕스런 죽음의 길을 가셔야만 했을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분과 내가 상관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예수께서 대신 죽음으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믿어지는 은혜를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애를 낳아서 길러 봐야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듯, 우리도 이 숭고한 대속의 사랑을 장차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믿음이 소중합니다.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대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믿음이 보배인 것입니다.

셋, 주님께서 가신 길은 마땅히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13:33a).” 우리 주님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까지도 합목적적인 길로만 가시고, 가시고자 했습니다. 마땅히 아여 할 길에서 벗어나는 삶의 연속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일탈의 희열에 잔재미를 느끼며 사는 인생들과는 그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일관성 있고, 불변하며, 초지일관하게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당당히,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낙오되지 말고 주의 발자취를 힘써 따라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