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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타계] 이승우, 용기 내도

선생님 뵐 수 없다니…

2008년 8월 1일(금) 2:45 [한국일보]

이청준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께서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난 해 연말 무렵, 처음으로 선생님께 연하장을 한 장 보내려고 책상에 앉았다가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라 반나절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가슴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용솟음치고 있었지만 그 어떤 말도 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말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무력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 심정이 꼭 그때와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서 선생님을 잃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0년쯤 전부터 새해가 되면 선생님께 세배하러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번번이 찾아가 뵐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선생님께서 넌지시 초청까지 했었는데, 생각나시는지요?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김화영 선생님께서 선생님과 저를 같이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헤어지는 악수를 하며 선생님께서는 그 은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형, 술 한 잔 사, 하셨지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술을 얻어먹고 싶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다음날 당장이라도 선생님이 계시는 용인으로 찾아갈 마음이었는데 그래놓고도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말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요? 이제야 드리는 변명을 들어 주십시오.

선생님은 만나면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신다는 걸 알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높기만 해서 감히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저의 용렬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밤새웠던 젊은 시절이 없었다면 저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소설의 영광과 광휘를 작품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소설의 길로 달려가고 싶은 들끓는 의욕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흉내도 내지 못할 그 경지에 대한 절망으로 좌절하게 했습니다.

저는 의욕과 좌절을 되풀이해서 겪으며 소설을 썼습니다. 쓰다가 글의 길이 막히면 읽고, 읽다가 길이 보이면 다시 쓰고 하면서 작가가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저는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 멋대로 선생님을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나무라진 말아 주십시오.

제가 가는 길의 저만치 앞에 선생님이 먼저 걸어가신다는 생각을 하면 알 수 없는 자부심으로 흥이 나곤 했습니다. 때때로 선생님과 함께 소설가로 불리는 내가 송구스러우면서도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저희 소설가들을 자랑스럽게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과 삶에 대한 선생님의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에서도 많은 걸 배웠습니다. 불가능한 희망이지만, 선생님만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처럼 쓰고 선생님처럼 살면 된다고 주문을 외며 먼발치에서 바라보곤 했습니다.

글이 막히고 사람에게 절망하고 삶이 버거울 때, 캄캄한 밤길에 혼자 버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시대와 세태에 곁눈질하지 않고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의젓하게 걸어가신 선생님의 발자국을 찾았습니다. 뵙지 않아도 저는 늘 선생님과 함께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뵐 용기를 더디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용기를 내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마치 고아가 된 듯한 심정입니다. 선생님 떠나시기 전에 정말 술 한 잔 샀어야 했는데, 아니, 선생님께서 사는 술을 얻어먹으며 은근하고 다정한 육성을 더 들었어야 했는데, 술의 힘을 빌려 응석이라도 부렸어야 했는데, 고아가 된 지금에야 뒤늦게 한탄합니다.

지난 연말에 한나절을 고심한 끝에 제가 겨우 써 보낸 연하장의 문장은 단 한 줄, ‘선생님, 사랑합니다.’였습니다. 그 문장을 쓰는데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고 있던 사랑을 힘들게 고백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고 어쩐 일인지 눈물도 좀 나왔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왈칵 솟구치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그 말을 합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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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청준 그대 없는 밤길, 누가 위로합니까?

가신이의 발자취/
한겨레
» 소설가 이청준
“소설 몫은 외로운 영혼 위무” 숙제 기억합니다

미백 선생님,

선생님을 여읜 큰 슬픔을 그 어떤 필설이 있어 감히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망연자실, 우주의 리듬이 크게 요동치는 혼돈 속에서 그저 허허롭게 시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한평생 오로지 문학 외길에서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시고 세계문학사를 새롭게 열어 오신 선생님의 생을 반추하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소설 작업과 관련하여 선생님께서는 ‘밤길 독행자’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서운 산속 밤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좀 전에 당신 앞서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고 일러준다는 얘기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건 없었건 “그런 말로 상대방의 밤길에 위안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셨지요. 깨어진 영혼들을 위해 건네는 밤 산길 독행자의 위로의 말로 문학을 비유하셨는데요.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현실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위로의 말을 늘 새롭게 건네시는 데 평생 헌신하셨습니다.

자유와 억압, 용서와 복수, 이상과 현실,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개인의 진실과 집단적 꿈 사이에서 고뇌하면서 이를 종합하기 위한 선생님의 서사적 노력은 가히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맺힌 한들을 말로, 소리로, 풀어 한맺힌 영혼들을 위무하려 하셨던 선생님의 문학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학을 위한 헌가(獻歌)였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선생님께서 이루신 자리에 머물지 않고[成功而弗居], 부단히 열린 산문정신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려 하셨습니다. 독자들의 온갖 찬사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늘 당신 작품에 대해 부끄러워하시며 당신의 허물을 들추어내시려 하셨습니다. 20년 넘게 선생님을 뵈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진정한 대가, 가장 진실한 문학적 장인의 풍모는 언제나 감동적이었습니다.

 
» 우찬제/서강대 교수
그러시던 선생님께서 이제 영원한 안식의 문을 여셨습니다. 지난 4월22일부터 2박3일간 선생님 고향인 장흥으로 남도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었지요. 마지막으로 가까운 후배들과 고향에 가보고 싶다 하시면서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으셨습니다. 하지만 출발 전날 선생님의 병세가 좋지 않아 불가피하게 취소하게 되었지요. 그 와중에도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허물을 짓고 앉아 있게 됐는지, 용서를 빌 엄두조차 안 나네요. 천행을 얻어 남행길이 다시 허락되기를 빌어 볼 뿐. 이청준 합장.” 결국 천행을 얻지 못해 남행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영원한 남행길에 나서게 되었군요.

선생님께서는 1965년 등단작 <퇴원>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말의 꿈’을 꾸어 오셨습니다. 얼마 전 병실에서 선생님을 뵈었을 때, 결국 그게 마지막이 되었지만, 이제 퇴원하시면 다시 새로운 ‘퇴원’을 쓰실 수 있겠다고, 꼭 그러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께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새로운 퇴원기를 저희 몫으로 남겨두시고, 선생님께서는 인생이란 병원에서 퇴원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부끄러워하시지도 말고 그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학이 되셨으면 합니다. ‘선학동’에서 선생님께서 그토록 희구하셨던 선학들이 선생님 앞서 비상했습니다.




삼가 엎드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우찬제/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