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은혼식(결혼 25주년)을 맞이하여

2009.01.07 08:54

윤사무엘 조회 수:1363 추천:43





                                                  “로맨틱한 은혼 여행”

                                                  

                                                                     윤사무엘목사 (감람원교회)


 

 설날에 모처럼 온 가족이 모였다. 재작년 추수감사절에 모두 모인 이후 1년 40일 만이다. 멀리 떨어져 군대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하고 있는 아들이 거의 집에 오지 못하기 때문에 명절이라 해도 온 가족이 모이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몇 개월 후에나 가능할까? 나도 지난 성탄절에 미 서북부지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폭설을 만나 일주일간 고생하다가 기적적으로 성탄절 심야에 귀가했다. 성탄절을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한 터라 이번 설날은 더욱 축제 분위기다.


 성탄절 다음날 아침을 나누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철지난 질문을 해봤다. 우리 부부의 은혼식이 지나버렸는데 애들이 뒤늦게라도 어떤 잔치를 해주지 않을까? 은근히 자녀들의 효심을 테스트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봤다. 

 “얘들아, 엄마 아빠의 Silver Anniversary(은혼식)날자가 지나가 버렸는데 생각해 보니 멋진 기념하나 남기지 못했구나.”

아니나 다를까? 심청이 처럼 효심이 유별난 딸애가 미리 준비해놓은 제안을 했다. 

“엄마 아빠가 연애시절로 되돌아 갈수 있는 두 분만의 로맨틱한 여행을 한번 해 보세요”

 작년 24주년 기념일에는 고급식당에서 외식을 즐기시라고 자기들끼리 모금(?)을 해준 녀석들이다. 그런데 25주년 결혼기념일인 금년에는 반응이 없다. 그래서 반응을 유도해본 것이다. 역시 딸이 제일이야! 나는 내친김에 한술 더 떠봤다.

 “얘야,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게 로맨틱한 여행일 것 같니?”

 “아빠 입장에서가 아니라 엄마 입장에서 원하는 여행을 하면 돼요”

여성이 원하는 감미로운 시간을 가지도록 아빠가 연구해 보라는 말이다. 설날아침에 딸애가 애비에게 부과한 힘든 숙제였다. 힘들기는 하나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숙제인가? 자녀들에게는 교육이 되고 우리부부에게는 평생 감동으로 남을 깜짝이벤트를 준비해야지! 나는 연초부터 황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니 새벽 3시였다. 그래도 눈을 부치고 깨어 보니 아침 8시 반.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이는 시간은 오후 2시다. 마침 큰 조카 예리도 와 있고, 막내고모 애경과 두 조카 예지, 예림도 머물고 있고, 문목사님과 성도님 몇 분이 오셔서 우리 집 거실은 어느 해보다 설날 기분이 가득 넘쳐났다.


 만원손님이 대견해 보였던지, 주방에서는 요리 만드는 소리로 즐거웠다. TV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요리하는 성도님들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라도 된 듯 즐겁게 손을 놀렸다. 식당이건 명절이건 손님이 만원이라야 주방이 신난다. 나는 문목사님과 조용히 나가서 분홍색 장미 한 다발, 카드, 딸기와 Blue Berry 로 만든 cake, 25th Anniversary 풍선(silver color)을 미리 준비하여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 숨겨두고 새해 가정예배를 인도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나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가대를 지휘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다. 별명이 음대 안 나온 테너다. 애들도 모두 음악을 좋아하여 찬송은 저절로 가족성가대의 사중창이 됐다.

찬송 305장, 28장을 부른 후 교독문 시편1편, 성경 신명기 11:8-12을 읽고 축복의 가정의 다섯가지 특징을 설교 후 축도로 예배드리니 은혜와 축복이 넘쳤다. 예배 후에 세배. 그리고 덕담을 나눴다.


 내가 슬그머니 비밀장소에 숨겨놓은 장미와 풍선이 있는 선물꾸러미를 아내에게 전했다. 순간 터져 나오는 환호성 박수소리 자녀들, 조카들이 디카 카메라를 서로 찍으며 문목사님의 좋은 카메라 프래쉬 터지는 소리로 거실이 떠나갈 듯 했다.

“와! 우리 엄마가 아카데미주연여우상을 받는 배우처럼 멋져 보여요. 자, 수상소감 한마디”

아들 녀석이 능청을 떨면서 마이크대신 숟갈을 들이댔다. 그러자 아내는 선물 속에 끼어 있는 나의 축하카드를 읽어 내려갔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Martha, 부족하고 못난 나를 만나 함께 살았던 지난 25년간 수고가 많았소. 참으로 고마웠소. I love you forever. 당신의 Samuel."


 아내가 눈물을 흘리자 자녀들도 울고 조카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사랑에 약한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 했던가! 눈물에 약한 것이 남자의 마음이라 했던가! 아내는 눈물이 많다. 착하기 때문인 것 같다. 25 촛불을 끄고 케익을 잘라 함께 나누고 가족사진을 찍은 후 식탁에 앉았다.


선생님에게 알고 질문 하는 개구쟁이학생처럼 나는 능청을 떨었다.

 “여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과 로맨틱한 여행을 할 수 있소?”

 내가 분위기 없는 남자인건 사실이다. 학교 때부터 공부 외에는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어떻게 해야 여자가 행복을 느끼는지 잘 모른다. 살아가면서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자는 작은 일에 감동을 잘 받는다.”

“자기에게만 신경을 써주면 행복을 느낀다.”

“공주로 대우해주면 남자에게 쉽게 안긴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한번도 실천해 본적이 없다. 그러다 현숙한 여인을 만나 결혼했으니 더욱 모를 수밖에. 착한 아내이기에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했다. 그러면 나는 좋아하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딸애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오늘 듣고 싶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아내는 나에게 아예 그런 것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가 정식으로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을 안 할 수밖에 없고 또 자녀들에게도 아빠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라고 그러는지 입을 열었다.


 “첫째는 서둘지 말고 보다 여유 있고 느긋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부부간의 대화도 일방적이고 너무 빠르고 결정도 너무 빨리해요. 걸음걸이도 너무 빨라요. 체질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억세고 강하지요. 해서 부부가 함께 걸으려면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발걸음을 여자에게 맞출 줄 알아야지요. 성격도 너무 급해요. 안하무인으로 아무데나 큰소리를 치거나 야단치면 제아무리 현숙한 아내라도 스트레스를 받지요. 누가 있든지 관계없이 큰소리로 부르며, 분위기를 깨는 언행으로 아내의 속을 상하게 하지요. 로맨틱한 남자 아랑들롱 처럼 좀 여유 있게 여자에게 맞추는 스텝을 밟아보세요”


아내가 잠간 숨을 돌리자 자녀들이 재청이다.

“옳소! 그 점은 우리들도 동의합니다.”  

“둘째는 예고 없이 일을 벌리거나 준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강요하는 태도에 아내는 식상되게 마련이지요.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의논하고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아내의 발언수위가 점점 강경해져가는 것 같았다. 나는 유구무언으로 꼼짝없이 들을 수밖에.

 “셋째는 아무리 박식한 목사님이요 하늘같은 남편이지만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를 인정 할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는 자존심이 강해 속으로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고집을 내세울 때가 많아요. 가령 운전할 때 커브 길에서 속력을 더 줄이는 일과 상대방 운전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 등 운전 예절에 관해 지적할 때마다 당신은 이유를 붙이고 변명을 늘어놓곤 하지요. 할 말이 더 있지만 그만하겠어요.”


 나는 훈육선생님 앞에서 기압을 받는 불량학생처럼 기가 죽어버렸다. 그런데 할 말이 더 있는데 참고 있다가 훗날에 하겠다니? 매도 맞는 김에 한꺼번에 맞는 게 낫지? 두 번 고생할일이 뭐있나? 내가 자청하자 아내는 마지 못하는 듯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얼렁뚱땅 잘 넘어가려고 해요. 너무 순진해서 탈 이구요, 매사 좀 더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와! 우리엄마 일류 부흥강사야. 목사님 설교보다 더 좋은 말씀만 하시는 걸”

애들은 아멘, 할렐루야!를 만세삼창처럼 소리치면서 엄마응원이다. 나는 완전 항복 선언을 강요당한 셈이다.

 그래도 아내는 본인이 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게 몇 마디 말로 해결될 문제인가? 앞으로 25년을 더 살면서 고치고 연구하고 연습하고 다듬어야할 사랑의 연기인 것을!


 남들처럼 크루즈 여행이나 값비싼 다이어 반지를 아내에게 선물할 남편이 못된다. 방법이 있다면 아내를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부드러운 남편이 되는 길일뿐이리라. 천사와 같은 아내를 주신 주님께 항상 감사를 드린다. 그렇다면 나는 천군 같은 남편이 돼야지. 그러면 우리 집은 지상 천국이 될 테니까.


 신혼 초기에 나는 은혼식(Silver Anniversary)을 하는 선배 목사님 부부를 보고 아주 부러워했다.  나는 언제 저런 은혼식이 올까? 그런데 어느새 우리부부에게도 25주년이 되어 은혼식이 찾아온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신혼이전의 연애시절 같은데. 우리가 결혼한 후 어느새 사반세기가 흘러갔다. 잔 주름진 아내의 얼굴을 드려다 보니 격세지감에 젖는다.


 그래도 지나온 25년은 행복하고 감사했다. 자녀들을 보면 감격이다. 둘이 만나 네 명을 얻었으니 갑절성공이다. 장녀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해병대에 근무하면서 공부하는 맏아들은 장래 모슬렘선교사가 꿈이다. 올해 동남아로 1년간 선교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차녀는 대학생으로 차남은 중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보배는 값은 올라갈지 모르나 더 이상 자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애들은 쑥쑥 자라나는 보배들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면 우리부부는 손에 귀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귀부인들 복부인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


 나는 한국에서 신학대학 교수시절 결혼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대 제대 한 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배우자를 만날 것을 위해 기도했다. 한때 나는 바울처럼 위대한 신앙과 학문이 빛나는 독신주의자가 될까도 생각해봤었다. 그런데 캐톨릭의 신부가 아니라 기독교의 목사인 나로서는 독신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인식이 남아있었다. 북한에 결혼한 부인을 남겨두고 월남한 목사님 말고는 목회를 하려면 결혼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개의 교단에서는 결혼을 해야 목사안수를 주기도 했다. 


미국 유학을 앞두고 결혼을 꼭 하고 오라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또한 회갑을 몇 개월 남기신 아버님께서 맏며느리를 보시고 싶어 하시는 것을 알고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막상 사귀는 자매가 없었으나 몇 해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친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배우자를 찾았던 것이다. 그녀는 유치부 교사를 하면서 성가대를 봉사 하던 1년 후배 경임이었다. 당시 나는 지휘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뒷조사(?)를 해보니 다행히 그녀는 배우자로 정해진 남자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내가 담임목사님의 아들이라서 경임은 오빠처럼 나를 따랐다. 이성으로 느끼기 보다는 성도로 젊은 청년활동의 친구로 지내는 처지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방에서 결혼대상자로 만났다. 나는 그녀를 알고 나갔지만 그녀는 난줄 모르고 나왔다. 신랑감을 소개해 주겠다는 남자청년의 주선으로 나온 것이다. 그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반가워하는 눈빛이 역역해보였다.    


 결혼 대상자로 생각하면서 만나고 난후부터는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로 보였다.  

 물론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둘 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대화가 오갔다. 늦은 시간 청광아파트로 가기 위해 택시로도 에스코트 할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탔다. 공업 탑에서 내려 학성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약 120미터 걸어가는데 가로등이 없어서 캄캄했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미안해 할 것 같고 그냥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걸어가면서 이 길을 ‘하나로’(One Road) 라고 이름 짓자고 하니 그녀는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데 금방 아파트에 도착해 버렸다. 작별하고 오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순간이 로맨틱한 시간이었다.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그 후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고, 만날 때마다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을 나누고, 울기등대 숲에 가서 함께 찬송을 불렀다. 당시 나는 지휘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소프라노 리더였다. 호주머니에 있던 성경책을 꺼내 말씀을 묵상하곤 했다. 훗날 아내는 고백하기를 그때 데이트하는 기분 보다는 예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분위기 있는 커피숍이나 경양식집에 데리고 갈 줄로 기대를 했는데 말이다.


 삼일 후 그녀는 낡은 성탄카드 한 장을 내게 보여줬다. 그건 내가 대학 다닐 때 그녀에게 보낸 성탄절 카드였다. 몇 년이 지난 묵은 카드를 그리움처럼 간직하고 있다니...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내가 애독하던 책을 선물하면 그녀는 즐겨 읽던 책을 내게 주었다. 토요일 오후 다이아몬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환담을 나눈 후 바닷가를 걸어 횟집으로 갔다. 일산 해수욕장이었다. 횟집에서 회를 먹는데 그녀의 긴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문뜩 몇 해 전 나훈아가 이 해변에서 공연하면서 불렀던 “해변에 그 여인아”가 생각났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 여인의 눈동자 고요히...”

“나훈아가 부른 ‘해변의 그 여인’이 바로 당신이었소. 나는 평생 주의 일을 할 것인데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되어 주시겠소?”


 나는 참지 못하고 프로 포즈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말이 없었다. 긴장되는 순간이 숨이 막히도록 지루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려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니 수줍어하면서 고개를 끄떡거렸다. 3일만의 쾌거. 애정사의 세계 신기록일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이토록 아름답고 빨랐을 라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도 마주잡았다. 그리고 모래를 밟으면서 해변을 걸어갔다. 한 달 후 우리는 부부가 됐다. 부부가 된 후에도 손을 마주잡고 우리는 걸었다. 서울로 미국으로 뉴욕으로 뉴저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세계를 향하여 계속 걸었다. 25년을 걸어서 은혼식에 도달한 것이다.


 은혼식을 맞이하는 오늘 25년 전 우리의 만남을 기억해 보니 나도 로맨틱한 남자다. 결혼 25주년이 되는 금년에는 진짜 로맨틱한 여행을 떠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