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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기원에 대한 제이론 (인터넷 자료)

2008.07.11 03:51

윤사무엘 조회 수:1265 추천:70

이 글은 인터넷에서 퍼온 글임 

 

한글의 起源에 관한 諸理論


Ⅰ. 序 論


한글이 인류의 문자사상 그 유래가 없는, 과학적이면 체계적인 문자라는 사실은 한글이 창제 원리를 밝힌 책 『訓民正音』이 발견된 이래 점차 알려져 왔다. 그래서 이제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글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글이며, 우리 민족 문화 유산의 자랑거리“라며 한글을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학술지 <디스커버>도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알파벳이자 가장 과학적인 필기 시스템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訓民正音』에 기술된 한글이 제자 원리는 학자들의 의문을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못한 듯하다.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이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여러 학자들은 이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여러 가지 자기 나름대로의 설명을 해 왔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한자와는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기원이 어느 문자보다도 분명할 것 같은데, 실상은 원본이라고 할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문맥상 모호한 점 때문에 다양한 기원설이 나오고 있다.

현재로선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발음기관을 상형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는 것이 국어학계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각도에 의해서 한글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견해도 다양하다. 그래서 현재로선 어떠한 견해가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므로 한글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견해의 타당성을 제고해보는 정도로 이 글을 써나가고자 한다.


Ⅱ. 本 論


훈민정음 기원설은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이 어느 문자의 계통을 이어 받아서 창제되었는지를 밝혀 보려고 한 학설이나 설명을 뜻하고 또 훈민정음 제자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훈민정음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고전 기원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고전기원설


『세종실록』(권 102,42장)25년 12월 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몸소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본받았다“라고 하고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서문에서도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자 부제학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서도 “설혹 말하기를 비롯 옛 글자 전자를 모방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사옵니다“라고 했으니 이것 또한 중국의 옛 글자를 모방하였음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정시대 인물인 이덕무도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서 그의 『莊館全書』에서 구체적으로 훈민정음의 모양이 고전의 어떤 글자를 본받은 것인지를 예시하고 있다. “ㅅ“은 ‘ㅅ‘자 “ㄹ“은 ‘ㄹ‘자, “ㅂ“은 ‘ㅁ‘을 본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서문이나 세종실록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설명이 ‘ㅅ‘이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본받았다.

고 해서 바로 그것을 본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서문의 글의 뜻은 정음이 바로 고전 글자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라 꼴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상형한 것이 고전의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허웅(한글과 민족 문화, 1964)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字倣古篆이란 말의 뜻은 훈민정음의 글자체가 중국의 옛 글자인 ‘고전‘글자체와 비슷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2.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범자 기원설)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범자기원설)은 훈민정음이 범자의 글자체를 본받았다는 의견이다. 그 근거를 보면 성현(1439-1504)은 『용제총화』제 7권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 들에게 명령하여 언문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 졌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語音문자로써 표기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 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라고 하여 곧 글 자체를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최초로 말하였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나라 언어는 글자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篆倣梵字)라고 하여 역시 범자 기원설을 주장했다. 황윤석(1729-1791)의 『韻學本源』에도 “우리 훈민정음의 淵源은 대저 여기에 근본 하였으되, 결국 범자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1932년간)에서 언문 글자법이 원래 범자에 근원한 것임을 말

하고 범자와 언문글자의 꼴과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이기도 하였다.

인도는 4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그래서 인도문자는 종교와 관련이 되는데, 인도에서는 기원전 6~7세기에 이미 글자가 만들어졌다. 바로 이것이 산스크리트어이다.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은 훈민정음이 이 문자를 본떠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학설로, 이 에 따르면 훈민정음과 이 문자는 몇 개 자모가 비슷하다고 한다. 특히 브라미문자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역적으로 이렇게 떨어진 곳으로 어떻게 문자가 전파되게 되었을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그들에 의하면 불교 수도승인 순례자에 의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국은 불경에 기초하여 A. D. 10~11세기에 이 문자를 익혔을 것이라고 비디오에서는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와 인도가 교류된 시기는 『三國遺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三國遺事』에는 김해의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가 나오는데 그녀는 실존인물이다. 그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자신의 나라가 망하자 중국의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녀가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물고기 문자도 가져왔는데 인도에서도 이 물고기 문양이 보이고, 김수로 왕릉에도 물고기 문양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해 이들은 산스크리트어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 학설에 따른다면 과연 브라미어는 훈민정음 창제 전에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점이 여전히 발생하므로 이 주장 역시 논거가 불충분하다 생각된다.


3. 몽고 파스파문자 기원설(八思巴文字 起源說)


몽고문자를 본받았다는 설로, 이익 (1681-1763)은 『성호사설』제 16권 人事門 言文 條에서 “우리 나라의 언문 글자는 세종 28년 (병인년)에 지었다. ... 원나라 세조 때에 팔사파가 佛氏의 유교를 얻어 몽고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평, 상, 거, 입(平上去入)의 네 가지 음운으로써 舌,候,齒,牙,半脣, 反齒등 七音의 母子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 우리 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지을 때에는 궁중에 관서를 차리고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들에게 명령하여 撰定하게 하였다“고 박종국은 인용했다. 이 때에 명나라의 學士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왔는데 성삼문 들로 하여금 가서 묻게 하였으니 왕복이 무려 13차에 이르렀다는 것이나 추측하건대 이제 言文이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른데 황찬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라는 자문에 박은 이때는 원나라가 멸망한 지 겨우 79년이니 몽고의 문자가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며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아마도 이것인 몽고문자 밖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익의 설을 근거로 살피건대 ‘고려 충렬왕 때 공주(고려로 시

집 온 원나라 세조의 딸)가 조비의 총애를 투기하여 위굴문자로 편지를 써서 원나라로 보냈는데 <사기>에는 ‘위굴의 글자는 곧 回鶻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파스파의 전한 바에 이미 불교에 의거하여 몽고의 글자를 지어 원나라 시대에 통용했다고 했으니 공주가 사용한 글자는 이 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즉 이제 言文字의 꼴은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이른바 입성이 중국에는 없는데 다만 兒, 二 두 자가 있으며 簫, 爻, 尤 3韻 은 모두 한 자에 두 음이 되니 이는 이해할 도리가 없고 하면서 생각건대 五胡의 난리 후에 元魏를 거쳐 중국의 음이 북방의 음으로 모두 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의 습속의 潟에 흐린 음성이 많고 도성 가운데 반촌( 泮村 : 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동네를 일컫는 말 )이 또한 그러하며 북도의 백성이 제주로 옮겼으므로 그 음성이 북도와 비슷하니 이로써 증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서역의 문자는 음성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 없으나 屋,沃이하 入聲17韻밖에는 아마 별다른 음성이 없을 것이니, 황찬에게서 얻은 것이 이와 같은 類인 즉 이것이 파스파의 끼친 뜻임을 또 알 수 있다라고 하여 몽고 문자 기원설을 세웠다. 유희(1773-1837)는 <言文志>에서 “훈민정음 15初聲은 우리 나라 세종대왕이 사신에게 명하여 몽고 문자의 의하여 지은 것으로 명나라 학사인 황찬에게 질문하여 제작한 것이다.“ 라고 하고 또 같은 책 끝에서 “언문은 비록 몽고문자에서 기원하여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실로 세간에서 가장 정묘한 작품이다.“라고 하여 훈민정음의 몽고글자 기원설을 인정하고 있다.


4. 신대문자(神代文字 起源說)


神代문자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살펴보면 神代文字는 한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일본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문자를 말하는데 신대라고 하는 것은 제 4대 神武天皇이전을 ‘神의 代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세계문자 연구회에서 엮은 세계의 문화에서 말하고 있다. 일본의 신대문자가 전해져 온 시기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에도 말기의 일본국 학자였던 것인데 平田篤胤(1776-1843)은 神字日文傳(1819)에서 신대문자의 존재를 적극 주장했다.

일본의 神代文字(아히루문자)는 19세기초에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문자는 일본의 神社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데 일본인들은 오랜 옛날 신들이 쓰던 문자라고 여기고 있다.

일본의 사학자 吾鄕淸彦氏에 의하면 加臨土의 글 모양이 비슷한 소위 신대문자가 對馬島 및 그 외의 神社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에 한자가 들어가지 이전에 이 신대문자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본학자 鹿島昇씨는 가림토문자가 海南島의 설형문자(楔形文字) 및 오루메가의 神聖文字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日本九州地方에 A. D. 700~800년경에 존재하였다고 추정되는 아히루문자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神代文字라고 하고 神社의 이 문자 앞에서 절을 하고 복을 비는 풍습이 있다. 이 문자 체계를 보면 가림토문자와 비슷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배달말에서는 그가 수백년 간 내려오는 일본 무가정치를 못마땅히 여기고 일본 국민들에게 고전의 신비를 불어넣어 주기 위한 수단으로써 위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신대문자를 위작한 시기와 서적은 1811년부터 1819년 사이에 <古史微開題記> 4권을 집필할 때부터이었는데 이 서적은 춘, 하, 추, 동 4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신대문자는 춘 권에 신대문자의 論이라 하여 저술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쇼와 초기 일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이 이 신대문자 문제로 요란하다. 기존에는 문자 자체에만 한정되어진 채 문자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뿐이었으나 이제는 신대문자로써 쓰여진 무헌이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에 의하면 일본고대사가 파천황의 내용을 가지고 있고, 태고에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나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가 신대문자를 위작한 상기 책을 집필할 때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는 德川막부의 무가 정치가 흔들릴 무렵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구문화와 올란드 문화가 일본에 들어와서 難學이 정착하여 국학이 이에 배척하여 형성 발전하였다. 이 국학의 전통은 옛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는데서 시작되어 복고주의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平田은< 古史微開題記>라는 책을 펴냈는데 후에 이를 그의 문인들이 <日文傳>이란 이름으로 재판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인 日文傳에서 세종대왕이 신대문자를 토대로 해서 훌륭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平田은 <神字日文傳>에서 한국으로 전해져서 한국인들이 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서 金澤壓三郞(1872-1976)은 일본 문법론(1903)에서 신대문자는 한국의 한글을 일본에 가져와서 일부 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잇다. 신대문자의 예를 들면 어느 것이 어떤 것을 모방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전이 신대문자를 만들 때에 정자모양과 초서모양 두 가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신대문자를 행서로도 쓰고 종서로도 썼는데 행서보다는 종서로 썼을 때 더욱 한글과 닮았다. 도표의 위에 있는 것은 행서이고, 아래에 있는 것은 모음과 자음을 종서로 쓴 모양이다. 일본 오십음보에 보면 모음 ㅏ,ㅓ,ㅣ,ㅜ,ㅗ 등 다섯 개가 있고 자음 ㄱ,ㄷ,ㅁ,ㄷ,ㅿ,ㅇ,ㄴ,ㄷ,ㅅ,ㄱ 등 10개가 있어 25개 자모로 구성됐다. 자음 중에 ㄱ 과 ㄱ 이 다르고 , ㄷ 등이 서로 방향이 다르게 쓰인다.

ㅇ와 모음과의 결합에서 아, 어, 이로 되지만 ㅜ와 ㅗ는 나란히 놓아 ㅇ, ㅜ, ㅗ로 표기된다. 위의 신대문자를 일본인들이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좋은 문자를 계속 연구 개발해서 멋있는 문자로 개발시킬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 문자는 일본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나라 문자로 개발시킬 이유가 없었고 계속 사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5. 가림토문자 기원설 (加臨土文字起源說)]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의하면, 제3세 단군 가륵(嘉勒) 2년(단기 153년, B.C. 2181년)에 三郞 傳士 乙普勒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나라 正音 38字를 撰하여 이를 ‘加臨土’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가림토문자 중 28자는 그 자체와 모양이 근세조선 제4대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한 훈민정음 28자와 완전히 같고, 나머지 10자는 약간씩 변경을 가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28자는 이 가림토를 근거로 하여 창제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이 가림토를 근거로 하였다는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또 만약 그 당시부터 가림토문자를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여 왔다고 만다면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으로부터 한자가 전래되기 이전까지 2500여 년 동안은 물론 한자가 전래된 이후에 있어서도 상류계급은 한자를 사용하였을지 모르나, 민간사회에 있어서는 편리한 문자를 두고 구태여 어려운 한자를 사용했을 리가 없으며 적어도 일상생활에서는 가림토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문자가 전혀 발견된 사실이 없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4160여 년 전에 이와 같은 과학적인 문자가 과연 발명되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3세 단군 가륵 경자 2년(B.C. 1281) “시속(時俗)이 오히려 같지 아니하고, 方言이 서로 달랐다. 象形表意의 眞書가 있었으나 10家의 邑의 말이 대부분 통하지 아니하고, 100리의 국가가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때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正音 38자를 찬하니, 이를 加臨土라 하며…, 신축 3년(B.C. 2180) 신지(神誌) 고결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찬수하였다.”라는 인용에서 상형표의의 진서란 녹서, 우서, 용서, 화서를 가리키는 것이며, 가림토문자가 바로 신전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정연규가 언어로 풀어보는 한민족의 역사와 뿌리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림토’와 ‘훈민정음’의 관계이다. 과연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의 독창물인가, 아니면 가림토문자를 근거로 하여 개작한 것에 불과한가?

1984년 『廣場』126호에 송호수는 우리나라 한글을 ‘가림토문 38자에서 10자를 줄여 훈민정음 28자, 그리고 다시 4개를 줄여 지금 쓰여지고 있는 한글 24자가 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1984년 『廣場』126호 2월호에 이관수는 반론으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전에는 한글과 같은 글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숭호수의 가림토문 글자를 부정하였다.

정연규는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에서 가림토문자의 자음, 모음과 훈민정음을 비교했는데, 그는 가림토정음의 모음체계와 훈민정음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음은 ㄱ, ㄴ, ㄹ, ㅁ, ㅇ, ㅈ, ㅿ 등의 음성표기체가 같으니 1911년 桂延壽가 桓檀古記를 쓰면서 가림토문자를 거짓으로 史實을 펴냈느냐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가림토 정음 38자 자체는 훈민정음 28자의 것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加臨土文字를 보면 모음글자가 11개, 자음글자가 27개로 모두 38개 자모로 되어 있다. 숫자표시는 고대중국의 갑골문 등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보이며, 자모 등은 신지비사에서 ㄹ자 등이 같은 음가인지는 모르지만 모양은 거의 같다고 조두상은 문자학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림토 정음 28자가 훈민정음 28자의 이전에 존재했다면, 그것으로 표기된 기록물이 단 한 편이라도 있어야 하나 단 한 줄이 문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글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지식계층이나 상류계층은 한글을 생활 문자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가림토문자와 훈민정음 사이에는 상호 연관성이 먼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 가림토문자가 『桓檀古記』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이 『桓檀古記』는 끊임없는 위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에 그 연대와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헌의 내용에는 고조선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우리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큰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위서라 하고 넘어가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이번에 보았던 비디오에서도 『桓檀古記』에 나타나는 천문현상의 기록을 현대 시뮬레이션을 통해 살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거의 일치를 하였다. 이 천문현상 기록은 중국보다 100여년 이나 앞선 것으로 이 문헌이 위서가 아닐지 모른다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글과 가림토문자의 관계를 밝히면 고조선의 역사를 실제로 밝혀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문헌이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는 우리민족의 기원이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훈민정음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를 넘어 우리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이 문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연구가 이루어져야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6. 히브리문자 기원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학설들과는 달리 훈민정음이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견해는 조금 이채로운 것 같다. 우리 나라와는 지역적으로 상당히 떨어져있는 유태인이라니. 아무튼 아래에 나오는 가설은 조철주 박사가 신동아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따로 밝히는 것으로 하겠다.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주장하는 조철주 박사는 유태인들이 머나먼 중국에서 살게 된 경위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세계로 떠돌게 된 유태인 가운데 일부가 중국에 들어와 동서를 중개하는 무역업을 했는데, 그들의 문헌에 ‘천축에서 왔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인도를 경유해 중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중국유태인은 양자강 중류지방 등에 정착촌을 이루고 살면서 11~16세기까지 번성했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 한문 석비를 자세히 보면 성자(聖者), 오행(五行), 12지간(支干) 등 우리에게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데, 특히 그들의 기도문에 『창조서』가 언급된 것이 히브리문자 기원설의 단서가 되었다고 말했다.

『창조서』는 유태교 신비주의 경전인 『카빌라』를 성립시킨 것으로, 히브리어 자음 22개를 5음체계로 해석한 음운서이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의 음운체계가 중국음운학의 영향을 받아 창제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5음체계의 순서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중국유태인이 보던 『창조서』와 훈민정음의 5음체계 순서가 동일하므로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단군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가림토문자가 중국유태인이 사용한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고 또한 주장했는데, 가림토문자가 기록된 『단군세기』는 고려말에 편찬된 책이다. 고려 말은 원나라의 지배 아래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공유문자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중국유태인이 쓰던 히브리문자를 차용해 만든 가림토문자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가림토문자를 모방한 훈민정음이 히브리문자와 비슷한 것이다고 그는 말한다.

단군과 무관한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차용할 만한 근거에 대해서는 중국유태인의 문화와 종교가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중국유태인은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며, 민족의 시조를 하늘과 연관시키고 있고, 또한 이스라엘의 유태교와 달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히브리문자를 우리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설사 발음기관 상형설을 인정한다 하더라고 ㄱ, ㄴ 이외의 자음문자, 예를 들어 ㄹ이나 ㅅ 등은 조음기관을 상형했다고 보기 어렵다. 天地人을 본떴다는 모음자도 히브리문자의 모음부호와 매우 비슷하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보이는 문자 발음의 설명은 새로 만든 문자의 음가를 고정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문자의 발음을 조음 기관으로 설명한 것은 문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발상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헌에 히브리어 문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고려 말의 문헌과 조선 초기의 실록 등을 다시 한 번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문헌은 모두 한문으로 표기됐기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위작 여부로 논란이 되었던 일본의 아비류문자(神代文字)의 아비류도 히브리를 뜻하는 ‘이브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거센 반대 때문에 히브리문자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古篆’을 모방했다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했는데도 최만리 등 일부 유학자들이 강한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보아 차마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계기로 본 훈민정음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우선 한글과는 인연이 전혀 없어 보이는 히브리문자를 훈민정음의 모델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히브리문자는 페니키아문자에 기원을 둔 문자로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다. 조철주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히브리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인정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47대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는 역사학계에서 위작의 여부로 논란을 빚은 책이다. 가림토문자 역시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 후대에 만들어진 한글의 변체(變體)로 보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에 의하면 가림토문자는 3대 단군시대(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0에 만들어진 문자로 훈민정음의 기원이 됐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철주 박사는 가림토문자가 훈민정음의 모델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가림토문자의 창제연대는 고려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원나라 지배하에 있던 고려말 민족의식의 발흥으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중국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가림토문자를 만들어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훈민정음의 음운체계와 히브리 음운학의 관계를 설정한 점이다. 조철주 박사는 중국유태인의 음운서였던 『창조서』와 훈민정음의 5음체계 순서가 같은 점을 들어 히브리 음운학의 영향을 주장했다. 그간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는 전적으로 중국 성운학을 원용한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므로 조철주 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세종대왕의 친제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국어학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박사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국어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자를 믿고 싶다.


7. 그밖의 기원설


위에서 살펴본 것들 외에 한글의 기원을 설명하는 학설에는 서장(西藏)글자에서 왔다는 서장문자 기원설, 팔리(Pali)글자를 본받았을 것이라는 팔리문자 기원설, 창호의 무늬를 보고 만들었다는 창호상형(窓戶象形) 기원설, 태극사상(太極思想) 기원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Ⅲ. 結 論


지금까지 위에서는 한글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학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기원설, 범자기원설, 파스파문자 기원설, 신대문자 기원설, 가림토문자 기원설, 히브리문자 기원설,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 학설이 전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어려웠고, 한글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그들 모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어떤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하는 실망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훈민정음의 기원을 밝히는데는 무엇보다도 해례의 설명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세종의 언어정책의 방향이나 그 성립과정에 대한 깊은 연구의 토대에서 이 기원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한글이 기원이 언어정책의 방향에서 보면 어느 한가지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즉 주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언어의 자료나 당시의 상황 등을 서로 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