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참 부모 되기-parenting

2008.05.05 09:26

김성찬 조회 수:574 추천:43

참  부모 되기- parenting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 지존파를 기억하십니까?

지존파 6명 전격 死刑 구형

그 가을,  100호 활자로 때려 박아 시커먼 먹물된, 신문 지면이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결코 속죄할 한치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사법부의 다부진 결의 표명인 집중심리제로 지존파 일당은, 신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세상 밖으로 축출되어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언젠가 기억조차도 아스라한, 17명씩이나 죽인 김대두. 그에게도 속죄할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 줬다는데 말입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김대두가 옥중 전도자가 되어 숱한 이들에게 영적 감화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명의 변화된 사형수는 100명의 목사보다 더 낫다”라는. 행여, 그들 중 하나라도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될 시간과 여유를 우리 모두가 넓은 아량으로 베풀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이런 상념으로 가득한 가을밤입니다.

“아니, 김목사 당신 지금 무슨 헛소리하고 있는 거요?!” 이렇게 역정을 내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본때를 보여 줘야지, 죽일 놈들은 죽여야 해! 일벌백계라는 말도 몰라!!”

 


못 죽여서 한이 된 엄마

 

지존파 그 애들은 한결 같이 가정이 없던 녀석들이었습니다. ‘못 죽여서 한이 된 엄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일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땅의 부모와 가정에 대해 염려해 마지않았던 것입니다. 가정이 없습니다. 엄마가 있긴 있는데, 가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박한상 군 사건에서도 우리는 부모는 있는데 부모가 없는, 분명 가정이 있는데 가정이 없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 됨’에 대한 새론 이해나 자기 반성을 서로가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패륜적 사건과 발언들이 결코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부모 되기(parenting)

 

데이비드 스튜워드(David S. Steward)는 “교사로서의 부모”(Parents as Teachers)라는 논문에서 ‘부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부모란 단지 생리적 혹은 생산적 관계로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부모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인격적 상호작용 안에서만 참부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참부모되는 일을 부모의 부모화(parenting)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모(parenthood)는 부모화의 책임과 과정을 동반해야 하는 새로운 의미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머니란 양육과 돌봄이라는 어머니 됨(mothering one)을 의미하며, 아버지란 가정의 구조와 결정을 책임지는 아버지 됨(fathering one)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서 부모의 부모화(교사됨)를 위해서 부모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스튜워드는 다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부모의 부모 되기란 자기 자녀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아는 일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능력과 자녀의 능력은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목표와 부모의 목표가 다를 수 있습니다. 명문대 출신 부모의 자녀들일지라도 그 자녀는 상급학교에 진학조차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시에 실패한 이를 부모로 둔 자녀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못다 이룬 한을 자녀를 통해 무리하게 이루려 할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부모와 자녀간의 이런 능력이나 목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나 지나친 욕심이 너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기 자녀를 남의 자식 바라보듯, 객관적이고 냉정한 안목으로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부모 됨의 올바른 역할을 행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부모는 자기 자녀의 능력 이해와 동시에 그 능력이 성장하고 또 발달하도록 돕는 환경과 분위기 조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경과 분위기 조성이라는 말은 스튜워드의 학문적 스승이 되는, 호레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분위기 조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호레스 부쉬넬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분위기란, 부모가 자기 자녀를 교인(敎人)이 되도록 강요하거나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 자신이 먼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앙의 생활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인 부모에 의해 실현되는 사랑, 부드러움,참음과 인내, 신적인 성실성이 산 교육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쉬넬은  이러한 교육 방법을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기독교화(基督敎化)의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배움(learning)은 암기나 모방, 강제에 의해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는데서’,‘음성을 듣는데서’,‘움직임 가운데서’ 아이들의 눈은 의미 있는 인상을 얻게 되며 이를 통해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학습은 “어머니의 말이 아니라,어머니의 인내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분위기”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말로는 성실 하라고 말하면서,행동은 불성실한 부모에게서 그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부모  

 

이는 비단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넓은 의미에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에 동의한다면, 교회 학교 교사는 이 ‘교회 가정’의 ‘영적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가정’의 영적 건강은 ‘영적 부모’ 되는 교사들의 해박한 지성과 진실한 신앙고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결석해서는 안된다고 소리 질러 대면서, 교사 자신은 무단 결석을 밥먹듯이 하는데 에는 결코 신실한 생명이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작은 잘못에는 신속하고, 추상같은 징벌을 가차없이 행하면서도, 자신의 큰 잘못은 적당히 넘겨 버리는 이중 윤리로는 결코 건전한 가정, 교회,사회를 이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화사한 가정의 달, 건강한 가정,교회,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는 신앙인인 우리 자신의 참된 신앙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염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0 내가 머문 곳 북버지니아 [403] file 오해춘 2008.05.17 42562
109 가장 무서운 놈 [1] 강목사 2008.05.11 824
108 나의 부끄러운 죄 [1] 김세진 2008.05.10 514
107 말씀으로 살기 [1] 박원석 2008.05.09 718
106 목사가 겪는 고질병 [3] 김세진 2008.05.05 765
» 참 부모 되기-parenting 김성찬 2008.05.05 574
104 '어린이의 이해’ -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김성찬 2008.05.04 776
103 떨어지는 꽃 [1] 박원석 2008.04.26 640
102 등산 [2] 박원석 2008.04.23 710
101 땡땡이치는 한인학생 [2] 사랑나눔 2008.04.14 548
100 사고 잦은 길에서 [1] 박원석 2008.04.12 723
99 성지컬럼-에베소에서-헛되지 않는 수고 김성찬 2008.04.10 791
98 그리스 성지순례기(7)-데살로니끼를 거쳐 까발라까지 윤사무엘 2008.04.10 758
97 그리스 성지순례기(6)-고린도, 아테네(아띠나)에서 윤사무엘 2008.04.10 803
96 밧모섬 성지순례기(5)-에베소에서 밧모섬으로- 윤사무엘 2008.04.10 520
95 터키 성지순례기(4)-에베소에서 윤사무엘 2008.04.10 665
94 터키 성지순례기(3)-라오디게아에서 서머나까지 [5] 윤사무엘 2008.04.10 3630
93 터키 성지순례기(2)-이스탄불에서 갑바도기아지역으로 윤사무엘 2008.04.10 816
92 터키 성지순례기(1)-암스테르담에서 이스탄불 윤사무엘 2008.04.10 949
91 난 베데스다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 김성찬 2008.04.08 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