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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방법

2007.11.17 04:04

윤사무엘 조회 수:1483 추천:36

“서로 사랑하는 방법”

큰 아이 생일이 다가온다. 이번 생일 선물로 family dinner (생일날 저녁식사 함께 함) 시간에 큰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을 생각나는대로 들려 주려고 한다. 어제 가정예배 후 가족들에게 어제가 무슨 날인지 아느냐 묻고는 아내에게 우리가 처음 데이트한지 24년 되는 해라고 알려주었더니 아내가 놀랐다.

1983년 10월 26일 수요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야음 삼거리에 있는 서울다방에 성환이와 함께 들어가니 당시 청년회 후배인 경임 선생이 깜짝 놀라며 매우 반가워 했다. 이해 여름에 나는 미국 유학가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할 것을 결심하였다. 동생 희석에게 우리교회 청년회 가운데 한 자매를 형수로 지정한다면 누구를 원하느냐 물으니 놀랍게도 내 생각과 같았다. 그리고 9월이 시작되는 토요일 9월 3일에 우리 교회 출신끼리 혼인예식이 있어 모든 청년들이 축하하며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하며 은근히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몇 달간 곰곰이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드디어 내 생각을 친구 정경택 전도사에게 전하고 경임 주변에 정해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고, 아직 없음을 확인하고 최근 시내 모처에서 선을 보는 것을 정전도사가 보았음을 듣고는 용기를 내었다. 성환에게 부탁하여 내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니, 드디어 10월 23일 주일 예배 후 성환이가 경임에게 ‘좋은 사람 소개 시켜 줄 터이니 이번 주 수요일 저녁예배 후 서울다방에서 기다리라’고 전했다.

그래서 만난 우리는 성환이가 먼저 자리를 비켜 주었고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처럼 데이트 체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집까지 escort를 하는데 공업탑까지 버스로 타고 가서 청광아파트가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 뒤에 있어서 공업탑에서 적어도 7-10분간 걸어가야 하는데 밤에는 어둡기에 무섭고 위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버스에 내려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로’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길로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의 길로 걸어오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 진리, 생명이 되셔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지금까지 온 길이 자녀 4명과 23년 반의 미국생활, 그리고 24년간 목회의 길, 학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수요일 우리가 만나서 그런지 미리암은 11월 8일 목요일 출생이고, 미셀은 12월 20일 수요일 생이고, 요셉과 요한은 둘 다 토요일에 출생했다. 이런 이야기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더니 모두 행복해 한다. 이렇게 첫 번 데이트 일자, 내가 결혼하자고 propose 한 날자와 추억들, 그리고 중요한 순간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을 아내는 무척 고마워하고 행복해 한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가훈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정하고 실천사항으로 “서로 사랑하자”로 정했다. 아이들에게 가정예배 시간마다 이를 상기시키고 서로 싸우거나 다툴 때에도 이 사항을 기억시켰다. 다음은 미주교계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이 내용은 지난 로턴 장로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두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공관복음에서는 종말에 관한 교훈(마 24-25장)을, 요한복음에서는 다락방 강화(Discourse on the upper room, 요 13-17장)이다. 다락방 강화는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시작한다.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행동과 실천으로 본을 보이셨다. 이곳에는 몇 시간 후 배반할 가룟 유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He loved them unto the end. 요 13:1) 본래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인데,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4)고 하신다.
당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하며 논쟁을 하면서 이곳 예루살렘까지 왔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을 다스리려는 자는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본을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주신 새 계명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고 하셨다. 서로 발을 씻긴다는 말에서 봉사라는 diakonia 란 단어가 나오며 여기서 집사라는 deacon 이라는 말이 나온다. 제직의 사명은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서로 용서해 주고 서로 깨끗이 해주며 서로 섬기는 정신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에베소에서 100세가 되도록 신학도들에게 이를 가르치고 실천하였단다. 심지어 그가 걸을 힘조차 없을 때 침상에 누워 들것이 들려 다니면서도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 자신은 젊었을 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주먹세계에서 놀던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 것인가?
(1)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자.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며 용서하고 형제와 화목하기를 먼저하고 진실된 사랑을 생활에 옮기자. 서로 발을 씻겨주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자.
(2) 고전 13장 4-7절의 사랑을 실천하자. 여기서 사랑이란 단어대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대신 읽어 보자. 그리고 나를 대입해서 읽으면서 의문문으로 읽으면서 반성하자. 즉 “나는 오래 참는가, 나는 온유한가. 시기하는가. 자랑하기 좋아하는가, 교만한가, 무례히 행하는가, 내 유익만 구하는가, 성내는가, 악한 것을 생각하는가, 불의를 좋아하는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가, 모든 것을 참는가, 모든 것을 믿는가, 모든 것을 바라는가, 모든 것을 견디는가?”  여기서 사랑의 속성으로 인내를 세 번 강조하고 있다(4, 7절)
(3) 엘리히 프롬의 <사랑의 예술 The Art of Loving>에서 말하는 사랑의 다섯가지 속성을 실천하자. 관심을 가지는 것(concern, care, 무관심은 사랑의 적이다), 이해하는 것(understand, 밑에 서다는 말그대로 상대방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됨), 존중하는 것(respect, 상대방의 의견, 생활방식, 경험과 환경을 받아들임), 서로 책임을 지는 것(내 탓이요 하지 당신 탓으로 돌리지 말자), 그리고 받고자 하는 태도보다는 주려는 것에 더 열심을 내는 희생(not take, but give)이다.
(4) 게리 채프만의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들 The Five Love Languages>에서 지적한 사랑의 순위를 서로 파악하여 상대방을 행복해 하며 감정의 탱크를 채워주도록 하자.
사랑은 함께 있어 가장 좋은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quality of time), 서로의 수고와 가진 것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words of affirmation), 서로 봉사를 하는 것 (acts of service),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는 선물주기(receiving gifts), 상대방이 원하면 충분히 안아주고 눈과 눈을 마주보며 대화를 하고 악수를 하는 것(physical touch). 이 다섯가지 사랑의 액센트(primary accent)가 사람마다 틀리니 서로 확인하여 그 사람의 코드에 맞게 사랑을 해 주어라는 것이다. 부부관계, 자녀관계, 목회자와 성도관계,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관계, 청소년관계 등 다양하게 적응할 수 있다.
(5)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믿어주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다. 황금률에 있는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이다(마 7:12). 내가 먼저 이해하고, 먼저 용서하며, 먼저 희생하고, 먼저 믿어주고,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6)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언행을 삼가며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자.
(7) 배우자의 생일, 결혼 기념일, 처음 데이트한 날을 기억하며 선물이나 추억하는 일과 성도의 이름, 기도제목, 자녀들의 이름 등을 기억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윤사무엘 목사 (미국 뉴저지 감람산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