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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래선교사(러시아)

2008.11.29 08:34

윤사무엘 조회 수:1179 추천:45

옛 소련 땅 러시아에서 1만명 전도의 꿈을 이루다

선교지 주소: 모스크바시 울리짜 샤리꼬보드쉬쁘니꼬브스까야 돔 34
     Russia 115088  Moscow, Sharikopodshipnikovskaya, Dom 34

이흥래 선교사는 1941년 전남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에서 머슴을 부리는 중농집안의 맏이로 태어났다.  소와 함께 일하는 평범한 시골 농사꾼의 아들로 성장했다. 그는 부모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이어받았다.
성수주일을 하였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2학년 1학기때 순천중앙교회(김순배 목사)에서 박용묵 목사님의 부흥집회시 하나님 앞에 1만 명 전도하겠다고 서약하였다.

강사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 주신 후 그는 2학년 2학기부터 여천군 율촌면 가장리 평촌교회(100여명 성도)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매주 한 차례 전교인의 집을 순회하는 심방은 40여리 걷는 힘든 일이었지만 보람도 많았다.  
1년 6개월간 목회하던 중 3학년때 배우자 이시청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존경하는 인휴(Hugh MacIntyre Linton) 선교사를 따라 거문도에 들어가 선교사와 함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심방하는 일을 하였다.
덕촌, 장촌교회(지금은 서도교회) 목회를 하였다.  전도가 잘 되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좌절했다.  인휴선교사님이 방문하여 가가호호 전도를 시작했다. 선교사가 먼저 어른 댁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큰절하고 예를 갖추며 정중하게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열심히 전도한 덕분에 교회가 부흥되었다. 두 따님을 얻게 되었다.  

3년 목회후 1964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미7사단과 한국군 27사단에서 하였다. 3년 복무후 1967년에 제대하였다.
군 생활 속에서 독서를 열심히 했다. 세계2차대전사, 에세이집, 신동아, 위인전, 삼국지 등, 그의 역사관은 넓어져갔고 인생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경제나 경영, 세일즈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40세까지의 성공비결>이란 책을 읽고 1만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우선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로 배치되는 신병들을 개인 면담하여 오기 전의 직업과 전공을 묻고 장사하는 방법이나 사업에 대한 이야기, 인간관계에 대해 노하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천통의 편지를 통해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24일 제대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개업 예정을 알리는 편지를 발송했다.  함께 입대하여 제대한 군 동기생들과 예비사단의 전우들의 주소를 받아 부지런히 인간관계를 맺었다.

스테인그릇(stainless)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녹이 슬지 않고 가벼운 이 그릇은 당시 가정의 놋그릇의 단점을 혁신하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군생활 중 많은 독서를 통해 이 사업을 고안한 것이다. 제대후 3일만에 순천 북부시장에그릇상회를 개업하였다.
개업식에는 군대생활하면서 보낸 1만 통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축하객이 되어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준비해 두었던 그릇은 모두 동이 났고 개업은 대 성공이었다.
그릇 공장을 운영했다. 군 동기생들의 협조로 그들 마을에 생활이 어려운 아주머니들을 소개받아 놋그릇을 스테인리스 그릇과 바꾸어주는 방법으로 그릇을 팔게 하고 그 놋그릇은 다시 되파는 방법으로 더블 장사를 했다.

그의 스테인리스 그릇은 호남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어졌다.  부인은 포목점을 했는데 장사가 잘 되었다. 외상값은 다 받지 못하고 탕감해 주었지만 그것이 나중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되어 돌아왔다.
돈은 잃어버려도 되나 사람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 였다.  
탕감받은 사람들이 고마워서 손님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장사가 더욱 활발했다.
이분들이 훗날 여러 교회의 권사님, 장로님들이 되어 러시아에 선교하러 올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1만명 전도에 대한 꿈이 여전히 있어 늘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다.  본래 그릇 공장을 시작할 때는 판매원들을 전도특공대로 삼고 지역교회를 거점으로 1만명 전도를 효율적으로달성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 판매원들에게 세일즈 교육과 함께 전도훈련을 병행했었다. 그런데 이들이 돈맛을 알고 나서는 전도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돈 버는 일은 주로 동생들에게 맡기고 수요일, 주말에는 온전히 전도하는데 헌신하기 시작했다.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영화를 상영해 주는 영화 전도였다.
‘이 사람을 보라’ ‘낮은 데로 임하소서’(맹인목사 안요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주기철 목사 일대기) 등. 영사기가 한대 밖에 없어서 갈아끼우는 사이(5-7분)에 간증 반 설교 반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구수한 남도 사투리는 듣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하였고 영화의 감동과 더불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영화 상영 뒤에는 영접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농번기 때에는 인원동원이 힘들었고, 텔레비전이 점차 보급됨에 따라 안방극장 시대가 열리니 순회 영화 전도는 시들해져 갔다.

그는 9년간 결신시킨 이들은 1만명이 넘어섰다. 문제는 이들 중 과연 몇 명이나 계속 교회생활을 하는가가 문제였다. 이 일을 통해 조직력과 행정 능력을 얻게 되었다.
마침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단기과 4기생을 모집하여 목회에만 전념하다가 목사 안수 받을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구제받게 되었다. 사업을 계속 하면서 서울로 왕래하면서 신학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977년 7월 6일 졸업 후 사업 때문에 7년 후 1984년 목사고시에 합격하였다.

300-4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청빙 제의가  있었으나 39일 금식기도한 후 나보다 훌륭한 선배나 후배나 동창생들이 많은데 내가 그 교회 가면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실 것 아니겠는가 생각하고 장로로 선교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한 교회 목회자로서 1만 명 전도가 가능하다고 생각지 아니했다.
그는 재력으로 노회 일을 적극 도왔다.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가 열리면 각지에서 몰려드는 교사들의 교통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1991년 부인 이시청 권사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흥래 장로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전도하고 신학 공부하는 동안 묵묵히 다섯 딸을 양육하며 비단 장사로 돈을 벌어 어려운 이웃과 교회들을 도왔던 부인의 와병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권사의 은혜받은 이들의 병문안이 이어졌고 이들의 기도가 있었다.  한편 이를 비방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우선 그가 잘 나가는 것을 시샘하는 무리들이었다.
그 동안 어려운 목회자들의 생계비를 지원하던 일도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원망을 듣게 시작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했다가 욕을 듣게 되었다.

국내의 시련은 세계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친구 서성주 목사는 이란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로 방파선교회에 가담하였다. 이것이 해외 선교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6년 뒤 러시아 선교의 길이 열렸다. 1990년 순천세광교회의 손세진 목사님과 장로 10명이 미국을 방문하는 일에 동참하여 미국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의 영어실력과 달러 가치가 너무 높아서 선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미국은 이미 선교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인데 선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세계 중심이 될만한 곳에서 선교의 장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소련의 붕괴 이후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러시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 공산국가여서 꺼림직했으나, 이란 선교사로 가 있던 서성주 목사가 6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1991에 귀국하였다. 새 선교 일터를 원하는 그에게 러시아 선교를 권했다.
이를 위해 24명의 기도 동지들과 함께 1991년 8월 9일 ‘러시아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곽연주 목사, 총무에 이흥래장로, 서기에 김동운 목사가 선임되고 러시아를 향한 선교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991년 9월 서성주 선교사는 포항동부교회(리홍규목사)의 후원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선교사 자격으로 러시아에 파송되었다. 그는 러시아 선교회 회원들에게 보고하며 카자흐스탄의 침켄트에 선교지를 잡으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러시아 선교회에서는 이흥래 장로를 서성주 선교사와 함께 선교지를 탐방시키기로 했다. 1991년 12월 2일 카자흐스탄에 들어갔다. 당시 나이 51세 였다. 모슬렘 지역이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뛰었다. 교회는 고려인과 러시아인 위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두 달동안 이 곳을 살펴보았으나, 러시아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교육시키고 목회자로 길러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92년 2월 20일 서성주선교사와 함께 모스크바에 들어와서 선교사와 합의하여 이흥래 장로는 모스크바에 남고 서 선교사는 침켄트로 돌아갔다.  러시아 선교회는 이흥래 장로를 후원하여 러시아 선교지를 모스크바로 결정하였다.
여기는 이미 합동측 선교사인 허충강 목사가 계셨다. 그분은 1991년 9월 서성주 선교사와 함께 모스크바에 들어왔던 분이었다.

회색빛의 겨울도시 모스크바는 너무나 이미지가 강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 곳곳에 걸려 있는 붉은 깃발, 누구 하나 이방인들을 간섭하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고려인 교포들을 잘 활용하여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이 들었다. 이에 서성주 선교사는 3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자주 와서 신학교를 설립하는데 적극 도왔다.

러시아 선교회 서기 김동운 목사(순천성광교회)가 러시아인에의한 러시아 선교의 학문적 이론을 정리해서 논문집으로 발표하였다.
그분의 학문적 뒷받침으로 10년 안에 100교회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연단받은 목회생활과  군생활과 사업, 영화 전도 등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1992년 9월 10일 공식적으로 쁘라우다, 엠까, 이즈베스찌야 등 모스크바 신문에 학생모집 광고를 내고 포스터를 제작하여 홍보하였다.
그 결과 대학을 졸업한 학생 14명을 찾아 신입생으로 선발하였다.

1993년 1월 14일 드디어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교의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입학식에 통합 총무 주계명 목사, 세계선교부 부장 남정규 목사, 총무 임순삼 목사, 인선위원장 한태철 목사, 기독공보 편집부 차장 안홍철 기자, 포항동부교회 리홍규목사, 김덕진장로, 이춘술장로, 이일우장로, 전북 남장로회 사업회 정복량목사, 서울 지구후원회 대표 계준혁 장로, 이종명 장로, 김범열장로, 황연식 장로, 나정욱 목사 등이 참석했다.  
막대한 재정은 이 장로의 사재를 털고 동생들에게 도움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1993년 12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을 정식으로 인가 받아 설립하였다.
1994년 7월 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파송하고 남선교회전국연합회가 후원한 선교사로 현재 신학대학 이사장으로 있다.
108개 교회를 개척하고 앞으로 선교종합병원 설립과 1000명의 교인이 예배 드리는 교회부흥을 위해 계속 힘쓰고 있다.

2006년 6월에 심장마비로 사경을 헤매다가 생멍 잃기 직전까지 경험했다. 과로가 원인이라고 한다. 자꾸 맥박이 끊어지고 숨이 차곤 했다.
장기간 비행을 할 수 없어 1915년생 생모를 만나 뵈러 갈 수 없다.  
사모 이시청권사도 병환 중에 있으며 따님 이은선 교수(음대)도 허리통증으로 치료 중에 있다.

사위 송대진 과장(기독의료원 보철전문의)과 양성열 과장(러시아 선교회 총무과장)도 남선교회 선교사로 임명, 파송 받았다.
현재 250명 신학교 졸업생, 80여명 목회자, 108개 교회 개척하였다.
재정난이 계속 기도제목이다.

이흥래 선교사의 선교하는 자세는 다음 글에 잘 나온다(이흥래선교사와의 인터뷰, 2006. 12. 15)
첫째로 소를 모는 자세로 선교합니다. 어렸을 때 소 꼴을 먹일 때 물고가다가 개울이 나타나면 앞에서 끌면 절대로 개울을 건널 수 없습니다. 뒤에서 천천히  이랴이랴 하다가 힘껏 엉덩이 부분을 치면 개울을 훌쩍 뛰어 넘습니다. 또한 언덕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덕이 높아 못 넘을 것 같아도 뒤에서 몰면 훌쩍 뛰어 올라갑니다.
앞에서 아무리 끌어도 코에서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끌어어 안 따라 옵니다. 이렇듯 선교도 뒤에서 밀어 주는 방법으로 합니다

둘째로 보리밭에서 얻은 교훈을 따라 선교합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서 보리밭에 소변을 보고 학교에 갔습니다. 거름을 준다고 생각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자리에 계속 소변을 봤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과 관심으로 거름을 제일 많이 준 보리가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
또 작은 보릴 골라서 쭉 뽑아서 다른 보리들과 키를 맞춰줬습니다. 그런데 이 보리도 역시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한 채 사랑만 해준다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멸하여 도와줘야 합니다. 선교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며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셋째 숲을 만들어가는 마음으로 선교합니다. 나무를 심는다고  바로 숲이 되지 않습니다. 개척교회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돌본다면 곧 러시아에 주님의 숲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꾸준한 관심과 지속적인 기도가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오,
운명의 폭풍우 위에 꾸준히 견디면서
나침처럼 의무에만 살아보오.
투쟁의 모든 날이 지난 후에
역사 후에 찬란하게 그대 면류관이 빛나리라 – 괴테

저서: 문성모 역음, 이흥래 선교사의 러시아 선교 이야기, 쿰란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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