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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뽑을 것인가?

2007.11.03 12:29

김성찬 조회 수:1446 추천:38

  누구를 뽑을 것인가?


  안팎이 선거 열풍이다. 2007 대선이 코앞이고, 교단 내에서는 선거법 개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 광풍이 몰려왔다.
  톨스토이는 “정치와는 상관 말아야한다. 정치는 악하고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지만, 사실 이런 극단적인 현실도피도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더 극단적인 정치참여일 수 있다. 사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정치참여’에 대한 각기 상반된 입장에도 불구하고, 진보나 보수 어느 편이랄 것 없이 실제로는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이었다는 말은, 그 어떤 정치적 견해나 입장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현실정치의 격랑에 휩쓸려 들어가 종교적,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의 표출이다. 그러니까, 끝까지 도덕적 순수성의 중심세력으로 상처 없이 남을 수 없었던 아픔이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 성결교회의 신앙 전통은 비정치적 보수주의에 굳게 서 있었다. 요한 웨슬레는 경제정의를 부르짖었지만, 반면 정치적 자유화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가 이끄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선거를 통해 선택되지 않았고, 웨슬레나 그의 보좌관에 의해 임명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감리교인들은 지도자나 관리자들의 선거에 참여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관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가져 본 적도 없다”라며 모든 민주적 경향에 대해 이런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톰슨(Thompson)은 “이러한 웨슬레의 사상은, 웨슬레 사회윤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평등주의의 사회적 영향력마저 질식시켜 버린 것이다”라고 뼈아픈 지적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이 같은 웨슬레의 지나친 비정치적 보수주의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스스로 감소 시켜 버렸던 것이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어거스틴은, 로마의 도덕사나 키케로 같은 사람들의 도덕적 향기가 로마 제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로마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니까, 로마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서 로마 제국을 위대하게 만든 도덕적 향기가 풍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퀴나스가 말하는 ‘공동선’(common good)이란, 방위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덕스러운 삶의 증진(virtuous life)을 뜻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50년의 민주정치사에 있어서, 진정한 도덕적 향기를 발한 정부를 가져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나 그들은 이 공동선이 더 높은 차원의 신에의 충성을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공동의 애정(a common love),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다 높은 것에 기반하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라야만 진정한 국가 공동체는 통일을 기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라는 질문 속에 어떤 기준으로 뽑을 것인가라는 신앙철학이 깃들어 있어야만 한다. 왕(王)이 곧 신(神)인, 태양신 아몬-레(Amon-Re)의 아들 바로를 뽑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통치 할 뿐이지 왕 자신이 신은 아니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공동선 위에, 공동의 애정,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다 높은 것에 기반하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지지, 격려할 지도력에 보다 더 근접한 이를 택해야 할 것이다.
  
  선거에 임하는 우리의 역할과 자세
  내밀한 우리의 아픈 이야기를 나눠보자. 우리 교회는 스스로 관리를 잘못해 어렵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반납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일부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목청을 드높인다. 제비뽑기(행1장)라는 차선의 방식을 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일곱 집사를 뽑았던 지도자 선출 방식과 인선 기준이 이내(행6장) 발견된다. 제비뽑기 보다 더 진보된 성경적 지도자 선출 방식이다. 그런데도, 온천지 민주주의가 들꽃처럼 만발한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제비뽑기라는 퇴행적 행보를 굳이 마다하지 않는 형편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제비뽑기 방식을 택할 경우에라도 복불복(福不福)식 제비뽑기가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변증법적 지양(止揚)을 통한 진보적 고양(高揚)이 요청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맛디아가 ‘뽑히던’(‘뽑던’ 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절대주권 신앙에 굳게 선 거룩함과 순결한 신성성에서 기인된 것이어야만 한다. 복불복(福不福)식 선출방식에 기대어 무자격자까지 리더쉽을 탐내는 편법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비뽑기 선출방식을 택한 어느 교단에서 후보자 셋 중 제일로 부패한 사람이 뽑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통 큰 제안을 곁들이자면, 2007년 대선마당에 선보인 ‘엄지의 파워’가 부패한 조직과 동원의 구태를 극복하는 하나의 참신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선거권까지 목사 안수 10년차로 제한해 버려 총회를 원로원 되게 했던 구악(舊惡)에서 완전 탈피해 모든 교회가 선거에 임하는 혁명적인 참여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물론, 이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이루어 갈 합당한 대안이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정착되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그리고 2007 대선 정국에서도 우리는 이미 출사표를 낸 이들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을 우리는 내일의 지도자로 뽑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제도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의 자격이나 자질만이 문제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제도가 만든 원칙과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고, 도덕적 양심을 따라 투표권을 행사할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가 우리 안에 존재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적 다수는 도덕적 개인인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만 가능한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 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