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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통합 올인 그 서정적 낭만에 대하여

2007.11.03 14:10

김성찬 조회 수:686 추천:45

  오래된 미래, 통합 올인 그 서정적 낭만에 대하여


  서정이 부활하고 있다. 모던한 시대를 거쳐 포스트 모던한 시대까지 지난 세기 그 시대정신이 남겨 놓은 분열과 해체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통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구원의 방식으로 서정이 급속히 떠오르고 있다. 21세기 시대정신은 다시 서정이다. 서정은 근원을 지향한다. 위대한 과거, 황금시대를 지향한다.

  신년 벽두, 젊은 피 원희룡이 전두환 세배 사건으로 곤욕을 치뤘다. 변명질로 국민 통합 운운했지만, 성난 민심은 5공이 위대한 과거냐, 황금시대였냐, 본떠야 할 근원이었냐 정색하며 반문했다. 그는 궁색했다. 그 행태가 청산해야할 과거사에 굴신한 과거적 정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과거적인 것이 과거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때만이 그 과거는 구원의 방식일 수가 있다. 서정적 낭만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우리의 위대한 과거, 오래된 미래 에덴을 회복해야할 서정적 낭만의 대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21세기 통합과 치유라는 시대 정신에 역행하는 극단적인 분열과 해체를 톡톡히 맛보았다. 역사의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근원을 부정하고, 중심을 해체시키는 파괴공학이 난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근대인들은 본질적인 세계로부터 추방의 역사를 진보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나이스비트의 지적대로 진보적 이상론은 과학 기술이 천국뿐만이 아니라, 지옥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니, 종말에 서서 볼 때, 진보적 이상론은 지옥만 창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심,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한 본능적 몸부림이겠지만, 정치권에서 통합이 화두가 되고 있다. 통합 올인이다. 과거로의 회귀라고 비난도 받지만 그러나 과거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작 그들에게 과거적이면서 미래적인 과거가 있는가 라는 점이다. 있다면 그 가치를 재발견해서 그 가치의 보편 타당성과 지고지순함을 민중에게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  

  안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지금 백년을 이어 온 자리에서 천년을 이어 갈 내일을 본다. 교단창립 100주년을 눈앞에 두게 되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위대한 과거, 그 분열 없던 황금시대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형제 교단 예성과 기성의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 천 년을 이어 가야하는 힘이, 한 몸이었던 1907년 그 위대한 과거에 있음을 알게된 것이다. 아니 1907년의 위대한 과거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 아니 그 너머 원시림 에덴이라는 근원에 우리의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100주년이 주는 하늘의 계시요, 축복이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의 가치와 체계로의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교회숫자나 늘여 교단적 위상을 드높인다거나, 통합 시너지 효과로 교회 숫자만을 늘이자는 속셈만이 아니다. 100주년을 위한 전시 행정적 목표일 수는 더더욱 없다. 이런 류(類)들은 부차적인 것이고 표피적인 것이다. 본질은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근원으로서의 과거가 미래적 목표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이 편에서 모든 걸 비우면, 동화책에 나오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볏단을 서로서로 기쁨으로 주고받던 형제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서정적 낭만에 젖어 있다. 적어도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 안의 충직한 순결성을 가슴 가득 품고 말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가치와 체계로의 통합이라는 말속에서 약자를 자기 안에 복속시키려는 강자의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압력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서정적 낭만이란 다분히 주체중심주의적이며 또한 서정주의자들이 도덕적 파시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여 안심하라, 우리는 그대들에게 줄 것 다 주고, 그대 앞에서 벗을 것 다 벗었노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미학적 가치 이상일 수 없다. 이보(二步) 전진을 위해 일보(一步) 후퇴해 놓고, 공은 이제 당신 손으로 넘어 갔다고 윽박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얍복 나루의 야곱은 재물은 물론 처자식까지 다 그 형에게 넘겨 준 후에도 그는 당당할 수가 없었다. 이제 공은 형 에서에게로 넘어 갔다며 화답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문제적 인간 야곱 자신이 청산되어야 할 통합의 마지막 장벽이었음을 직시했다. 그래서 야곱을 벗는 사투의 밤을 보낸 연후에야 그 나루를 건널 수 있었다.
  통합을 이뤘다고 대화합 선언을 했던 교단들이 그 통합 우산 속에서 사분오열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은, 장자권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안의 야곱성(性) 때문이다. 거기다 더해 툭하면 지역을 가르고, 출신학교를 따지며, 소수의 정의가 매장 당하고, 불법적 다수가 표준이 되는 청산해야 할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자기 반성 없는 통합은 의미가 없다.

  통합. 이 일은 분명 올인 할만한 가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올인해도 좋을만한 오래된 미래적 가치에 충실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