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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성결교회

2007.11.08 21:00

강남철 조회 수:850 추천:46

종교개혁과 성결교회 16세기를 종교개혁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를 필두로 하여 가톨릭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학과 교리로 개신교라는 가톨릭 외의 다른 기독교가 등장할 때, 가톨릭 내부에서는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로욜라를 필두로 하는 예수회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한 가톨릭의 갱신과 부흥이 오히려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개신교는 더 이상 새로운 지역에로 뻗어갈 수 없었고, 오히려 이미 얻은 라인 지역과 남부 독일까지 가톨릭에게 빼앗길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현대 유럽교회를 복음주의자들이 봤을 때 불이 꺼진 집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불, 부흥의 불이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의 관점으로 토론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연 현실적으로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치과 종교가 교묘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런 결과에 이르게된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조심스럽지만 종교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에서 찾을 것이다.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 멜랑흐톤등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과의 교리와 신학논쟁에 사활을 걸었다. 저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흥교회의 주초를 쌓기 위해서였다. 결국 신학과 교리 논쟁에서는 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살얼음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리와 신학으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18-19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극심한 세속화로 접어들게 되고, 오히려 교회는 1,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 바로 종교개혁의 발상지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20세기 초에 루터와 칼빈처럼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라는 신학의 거두가 나와서 거대한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와 그리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와 싸우는 리틀 종교개혁 내지는 포스트 세미 종교개혁과 같은 것들이 일어났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과 확전이 칼 바르트에 의해서 저지되고 수정되고, 현대철학과 과학주의의 도전과 위기도 극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 교회는 그리고 유럽교회는 어떤가? 이런 신학적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치곤 목회하는 모습과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이, 꼭 숫자와 규모가 아니라도,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원인은 한 가지, 신학과 교회가 선교와 개척에 힘을 쏟지 않는다면 결코 현실은 있어도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생명은 신학에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교회의 미래는 선교와 복음전도에 있다. 중세 천년동안 가톨릭은 신학과 교리 논쟁으로 자기들만의 마천루를 쌓고, 그래서 신학의 꽃을 정치로 피웠다. 교회가 세속정치하는 것이 무슨 큰 사명이고 권세인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논문이나 글에서 억지로 찾아내고자 해도 선교에 관한 것은 거의 드물다. 아니 찾아보기 어렵다. 억지로 몇 문장을 가지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이다. 바르트와 틸리히도 교수였고, 신학자였지 선교사와 목회자(물론 목회를 하긴 했다)가 아니었다. 여기에 독일교회를 포함한 유럽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반대로 로욜라와 자비에르, 그리고 마테오 릿치와 같은 이는 위대한 신학자요 학자는 아니지만 선교와 개척을 위한 위대한 신앙의 여정을 도전했고, 결국 종교개혁의 열풍에서도 오히려 가톨릭은 더 교세가 확장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들과 정치가들과 행정가들은 난무하다시피 하다.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열심이 현실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독일과 같은 - 선교의 대상이 되어버린 종교개혁지,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종교개혁의 땅이라는 - 모순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역사를 통해서 겸허히 배워야 할 것이다. 한 시대에 한 지역에서 루터와 칼빈, 바르트와 틸리히 같은 500년, 300년 만에 한 번 나올 법한 인물이 연거푸 나왔는데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 되고, 신학은 있지만 목회가 안되고, 교회가 술집이 되고, 세속화에 휘말리는 일이 결코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났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반면에 18세기 말과 19세기에 걸쳐서 위대한 선교의 시대를 연 윌리암 캐리, 데이빗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리즈 하월즈와 같은 이들은 구두수선공, 탄광 일당 잡부 등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해석하고 판단하고 논쟁하는 현실적인 신학논쟁 대신, 미래를 향한 세계 속의 복음의 씨를 품고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뻗어갔다. 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하나님께 헌신했다. 이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학교를 세우고, 도시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우리가 있다. 이들의 선교는 교회짓고, 정치하고, 교단세우는 실적내기식 선교가 아니였다. 진정 미래를 위해 삶을 헌신한 전도요, 선교였다. 지난 남북정상회담 중에 눈여결 볼 것이 평화자동차(주) 공장 방문이다. 주지하듯이 평화자동차는 통일교의 주요 회사이다. 또한 통일교가 소유한 여의도의 금싸라기땅 통일주차장 부지에 지상 72층과 59층짜리 오피스텔을 비롯한 쇼핑몰과 호텔이 2010년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이만희 신천지 장막성전’과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독버섯처럼 교회를 무너뜨리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가? 또한 가톨릭의 인기 및 확장은 개신교의 하락분을 그대로 흡수하여 상승하고 있다. 추락하고 있는 개신교 내에서도 성결교회는 더 심각한 편이 아닌가?  거짓종교와 이단과 사이비에 성도들이 속아 넘어가고, 저들의 잎에 빛이 가리워서 교회가 크질 못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맘모니즘과 과학주의, 인본주의에다가, 자식과 노후걱정,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성도들이 물불을 안가리고 뛰어드는데 우리는 지금 뭐하고 있는가?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인가? 목사는 목회를 하고 신학자는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 목회와 신학자 모두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이다. 교회를 살리고 부흥시켜야 한다. 목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교회를 죽여서도 안되고, 교회를 더럽게 하는 목사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며, 교회와 목회와 상관없는 따로국밥 신학이 나와서도 안 될 것이다. 교회가 할 일은 선교와 전도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이것이 우리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