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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설교)

2007.11.08 21:05

강남철 조회 수:745 추천:30

                                                          하나님나라에서 큰 자
                                                                                      마태복음 20장 20~28절

  기원전 776년경에 올림픽 경기가 올림피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후 천 년동안 지속되다가 주후 393년에 없어졌고, 이후 1894년에 쿠베르탱에 의해 근대올림픽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원래 올림픽 경기는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사 의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제우스 신전에 모여 제사를 지낸 뒤 모인 사람들이 함께 경기를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고, 이때 이경기가 열린 곳이 올림피아드였기 때문에 올림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776년 이면 거의 하나님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망해가던 시기이고, 이때에 제우스 축제에서 비롯된 올림픽은 시작되었고, 또 주후 333년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지 얼마안되어 이 제우스 축제에서 비롯된 올림픽이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근대 올림픽이 1894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난 직후로 전 세계가 자본주의라는 ‘물신’의 영향아래 속하기 시작할 때 또다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단지 옛날의 제우스가 지금은 자본이라는 물신, 마모니즘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림픽의 슬로건은 citus 더 빠르게  altus 더 높이  fortis 더 강하게이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경쟁사회를 가장 잘 표현한 구호이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 이 세가지 구호를 외치면서 오늘도 부모들은 자녀들을 유치원에 맞기고 일터로 나간다. 더 빠르게 출세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강한 권세를 갖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현상이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다. 이미 다니엘은 올림픽이 시작되고 난 뒤 100년 후에 기록한 다니엘서 12장 4절에서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했다.

  생각의 속도에서 빌 게이츠는 디지털 신경망 구축을 통한 급속한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하고, 거기에 맞춰가는 기업만 살아남을 것이라 했는데 10년 전의 예상은 현재 그대로 적중되고 있다.
빌게이츠가 생각한 생각의 속도라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후부터 생각의 속도가 빠른자가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은 최고의 시대가 아니라 최초의 시대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 왜냐면 언제나 최고는 빼앗기고 바뀌기 때문이다. 최초로 생각하고 그것을 실용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벤처기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지 두각을 나타내고 권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벤처 잘하면 벤츠타고, 잘못하면 벤치에 앉는 노숙자된다는 말이 있다.

  더 빠르게 생각하라,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라, 그리고 더 강한 자가 되라 현대는 이런 사람을 요구한다. 오늘날 믿음이 있는 성도들과 또한 한국 교회가 이런 자본주의 현실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성경으로 조명하면서 길을 지도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신앙이 신앙같기도 하고 저것은 신앙이 아닌 것 같기도 하는 애매한 삶을 산다. 믿음 같기도 하고 저것은 믿음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의 애매한 삶을 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사시느라 얼마나 힘드십니까? 얼마나 더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 성공을 위해 고생하십니까? 성경은 이런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경쟁사회는 여러 가지 잇점이 있지만 그에 따른 단점도 심각합니다. 경쟁사회는 인간을 비인간화시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평가와 비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래서 꼬리표가 붙습니다. 학생들은 몇 등, 대학생들은 명문대, 서울대, 서울상대, 지방대, 그리고 어른들은 대기업,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세금 과표기준 1분위, 2분위, 3분위 등등,... 최하계층, 차하위계층, 차상위계층, 차차상위계층 중산층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쉴 수가 없습니다. 경쟁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쉴 수 없습니다.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없는 노력형 인간들은 얼마나 내가 노력하느냐에 따라 소득이 달라지므로 쉴 수 없습니다. 그래서 24시간 영업과 투 잡, 쓰리 잡족이 등장했습니다. 경쟁사회에서는 쉴 수가 없고,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 내 가게가 내일 잘 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늘 불안한 마음으로 쫓기면서 삽니다. 오늘 내 자리가 내일 가면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짤린 것입니다.

  이런 피곤한고 지친 우리들에게 주님은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세상에서 낙오했다고, 세상에서 짤렸다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을 맞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세상은 쫓아내고, 세상은 평가하고, 세상은 단점을 보고, 세상은 밝으려고 누르고 죽이려 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내게로 오라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라 말합니다. 베드로가 친구들과 함께 고기잡으러 갔습니다. 밤이 깊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합니다. 깊은 곳은 물 가운데로 고기는 물가에 모여있지 물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의 말씀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던지우리다 하고 가서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지게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말합니다. 밤이 깊도록 그물질을 한 베드로와 같이 우리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존심 세워가면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착하다고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끝입니다. 밀리지 않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요즘은 덜 하지만 5년전만 해도 불가마 찜질방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목욕탕도 대충 하나 황토방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찜질하려 7,8년 전에 서울 강서구 등촌동까지 목사님들과 같이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가면 편안하고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고 하루 밤 자면 똑같은 일상에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어디 찜질방만 그렇습니까? 꼴등한 아이는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2~30등 한 아이가 자살했다 거의 드뭅니다. 그런데 1~2등 아이는 간혹 뛰어내립니다. 얼굴 못생겼다고 자살하는 일반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내 욕한다고 자살한 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에인들은 인기와 부러움을 받고, 또한 외모 또한 부러울 것이 없지만 종종 자살합니다. 구멍가게하는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대기업 총수들, 아니면 중소기업이라도 그래도 잘 나가던 사람들은 자살합니다. 일반인들은 마약이나 대마초, 피고 싶지도 않고 살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 고위층, 교수, 의사, 재벌 2세, 연예인들은 뉴스에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경쟁사회가 낳은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경쟁사회에 익숙하면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갖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적응할 수 있을가? 어떻게 하면 나도 주류계층, 중산층에 낄 수 있을까 생각하고 부러워하십니까? 그건 다 허상입니다. 이땅에서 누릴 수 있는 참 만족과 기쁨은 없습니다. 이땅의 기쁨과 즐거움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2천년전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입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참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곁으로 가면 21세기 경쟁사회가 아니라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정 더빠르고, 더 높이, 그리고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주님은 이미 성경에 그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섬기는 자가 경쟁사회에서 승리합니다.
    26~28절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살마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종이 곧 높은 자란 사실입니다. 사실 자존감이라는 것은 남들에게서 결정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결정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상전으로 인정해주고, 나를 높여줘도 내가 나를 만족하지 못하면 거기에서 우울증과 조울증과 신경증이 시작되고 열등감과 패배의식과 소극적이고 소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귀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건강한 인격과 정신을 갖고 또한 다른 이들을 평안하고 부드럽게 대해줍니다. 남에게 높임을 받아야 만족한다면 아직 자존감이 연약하고 낮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존감이 있고, 인격적인 사람은 다른이들에게 높임을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섬기고, 도와주므로 인하여 만족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구원받은 내가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되시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내 삶의 공급처가 되시는데 불안하거나 다투거나 욕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니 그저 사람들을 섬기고 높이는 것이 기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자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가 경쟁사회에서 승리합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기업들은 이윤을 내는 데 목적을 맞췄습니다. 기업중심의 경영을 했고, 모든 수익을 기업을 위해서 썻습니다. 그러자 기업의 이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문제는 사회환원을 하지 않는 기업은 국민에게 외면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우리나라도 기업들이 메세나 운동이라 사회환원운동 내지는 봉사운동에 앞다퉈 나가고 있습니다. 얼마전 모기업은 8천억이라는 액수를 내놓겠다 했는데 아직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없는 자는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는데 많이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갖는 것을 부러워하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를 부러워하면서 평범한 삶을 그렇게도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물질과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중요한 가족과 건강과 평범한 삶속에서의 작은 행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물질과 권세를 얻었지만 가정이 불화속에서 위기가운데 있고, 기쁨이 없습니다. 골프를 치고, 호텔에서 숙식을 하고 여행을 해도 행복이 없습니다. 저들은 부요한 자같지만 가난한 자입니다.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행복과 감사와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면 저들은 행복과 감사와 만족과 가정을 물질과 권세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많이 가진 자가 높은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비워야 합니다 내 욕심을 비우고, 내 고집을 비우고, 내 지식과 교만을 비우는 가난한 사람이 그 빈 공간을 진정 소중한 가정과 자녀와 건강과 평범한 행복과 꿈와 비전이라는 것을 채우는 부요한 자입니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지나친 욕망과 야망, 그리고 집착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정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런 삶이 진정 부요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목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잃을 것도 없었고, 아까울 것도 없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잠못이루는 밤이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기도했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써 살았던 진정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가 늘 비전과 꿈이 가득한 부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로마서 5:7~8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지금 그분의 부요함으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은 더 많은 부를 못 이뤄서가 아니라 뜻깊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있는 자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리더십입니다. 리더십 책 종류만 해도 수천 수만종이 출간되었고, 지금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대리더십의 흐름은 처음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성공한다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변화되어서 지금은 섬김의 리더십을 거쳐서 믿음, 신뢰의 리더십까지 이르렀습니다.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부하를 믿어주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 든 사람이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었잖습니까? 못하는 사람도 잘 할 때까지 믿고 기회를 주는 그가 작년 최고의 감독으로 올랐습니다.

   경쟁사회는 시스템 사회입니다. 사회부적응자들은 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1,2,3차 기회를 줘서 안되면 퇴출시키고, 잘한 사람에게는 보너스와 옵션을 주는 것이 경쟁사회의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약점을 잘 파고 드는 것이 바로 다단계 판매 기법입니다. 실적만 되면 얼마든지 수당과 댓가를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사람들이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자기가 당한 것입니다.

   이런 냉철하고 인정사정없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오늘날 시스템으로 하면 12제자에서 쫓겨났어야 합니다. 예수를 3번이나 부인했으니 저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의 양을 치라 3번 말씀하시면서 교회의 목자로서 역할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의심많은 도마도 예수님은 직접 보여주시면서 저를 제자로 세우십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던 글로바와 마태, 마가 등 수많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주셔서 오순절 마가의 다라강에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강력한 주의 사역을 하는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다 외면하고 버리고 비난하고 공격해도 여러분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의 능력과 하늘의 권세를 주시고자 예수님께서 희생양이 되셔서 저와 여러분 대신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사람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도와주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사람들의 지식이 홍수에서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물질이 건강이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노아만이 구원의 방주를 타고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구원의 방주에 올라탄 노아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의 구원의 방주, 구원의 길, 영생의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