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아이들
2010.12.16 17:01
선유도아이들
-오르난의 타작마당
지금
선유도는
눈도 그치고
바람도 자고
눈밭을 하루 종일 뛰어놀던 강아지 까비도 잠이들고
...
산산이 부수다
왕이 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싶어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선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께 묻는 일에 소홀하다가 실패한 일을 거울 삼아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실행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입니다.
하여, 하나님의 궤를 가까이에 두고 싶은 것입니다.
날을 정하고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려고 기럇여아림으로 올라갑니다.
궤를 실을 수레도 근사하게 새로 마련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거느리고 다윗이 직접 기얏여아림으로 행차합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추고
궁정 오케스트라는 흥겨운 연주를 합니다.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인지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놀아서 하나님의 궤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수레를 따르던 웃사가 손을 뻗어 궤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웃사의 몸이 산산 조각나 흩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대상 13:11)
베레스 웃사.
먼저 읽던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김으로 후~ 불기만 하여도 부서질 진흙인 우린데 무섭게 충돌하셨으니
웃사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나요?
여호와의 궤가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생겼는데.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라면 처음부터 틀린 거였잖아요.
궤를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라 레위족속이 어깨에 메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면
궤를 수레에 실을 때 '베레스'했어야 되는 일 아닌가요?
다윗은 두려운 마음에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변죽을 살살 울리면 가운데가 요동친다(?)
우리 교회에는 능력 있는 중보기도 팀이 있었습니다.
성실함과 단호함을 겸비한 중보기도 팀입니다.
'96년도에 3명으로 시작해서 8-12명 정도가 꾸준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기도 팀이 제겐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멤버들이 바뀌기도 했지만 매주 수요일 예배 후에 가지는 기도모임을 10년 넘게
거르지 않고 하는 중보기도 팀이었습니다.
중보기도자들의 갈등으로 존속이 위태로운 시기도 있었고
'응답받는 기도모임'(?) 이라고 소문이 나서 외부에서도 기도 요청을 하는 흥왕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외부 사역을 나갈 때에도 기도 순서를 정해놓고 현지 시간에 맞춰 중보해 줄 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팀이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든 긴급 기도요청을 하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신실한 중보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늘 자랑하며 즐거워했지요.
2002년 초, 중보기도자 중 한 사람이 말씀묵상을 나누는 시간에 불평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불평'이라는 녀석에게는 '원망'이라는 쌍둥이 동생이 있어서 불평과 원망은 늘 함께 다니더라구요.
그리고 또 불평이라는 그 녀석은 전염력이 강해서 금방 옆 사람도 불평자가 되어버리더군요.
기도하러 모였는데 불평과 원망이 쏟아지니 한 마음도 안 되고, 기도를 해도 뭔가 모르게 핵심이 빠져버린 것 같은 찜찜한 분위기가 되곤 했습니다.
특단의 조치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상처를 주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사람이 기도모임에서 스스로 빠지고 나서 기도모임을 수습하느라 또 몇 개월을
힘겨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기도모임에서 빠지고 나서는 아주 본격적으로 기도모임을 헐뜯고 다니며 흔들어 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중보기도자들을 험담하고 다니더니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저를 향해 비난의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서 상처를 주더라도 해명도 변명도 하지 말고 시시비비도 가리지 말라고 제가 중보 기도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그리고 저에 대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제게 전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게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도 들려오는 말들 때문에 위통이 생겼습니다.
새벽녘이면 올라오는 신물로 잠이 깨기 일쑤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날마다 주님께 묻는 일이 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나요?
새벽마다 신물이 올라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기도모임도 저도 조금씩 영적으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영과 육체는 회복되어 가는데 감정의 영역이 아직 불편합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통입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웃사의 죽음 이후에 다윗은 율례대로 레위족속의 어깨에 메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옵니다.
그리고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대상 18:6)하십니다.
승승장구, 백전백승, 이러한 단어가 어울릴 듯합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다윗은 성전의 기구들을 만듭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합니다.
요압이 만류하였지만 사단에게 격동된 다윗은 멈추지 않습니다.
선견자 갓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윗에게 옵니다.
선견자 갓은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재앙을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퍼져 칠만 명이 죽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사자가 예루살렘을 멸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멸하는 사자에게 손을 그만 거두라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섰을 때 재앙이 그칩니다.
다윗은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의 목숨과 자기 집안을 내걸고 백성을 위해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갓에게 다윗에게 전달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대상 21:18)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성전 터로 선포합니다.
다윗은 왜 하필 자신의 실패가 생각나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하나님의 성전터로 선택했을까요?
기도모임이 누구의 것이냐?
시간이 많이 지나 중보 기도모임도 안정을 찾았고
저도 다시 새로운 멤버들과 즐거운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일도 점점 편안해져갑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중보 기도모임에 들어오고 싶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을 때
전 주님께 단호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절~대 안 됩니다.'
'왜 안 되지?'
'그 사람이 기도모임에 오면 또 불평과 원망으로 곤죽이 될 텐데요'
'그래? 그런데 그 기도모임이 누구의 것이지?'
'....'
그 날 밤, 주님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중보 기도자들을 저의 친위대쯤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 중심의 기도 모임이 아니라 저 중심의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사람들과 주님은 없이 우리끼리 코이노니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다시 받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들어오면 기도모임이 다시....'
주님께 들이대는 이유는 기도모임 분위기 때문이라고 억지를 썼지만
진짜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적거리는 사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모임을 흔들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레스 중보 기도모임'
이번엔 제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나를 경외함으로 하지 않는 구제와 선교, 모든 선한 행위에 내가 베레스 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든 방법에 내가 베레스 한다.'
'나를 의지하지 않는 기도와 헌신 모든 열심과 열정에 내가 베레스 한다'
경고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 앞에 노란 스티커 한 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눈물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엎드렸습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하나님이 인간(나)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재앙이 끝나고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불로 응답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
새로운 중보 기도 헌신자들의(그 사람을 포함해서) 기도에 불로 응답하시는 곳입니다.
댓글 5
-
박원석
2010.12.18 17:36
-
김성찬
2010.12.18 21:01
말씀이 말씀인 것은, 적시에 만인의 만사에 적합한 말씀이 되기 때문이라고, 재삼 확인케 되는 말씀을 대합니다. 우리가 레마라고 부르는.
먼데, 제주선교 60주년 기념교회 공동설립 헌당예배 마치고 돌아 와, 홈피를 열었더니, 가슴 저린 말씀 사건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단숨에 읽어냈지만, 가슴이 아파 창을 닫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도 묻고 싶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자신의 실패가 생각나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하나님의 성전터로 선택하게 하셨을까?
이는 덧난 상처, 더 덧나게 하는,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는 잔인한 인본주의적 형벌이 아닌가?
알 수 없는 천일야를 보내고 있는,
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데,
"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하나님이 인간(나)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재앙이 끝나고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불로 응답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
새로운 중보 기도 헌신자들의(그 사람을 포함해서) 기도에 불로 응답하시는 곳 입니다."
오늘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발가벗고 선 영혼을 대합니다.
품어야 하는 생명,
자신을 다 내줘야 품을 수 있는 생명,
품을 수 없어도 품어야 내야만 하는 만 신 창 이.
나는,
신적 수동태로 가시를 품은 '선유도 아이들' 영혼에 '비친,'
인간적 능동태로 꼴사나운 인간들 죄다 매다 꽂는 '나.'의 몰골이,
속상하고, 부끄러워,
이렇게 악담을 쏟아 냅니다..
바보, 멍청이, 쪼다 선유도 아이들.
넌, 밸도, 자존심도 없냐?
그래서 넌 섬에서 살지?
탈출구없는 도둑고양이를 어쩔 수 없이 끌어 안고 잠들어야 하는,
그 형벌(?)의 섬 말야? -
윤보경
2010.12.20 14:17
그루터기님! 이렇게 장문의 글 읽고 생각한 바가 크옵니다, 다윗이 말씀에 순종하여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고 무엇보다 여호와를 경배하는 불타는 열심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곧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리는 성전이 아닐까요? 조금만 지나면 나태해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좀 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 예배의 감동, 찬양의 기쁨, 기도의 생활이 활발해지며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절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유도 라는 곳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뭔지 모르게 가깝게 닥아오며 애틋한 정이 묻어 나옵니다.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엎드린 모습에 대단하신 사모님이십니다.^^** -
그루터기
2010.12.21 10:21
윤보경 사모님, 감사합니다.
언제쯤 저의 幼稚한 글에,
김목사님의 글에 누가 되지 않을까,
망설이며 올리는 글에 반응을 해주실까 기다렸습니다.
어제까지 있던 밸, 오늘부터 빼버려야 할까봅니다.
-
윤보경
2010.12.22 13:11
" 선유도아이들 " 멋진 글이 올라올때마다 진한 감동으로 그곳의 풍경을 상상해 보곤한답니다. 기라성같은 댓글들이 많아서 차마 뭐라고 올리기에 용기가 나지 않았답니다. 눈물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엎드린 대목에서 과연 주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답니다. 오늘도 주님사랑으로 아낌없이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동역자로 동참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싶네요...^^ 담 또 귀한글 기대해 봅니다. 성탄절 잘 보내시고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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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빙자하여 말씀을 전하여 내 뜻을 피력하였습니다.
주님을 빙자하여 기도가운데서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였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였고
물량적인 목회가 잘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제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이라는 것은 나를 포장하는 말뿐이었습니다.
수많은 부딪힘과 의견의 분분함은 육신의 소욕을 좇아서
일어나는 당연한 열매였습니다.
그후 성도들의 상당수가 이러 저러한 이유를 대고
썰물 빠지듯이 빠져 나가고
목회를 그만 두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주님은 은혜로 내게 와주셨습니다.
육을 좇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이 되는 것을 알게 하셨고
사망에 이르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루 하루 살게 하시는 대로 살 뿐
내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께서 이끄심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따를 힘조차 없지만
주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셔 오늘도 그냥 단지 살게하시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힘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