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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 오늘은 승리한 날, 적어도 절반은—.

2014.08.14 21:34

김성찬 조회 수:4798 추천:10

영혼일기 1534 : 오늘은 승리한 날, 적어도 절반은—.

2014.08.14(목)


기도원엘 갔다.


통성기도가 역겨웠다. 낯설었다. 기도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말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기도의 열정이 사그라들었다는 말이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완력으로 하늘을 쥐락펴락할 것 같았던 기도에 대해 무모했던 나의 지난날의 태도가 한낱 치기(稚氣)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이가 됐다는 말이다. 이젠 내가 인간들의 간구에 지친 하나님을 배려할 줄 아는 나이가 됐다는 말이다. 그저 세 마디 “아버지, 아시지요, 도우소서~.” 그뿐이면 다다. 아시지만 안 도우셔도 이젠 괜찮습니다. 그런 초탈이 내 자세라는 말이다.


목신원 박원감이 9월 학기에 ‘성결 고전 읽기’를 강의해 달란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 캠피스의《그리스도를 본받아》같은 고전을 다뤄달라고 했다. 강의 제목이 제한적이고, 다소 칙칙하나 내 자신, 다시 전인적 기본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자 응했다. 닫혀 있으나 열린, 열려 있으나 닫힌, 쉬울 것 같으나 어려운, 어려울 것도 없이 쉬운 강의가 될 것 같다. 사실 고전을 강의한다는 것은 별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고전은 단기간에 집단으로 합독할 책은 아니다. 혼자서 성경 읽듯이 평생을 한 모금씩 음미해가야 할 책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古典)이란, 무엇인가? 썰렁 개그다. 세 가지 특징이 있단다. 하나, 읽지 않았으면서 읽은 척하는 둘, 첨 읽으면서 두 번째 읽는다고 말하게 되는 셋,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새로운 책이 고전(古典)이란다. 두 번째(ㅋ) 읽게 될 것이지만, 그 의미의 오미(五味)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라.


오늘 204년 8월 14일(목) 25년 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그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라는 연설을 남겼다. 그래 평화상은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착한 일생을 산 사람에게 주는 법이 없다. 고난과 역경, 압제와 핍박을 견뎌낸 정의의 사도에게 선사하는 상이 평화상이다. 그래서 평화는 거저 오는 법이 없다. 평화는 의로운 쟁취의 결과다. 왜들 싸우냐고, 시끄러워 죽겠다고 공자연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평화는 깨진다. 장 그르니에는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기적 자기애로 무장한 이들을 통해 얻어지는 정의란, 평화란 결코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구촌을 돌며 내던지는 화두는 ‘가난한 자의 벗’이다. 그래서 그분은 14일 한국을 방문하자마자, 가장 먼저 ‘가난한 이들’을 만났다. 작금,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가난한 이들, 즉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가족과 새터민, 이주노동자 등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상처받은 작은 자들이다.


누가 누구를 힐링하는가?


요즘 대세인 철학자 강신주는 작금 이 땅에서 유행하는 힐링 프로그램에 대해 일갈했다. 그런 류의 작위적 힐링 요법은 별 의미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그는 진정한 힐링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내 곁에 있어주는 것, 이라고 갈파했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체험적으로 그 정의를 안다. 내가 먼저 말한, 체험한 진정한 힐링의 정의이자, 방법이기도 하다. 나에게 진정한 힐링의 주체가 되어 준 이는, 바로 나보다 힘든 이들이었고, 힘든 내가 나보다 더 힘든 그들을 최선을 다해 돕고, 보듬어 안아주며, 서로 의지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내가 서서히 부활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가난한 자’를 먼저 만났다. 그는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의 친구로 이 땅에 왔다. 숭고한 어프로치다. 작은 차, 가난한 사람, 평화에 대한 올바른 정의 등등 그분이 제기하는 화두는 우리가 철저히 외면했던, 도외시했던 화두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니-오늘 우리 앞에 현현한 예수다.


섭섭해 하지 마라. 그 접견의 우선순위에 내가 끼지 못했다고. 그들 아프고, 외로운 자들이 있어 우리가 위로를 받았음을 기억하자. 민족의 작은 십자가를 대신 진 자들이 있어 우리가 나음을 입었기 때문이다. 위로 받을 길 없는 그들을 천하 만민 앞에서 위무하며, 높여주는 이 행차야 말로, 우리 그동안 속수무책이었던 이 땅이 치유 받는 계기임을 직시하자. 작은 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기 비움을 우리도 보고, 배워 살아내 보자. 경호가 어려울 만큼 경계를 소탈하게 넘나드는 교황 프란치스코 덕에 우리 서로 소통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면 한다.


-낯선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시는지요?

-박노해는 답했다.

-근원적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면 다 친구가 됩니다.


박노해 그도 교황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다.

그리고 박노해는 교황 프란치스코에게서 직접 들을 수 없는 ‘가난한 자’를 위해 살려는 이들이 지녀야할 태도를, 자신이 겪은 체험적인 앎을 통해 이렇게 일러 주고 있다.


-저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요?

-박노해의 답이다.

-먼저 경외의 마음을 바칩니다. 그래서 아프게 말합니다. 남을 위해 살지 마십시오. 힘없는 사람을 위하여, 뭔가를 위하여 살겠다는 강박도 갖지 마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지금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많은 사람들, 돈과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혁명가였습니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됩니다. 그럼에도 그대가 품고 있는 그 ‘첫 마음’은 아주 고귀합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진정한 자신을 위해 살아가십시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사랑은 대가도 없고 보상도 없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던 혁명가 박노해는,


“지금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많은 사람들, 돈과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혁명가였습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그런 그들을 숱하게 봐왔던 거다. 그래서 그는 정언적 선언을 내뱉는다. 이렇게,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됩니다”라고.


최선을 위해 내가 도왔던 이들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교황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자들은, 나를 치유한 이들이었고, 혁명가 박노해가 최선을 다한 과거는, 그가 과거에 기대지 않음으로 ‘앞선 과거’가 되었다. 사랑으로 살아 사랑을 낳은, 최악이 아닌 최선을 낳은 '앞선 과거.' 


해답을 얻은 날,

실천만이 남은, 해법을 얻기 보다 더 힘든 실천이 남은


오늘은 승리한 날,

적어도 절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