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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2014.09.12 17:53

김성찬 조회 수:4279 추천:14

영혼일기 1556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2014.09.12(금)

 

고전(古典)이란,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그런데 고전(古典)이란, 높을 고(高), 고전(高典)이자 동시에 외로울 고(孤), 고전(孤典)이기도 하다.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지만, 카멜레온처럼 변색이 필살기로 몸에 붙은 범인들에게는 정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높은 법(法), 고전(高典)이다. 높이 나는 것은, 외롭다. 그런 점에서 고전(高典)은 외로울 고(孤), 고전(孤典)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한 웨슬리는 홀로 높고, 홀로 외로웠다. 하여 너무 높아 이단자로서 영국 성공회의 박해를 자초했다. 이단자는 갇히거나, 추방된다. 그 단절 된 환경 속에서 그는 높이 떠서, 멀리 보는 눈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는 높아서 외롭고, 외로워서 높은 위치에서 땅 끝 증인(행1:8)된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웨슬리는 이 말씀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이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학문적 접근이 아니다. 신앙적 쟁투다.

그러면서 바울의 실증적 고백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3:15).” 구원받은 자의 완전이란 불가능한 목표가 아님을 강변한다. 그러면서 이런 사명의 확신에 찬 어깃장도 놓는다. “완전해진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이 나를 완전을 전하러 보내지 않으셨으리라는 것이다.(중략) 실제로 (완전)을 이룬 사람이 영국 안에 한 사람이라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면, 나로서는 우리가 다 성경의 뜻을 오해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 후로는 나도 "죄는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김성찬은 인간의 죄성이 이 세상에서는 제거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거라는 입장에 선 그리스도인이다. 그 죄성이 단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억제될 뿐이라는 생각을 주로 해왔다. 내 담즙질적 성질 때문에 그럴 거다. 아니 나의 실존 현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매우 낭만적이다. 원죄나 내적인 죄는 타락 이후에 첨가 된 ‘죄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죄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덧붙은 것이기에 인간 본성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온전한 성화를 웨슬리는 믿었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견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타락의 극복 즉 현재적 삶 속에서 완전한 성화를 웨슬리는 강조했다. 정리해 보자면 웨슬리는 1)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2)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3)모든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4)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를 얻을 수 있다(웨슬리안 전통주의(Wesleyan Oethodoxy)의 4대 교리(Methodist Four Alls))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를 얻을 수 있다.”


얼마나 낭만적이고, 당당한 신앙 목표며, 고백인가. 그는 규칙장이(Methodist)답게, 성경에 계시 된 완전 교리를 발견하고, 그 완전 성화를 이루기 위해 규칙적인 성경적 탐구와 신앙적 고뇌 그리고 열정을 쏟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룬 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에 이를 성경적 근거와 확증 그리고 그 확증에 기반한 성결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일에, 그 일생을 바쳤다. 그는 그 사명을 위해 일생을 바친 노작(勞作)『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가리켜 “내가 1725년부터 1765년에 이르는 40년 간 믿고 가르쳐 온 완전의 전체요, 총체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동의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따라가지니 숨이 막힌다. 그가 오른 산을 정말 높다. 등정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냥 죄 가운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 사죄의 은총을 빌며 갈 수밖에 없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게 내 한계를 아는, 당신 앞에 솔직한 존재로 서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백증적인 자기 한계 선언이다. 그 완전이 절대적인 완전도 무죄적 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잘못을 넘어 고의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웨슬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책망하며, 권면한다.


“사람들의 영적 생활에 발전이 없는 하나의 원인은 그들 자신이 냉담하고 등한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실로 여러 해 전부터 나의 견해였습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믿는 자에 대한 얘기니 딱한 노릇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모든 일에 우리에게 바른 판단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가득히 채우사(엡3:19)" 우리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1:4)"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네 번의 중요한 회심이 있었다.

종교적 회심, 신앙적 회심, 성령의 사람으로서의 회심 그리고 영혼구원에 눈 뜬 사명의 회심이 바로 그거다. 그는 완전에 이르기 위해 복음적 고뇌와 열망을 한 순간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온전한 성화를 위해 부단한 영적 분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외로웠고, 높고, 깊었다.

당당한,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완전에의 욕망.


그 맹렬한 실천이 이 시간, 내 심령을 울린다.

완전에 이르는 거룩한 야망을 이루라.

성령이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내키지도 않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는

나 같이 부패한 실존에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