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271:
2016.06.25

6·25 그리고 역사(歷史)

 두 세대 전에 이 땅에는 6·25라는 전쟁이 있었다. 과거의 일이다. 과거나 현재란 그것들을 구분하기 위한 가공적이며 개념적 존재인 선에 불과할 뿐, 과거도 미래도 모두가 동일한 시간선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카((E.H.Carr, 『역사란 무엇인가』)의 말이다. 우리는 ‘시간’이라고 하면 흔히 과거, 현재, 미래를 떠올린다. 시간은 실체가 아닌 관념이다. 이 시간에 대한 관념은 여러 개의 시간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 개념들 중의 하나로서 ‘통속적 시간개념’으로 통용되어지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순차적 질서를 갖는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를 살아와서 현재에 이르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삶은 불가역(不可逆)적이다. 그렇다면 인간 삶에 있어서 불가역적인 과거는 무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대한 탐구는 미래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현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므로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 가문은 6·25로 거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다시피 했다. 윗대의 삼남매 중 아버지와 큰아버지 형제가 전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6·25는 다만 과거의 일일까? 그 전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 지속되는 한, 그 전쟁으로 희생된 가족들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6·25는 끝난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사실의 객관적인 기록이며 그에 대한 해석보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에 반해서 역사는 역사상의 사건을 설정하고 해석과정을 주도하는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문서나 기록물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후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모든 역사적견해가 역사로 확정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 화 문제는 특정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될 때 어떤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래서 카(E.H.Carr)는『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전자와 후자의 역사적 견해를 지양한 역사 기술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즉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 화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뉴라이트 계열의 이승만 국부추대 움직임은 위에서 언급한 전자와 후자의 역사적 견해가 갖는 문제점이 집약되어 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위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 내지는 그 사역인(使役人)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세력을 대표하고 창조하는 뛰어난 개인’이라는 것이다. 친일파들을 중용하여 정치적 권력의 바탕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하여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하는 등 사회정의를 왜곡한 일. 자신의 정치 앞날에 걸림돌이 될 만한 능력 있는 인사들을 사법살인하거나 암살하는 일을 방조 혹은 묵인한 일. 자신은 전날 안전한 곳으로 미리 피해 있으면서 6월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녹음된 목소리로 기만방송을 계속하여 서울시민의 대부분이 적 치하 서울에 갇힌 채 유명 인사를 포함한 상당수가 납북되거나 적지 않은 시민이 본의 아니게 부역을 하고 처벌을 받게 한 일. 권력의 화신이 되어 각종 부정선거를 획책한 일. 일제하 미국에서의 이해하기 힘든 행적들 등등. 이승만은 단언하건데 위인이 될 수 없다.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쳐대던 이승만의 얼굴 위에 전시작전권도 없는 처지에 북한 도발의 원점타격을 외치는 인사의 얼굴을 겹쳐보는 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이미 잘 알려진 6·25 발발 당일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복기(復碁)는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한 단계 도약의 계기가 될 테니까. 
 1950년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공격명령에 따라 11개 지점의 38도 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242대의 T-34 소련제 탱크, 170여대의 전투기를 가진 20여만 명의 북한군 병력에게 탱크나 전투기 한 대 없었던 국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기는 고사하고 우선 병력이 부족했다. 상당한 병력이 6월 24일 그동안 계속 되던 비상경계령이 일제히 해제되면서 농촌 모내기를 위한 2주간의 특별휴가를 떠났거나 휴일을 맞아 외출한 상태에서 6·25를 맞은 것이다. 군 수뇌부의 상황은 좀 더 심각했다. 6월 24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는 저녁 6시에 시작되어 전쟁이 터진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지휘부는 만취상태로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비상상황을 맞은 것이다. 개전초기 대응이 원만할 리 없었다. 결국 6월 28일 이른 아침 국군은 서울을 내주게 된 것이다.(『6·25 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 참조) 1129일 동안의 전쟁에서 현재의 휴전선을 지켜낸 것은 각자 한 사람의 자국 국민이었을 외국의 젊은이와 숫한 우리국민들의 희생의 대가였다. 국민을 위한 전쟁은 없다.
 전쟁 전부터 대립된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주 4·3 사건이다. 제주 4·3사건과 6·25전쟁 중에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들의 숫한 희생, 광주5·18 비극의 연장선상에서 월남에 파병된 우리 군 작전지역 내의 월남민간인 학살에 접근해 보려는 시각도 있다.(이규봉,『미안해요 베트남』) 이러한 시각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역시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E.H.카,『역사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원인을 밝혀 그 근본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