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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닥칠 어제의 문제-교회 문을 닫게 할 수도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태도

<방언을 삼가고 예언에 힘쓰자>

동족을 이족(異族)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피의 유월을 보내며
최근 한 여론 조사 결과 보도를 접하며
나는
최근 큰 충격을 받았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 인식이, 
혐오와 정죄의 대상이라고만 여겨 왔던
우리네 이념적(?)으로 착색된 
독단적(교리적) 정서 Dogmatic emotion 와는 
전혀 딴판임을 
통계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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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동성결혼 합법화 66% ‘찬성’, 
동성애는 사랑 81% ‘그렇다’ 
전투적 동성애 반대 운동, 감성적 청년층 공략에는 어려움 야기(아이굿 뉴스 정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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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에 대한 교리적 정죄가 승한 개신교에 여론 선도자 그룹에 속한 나로서는, 위 통계를 그냥 외면해 버릴 수는 없었다.

특별한 유월이다.

그간 페북에 포스팅해 놓은 과거의 글이 떠올랐는데, 기이하게도 지지난 해부터 매년 유월에 연례행사 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나는 써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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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해 유월
2015.06.27일

방금, 날카롭게 귀에 파고 든다.

미연방대법원에서 5:4로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을 했고, 그동안 거부해 온 미시건 주를 비롯한 미전역에서 이젠 동성애자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오바마가 쌍수를 들어 환영했노라는,

내가 지난 달에 밟았던
청정 지역 미시건까지도 
이제 후로는

그 한심한 판관들의
오독과 오심을 따를 수밖에 없단다.

슬퍼말자^^

저건
임박한 재림을 재촉하는
도저한 신의 세속화의 일환일 뿐

하늘 당신의
뜻에 합한 기도를 올리자.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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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유월
지난 2016.06.11(토)
성소수자 축제 '퀴어문화축제' 개막,에 부쳐

성소주자들의(of) 하나님
성소수자들을 위한(for) 하나님이시기도
하겠지만

성소수자들에 의한(by) 하나님은
아니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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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유월
지난 2017.06.14(수) 10:00 p.m에 
나는 태국 파타야PATTAYA에서 

<성소수자도 기숙하는 동네에 왔다>
(전략)
공의란 히브리어로 '째다카'다.
째다카 란 '올바른 관계'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어 주는 거
그게 성경이 말하는 공의다. 오늘 

공의란 결코 정죄하는 데 있지 않다.

원하지 않은 것이지만
죽어 버릴까 봐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통분의 눈물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 지켜야할 것이다
(후략)
*******

이에 대해 페친 장정호 님께서 
"죄송하지만 글의 내용이 자비는 있지만 진리는 없어 보이네요"라는 답글을 올렸다.

아니다.
나는 내 교리적 입장이 변한 게 아니다.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복음적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진리가 뭐냐?

진리는 예수다.
예수가 진리다.
온 인류의 구주이신 나사렛 예수가 
진리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막2:17)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하신(요8:11)

고린도전•후서를 읽다가
우리네 독선적으로 보이는 교리적 정죄에 대한 사회적, 특히 청년 층 사이에 육감적 반감이 팽배한 이유를 발견했다. 그리고 대화의 기술도 찾아냈다.

<방언>
에 대한 바울 사도의 견해가 그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삼가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방언은 혼잣말이라는 지적이다. 자기네들끼리 자기들도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쏟아내는 집단을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하지 않겠느냐고, 거친 말로 방언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의 교리적 정죄를 세상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하고, 저게 무슨 방언이냐며, 외려 교회가 미쳤다고 반기를 들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신령한  방언이 사람 사이에 있어 불통의 언어이듯, 신령한 교회의 목청이 세상에는 달아오른 핏대로만 비쳐지고 있는 것 아닌가?

교회의 전투적 시위에도 불구하고
20대의 66%, 무려 81%가 
동성 결혼과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 
그 근거가 아닌가 말이다.

고전 14장 14절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나의 마음은" 여기서 마음은 이성이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열매가 없다" 즉 나의 이성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또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는 경우에 의식이 소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주관적, 반이성적 방언으로 저들을 대한다는 말이다.

반면
예언의 말씀은 믿음을 일깨우고 굳게 하므로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신약 279, 281 p. 관주 해설 성경 전서 개역개정판 독일성서공회 해설 2004 대한성서공회)

-불통에서 소통으로-

<예언을 하라>
그래서 쌍방적 소통의 언어인 예언을 하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동서 14장에 바울 사도는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예언이란,
신약 성경에서의 '예언'은 미래에 대한 선견이라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특정한 상황을 겨냥한 전권적인 언설을 뜻한다.(신약 279, 281 p. 관주 해설 성경 전서 개역개정판 독일성서공회 해설 2004 대한성서공회)

그리고 알아 들을 수 있는 <예언>도
곱게하라 하신다.

전권적인 언설이란, 
상대방에 대해 최대 한도로 예의를 갖춰 인격으로 높이며,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하늘 특명을 받은 외교 사절의 언사가 아닐까?

고린도후서의 설득의 기조대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를 발하듯 예언하라 하심이 아닐까? 정죄부터 해놓고 윽박지르는 심판관 같은 태도가 아니라, 너희(상대방) 믿음을 주관하려 들지 않는(고후1: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는 애정이 선행되어야 함이 아닐까? 

고린도교회도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 속에 자리한 
그 속된 영향력에 물든 교회였다
그러나 
예언도 고린도후서의 분위기로 일러 주라
함이다.

신앙은 태도니까.

우린 십자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니까!!
천국의 전권대사니까!!

광화문에 나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머리에 꽂은 채
양손에 짱돌 움켜쥐고
인격 모독 일삼는 과격한 언사 내뱉지 말고
진리이신 예수처럼
먼저 
가만히 무릎을 낮춰 
땅에 그녀의 입장도 한번 정리해 보신 후,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고후1:4) 
예수를 증거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절실하게 
예수가 필요한 이들에게
말이다

하여,
우리의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고후7:10)
기적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종말이 급한
신의 세속화 작업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래도

2017.06.28(수) 오후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