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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1: 시/내 못난 주님 15/03/22

2017.03.22 06:39

김성찬 조회 수:49

2161:

2015.03.22
 
내 못난 주님.
 
성장통을 앓는 아이가 분리를 희원한다. 자연스런 세포 분열 같은 독립 선언서를 눈물로 읽어댄다. 안 된다고 운명 공동체인 가족인데, 사명 공동체인 목사 가족인데 어패가 있다고, 너도 나눠져야 할 사명의 짐이있다고, 아이에게 생 떼 같은 짐 지어 주며, 제 자리에 주저 앉힌다. 곱게 불어나는 아이의 몸집에 빈한 족쇄를 채우며, 나는 알량한 가문의 체면욕에 눈 먼 내 눈을 푹 찔러 댄다. 칠푼 아빠가 가시 울타리 된 영적 현실에 아이는 찔려 눈물을 쏟는다. 션찮은, 무력한, 무용한 목사, 그런 목사의, 교회도 아닌 교회가, 그 영적 탁월함을 추구하려드는 아이의 거룩한 욕망을 콱 짓누르고 있다. 울다 아이는 설득 무망한 절망적 현실에 눈물조차 말랐다. 벽 앞에서, 에비가, 목사 에비가 옹벽 된 현실 앞에서 영적 성장에의 의지를 일언지하에 꺾인 아이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다. 밤의 적막조차 질식사할 만치.
 
성장통을 앓던 이들은 죄다 날 타고 넘었었지. 성장 촉진제는커녕 성장저해요인일 뿐인 왜소하고,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같은 나를 다들 견뎌낼 수 없었다며, 민들레 홀씨 되어 훨훨 날아들 갔지. 사태 후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큰 물, 큰 고기들로 성장했다더군, 다들, 죄다.
 
그러나 그런데 내 아이라서,
족쇄
그 자체인 에비라서 
아이는 발만 동동 구르며
만삭의 몸을 풀 곳조차 거부 된 산모처럼
껍질이 째지는 숭고한 분리의 아픔조차
억제하려드는 순 억지에
열 달을 이미 넘긴 무르익은 밤을 
가위 눌린 채, 뜬 눈으로 지새고 있다.
아이가.
.
.
나도.
 
오늘 씨받이 주일
어느 길찾는 영혼을
의의 길로 안내해야 하는 
예정 된 하늘 소명조차
가로 막아 선
허울 좋은 운명, 사명 공동체라는 
삼팔선 명분 된
이 에비를
울어 주지도 못한 채
제 몸의 수용소에 억류당하던 통한의 예레미야처럼
 
벽 된
뒤주 된
이 영조(靈祖) 때문에,
 
소스라치듯 깨어 난
새벽을 울며
탄원해 댄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자초한 
이 처참한 무대
이 잔혹한 실제 상황 앞에서
 
모든 것 
내려 놓을 힘도 없는
이 무기력한 자기 연민에 빠진
허울 뒤집어 쓴
이 허당은
 
물 넘은,
다 익은 아이는 
어찌해야 하나요?
 
내 못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