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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 칼

2014.09.03 15:02

김성찬 조회 수:607 추천:10



영혼일기 1546 : 칼

2014.09.03(수)

 

나는 요즘 이승우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다. 아까운 시간이란, 돈 되는 의무적인 일을 재껴두고 이승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돈 되는 의무적인 일이나 이승우에 빠져 있는 일이란, 책 읽기다. 그런데 나는 의무적인 책읽기를 재껴두고 그 누구도 의무를 지우지 않는 이승우에 빠져 있다. 긴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고 제자 훈련 반에서는 목청 높여 구호로 외친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일을 분간치 못하고 있다. 의무를 먼저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뭐가 마려운 듯, 나는 일탈을 강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막사를 벗어나 애인에게로 질주하는 몸 단 탈영병 같다. 입에 당기는 것이 정말 몸이 원하는 것, 몸에 결핍 된 것이라는 말처럼. 둘 다 원초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이다. 전자는 배설의 쾌감을 득하려는 거고, 후자는 순리적인 섭생의 욕구다. 둘 다 프라이머리 니즈다. 의무를 가능케할 원초적인 힘을 충족시켜 줄 원초적 욕망이다.

그래 의무는 정보다 강하지만, 의무는 원초적 욕구를 범할 수 없다. 의무는 원초적 욕구가 충족된 자리에서만 꽃필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내 구미를 끌어당기는 것. 그 원초적 욕구를 나는 충족하느라, 그냥 배깔고 누워 이승우를 맹렬히 섭생하고 있다. 엉덩이가 부실해, 배로 책을 읽느라 나는 아침 금식을 한다. 배를 탄수화물로 채워 놓으면, 복압이 심해져 시간을 이겨낼 수 없기에. 절식하며, 나는 쟁투한다. 칼을 품은 듯. 

엊그제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가닿을 수 없는, 내일에나 먼 훗날 죽기 직전에나 이루길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썼다. 완전에 이르고픈 시점을 내일로, 종말로 미룬 이유는 내가 품고 있는 '칼' 때문이라고 나는 진솔하게 고백했다. 나에게. 비록 그게 공의의 칼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의 피를 그 '칼'에 묻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할 수밖에 없는, 살해 도구인 '칼'을 내가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시방 이를 수 없는 자임을 자뻑했다. 

 

그랬으면서도, 나는 다른 한 편으로 의무감으로라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경건서적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하기로 했다. 어제는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 생활의 헛됨에 대하여',를 묵상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요한복음8:12)." 전제하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는 자는 세상의 빛되신 예수를 따르는 자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지혜는, 세상사(世上事)를 멸시하고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본문을 조합해 보면 이상과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사를 멸시하라고 해 놓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은 어떻게 연관지어 해석해야 하는가? 광야가 아니라 저자거리가 예수의 활동 마당이 아니었던가?

크리스천 리얼리즘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그 권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퍽 힘든다. 더군다나 늘 칼을 품고 있는 내가 아닌가?

소설은 간지럽다. 소설은 직선적이지 않아서 예술이다. 그러나 내 취향에 맞지 않다. 명예훼손 운운 하는 시비를 받을지라도, 나는 일기를 쓴다. 예술할 기술과 체질이 못되기 때문이다. 죽어도 고우. 나는 태생이 철옹성 영변의 정기를 타고 났고, 근성있는 목포 태생이다. 칼을 칼로 쓰는 사람이지, 칼로 낯간지러운 예술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적에 맞게 도구는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 내가 이승우의 소설을 읽고 있다.
이책 저책 뒤적이다가, 「칼」을 만났다.

나는 지금 '칼'을 쥐고 있다. 지난 교단 총무 선거 기간 중에 그 누가 나와 너에게 벌인 사특한 부정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나다. 순정을 바친 호의와 믿음을 배반한 그 인간에 대한 송사가 내 몫이 되어 버렸다. 나는 '칼'을 품고 작금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런 인간을 지지한 벌레들 낯짝 화끈거리게 해 주고파서. 그런 간악한 종자를 보호한답시고, 빌붙어 이권이나 챙기려는 간교한 무리들에게 면박을 주고 싶어서. 더 큰 뜻의 교단 정화를 위해서, 아니 그 가련한 목회 일생이 애처로워서 전심으로 그 약점을 커버해 주며, 순정을 바친 나를 협박하고, 회유했다는 사실이 이해 되지 않아 용납하기 어려워서. 소름 돋는 사태, 본질상 진노의 종자, 어둠의 자식, 멸망의 가증한 것이 그 거룩한 곳에 선 ㅠㅠ

그 누구는 나에게 칼을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 내일을 잃지 말라고, 내일과 거래하라고 권면한다. 반면 그 어떤 이는 나에게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부추긴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권면한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서 소리지르지는 않는다.
이승우 식의 진단이다.('하지 않은 일')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믿거나, 신뢰하거나, 그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늘 그래왔듯 내 이해 득실이 아닌, 그 참 뜻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그런 나에게 「칼」에서 이승우는 '칼'에 대해 말을 건넸다.

"내 고객들은 모두 심약한 사람들이야. 누구보다 약하고 억눌린 게 많고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칼을 모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칼을 수집해야 할 정도로 약한 거지.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칼을 소지하는 거야......"

(칼을 지니고 있으면 그누가 나를 쓰레기나 깡통이나 돌이나 똥이라고 부르는 참기 어려운 모욕 앞에서도 내가) "쓰레기나 깡통이나 돌이나 똥이 아니라는 확신 같은 걸 주기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든 깡통이든 돌이든 똥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아진다고, 칼은 나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할 뿐 남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이 칼이라고, 누구나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고.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사람들이 그걸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싶어서 오해한다고 대답했다."

칼을 품은 연약한 존재. 역설이다.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린 베드로는 매우 심약했다. 어린 소년 앞에서 자신의 억양을 숨겼다.

"우리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대는 누구보다도 그대 자신이 가장 연약한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제 2장 겸손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장 심약한 나에게, 바로 그 내 손에 '칼'을 쥐어 준 당신은 누구신가?

골리앗 면전으로 내 몬 당신의 다윗인가?
나는?

나는 약한 자이다.
그러니 나를 '위해' 권면만 말고,
니들 중에 그 누구라도 나를 '대신해서' '칼'을 휘둘러 다오.

하여, 나로 예술 좀 하게 하라.
인생을 예술처럼 살게해 달라.

하늘이여, 땅이여~

나도 안다.
칼의 위용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라는 사실을.

거지 왕자를 거지라고 불러도, 그가 왕 거지로 당당했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고 나무라신 후,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복음26:53-54)”고 당당하게 칼집에 칼을 꽂듯, 수난을 제 것 삼으신 것처럼,


그 말씀을 이루는,

칼집의 칼로, 나도 당당하고 싶다.
레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