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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 치명적인, 거기 환도뼈에서?

2014.09.16 23:49

김성찬 조회 수:1189 추천:9



영혼일기 1560 : 치명적인, 거기 환도뼈에서?

2014.09.16(화)

 

지난 십 여 년 동안 내 형편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자면,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 할 수 있다.


좌불안석(坐不安席)이란, 앉아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다는 뜻으로, 마음이 불안하거나 걱정스러워서 한군데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을 이르는 말.


심리적으로도 그랬지만, 특히 물리적으로 나는 그 어디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정쩡한 상태는 이후로도 주욱 계속될 전망이다. 우울하다.


병원엘 갔다. 동네 작은 병원을 전전하다가, 나는 오늘에서야 첨으로 대학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련한 정형외과 고관절 담당의사는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더니 엉덩이 뼈 삼각주 부분을 가리키면서, 바로 그 부분이 앉는 바닥과 맞닿으면서 발생하는 통증이라고 했다. 그 엉치 뼈를 둘러 싼 부위에 물주머니가 있어서 쿠션 역할을 해주는데, 내 경우 엉덩이 살이 너무 없어 그 물주머니에 염증이 생긴 거라고 진단했다. 앉는 것을 가급적 삼가고, 앉을 경우 반드시 폭신한 의자나 바닥에 앉아야 한다는 처방만 내렸다. 동네 병원에서는 주사도 놔 줬다고 하자, 자기는 그런 처방을 하지 않는다며, 집에 가서 날마다 3분 정도 뜨거운 물로 좌욕을 하라면서, 내키지 않는 듯 내복약도 2주 분량만 처방해 줬다. 날 우습게 본거다 병력 10년인데, 겨우 2주 분량의 약이라니.


그 의사가 정확한 병명은 일러주지 앉았지만, 나는 그 병이 좌골 점액낭염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지난 십 여 년 간 고질화 된 그 증상으로 매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앉지 말라니. 서 있거나 누워 있어야만 하는 난처함이 바로 내가 겪는 병이다.


그런 만성화 된 염려와 기대를 안고, 오늘 병원을 오가던 중 이 단어가 내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아킬레스건(Achilles腱). 아킬레스건이란, 발꿈치 힘줄(종아리 뒤쪽에 있는 장딴지근과 가자미근의 힘줄이 합쳐)을 가리킨다. 이는 치명적인 약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치명적 약점’이라고 일컫는 아킬레스건이란, 이런 어원적 유래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킬레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다. 테티스는 제우스와 사랑을 했지만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그 이유는 테티스가 낳을 아들이 그의 아버지 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 될 거라는 예언 때문이었다. 테디스는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하게 됐고 그 사이에서 아킬레스를 낳는다.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스를 영원히 죽지 않는 몸,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려고, 스틱스 강물에 아들의 몸을 담근다. 그 강물에 몸을 적시면 그 어떤 무기로도 그 몸을 뚫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그 강물에 담근 아킬레스를 하녀가 물에서 건져내느라 어쩔 수 없이 붙잡은 부분이 있었다. 그곳이 발꿈치 힘줄 부분이다. 바로 그곳이 죽지 않는 신체를 지닌 아킬레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부득불 불사신(不死身) 아킬레스도 이렇게 약점을 지니게 됐고, 그 후 트로이 전쟁에 나선다. 그 결과 트로이 전쟁 중에 그의 약점이 적장에게 간파 됐고, 적장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그의 발뒤꿈치에 화살을 쏘아 아킬레스를 무너뜨린다. 그를 무너지게 한 ‘치명적인 약점’ 그곳을 사람들은 아킬레스건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는 나의 고관절 엉치 부분을 나의 아킬레스건이라 여기게 됐다. 그때, 그 시절. 나는 극렬히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엉치로만 세상을 견뎠었다. 엉덩이로만 나는 세상을 떠받히고 있었다. 내 살점 거의 없는 빈약한 엉덩이로 나는 한 세상을 버텼다.


발꿈치 힘줄에 의지해 불사신(不死身)을 제조하듯, 신(神)은 내 고관절 엉치뼈를 지렛대 삼아 나를 세상으로 견인해 내셨다. 야곱의 환도뼈(고관절)을 무력화 시키신 후,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 곧 새 사명을 주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내 경우 고관절 삼각주를 절단 내신 후, 불구덩이에서 끄집어 내주셨다. 그러나 화마는 아직도 그 불길이 다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직도 미진하지만, 구사일생 나는 다시 살 기회를 얻어냈다. 순전히 엉치뼈 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엉치뼈는 나를 건져 내느라 기력을 다 소진해 버렸다. 그래서 아프다. 더 이상 그 이픈 곳을 의지하지 말라고 몸부림쳐댄다. 이제 두 발로 서라. 방 밖으로, 문밖으로 나서라. 걸어라, 뛰어라. 제 육신의 형편에 걸 맞는 사명을 찾아, 살라. 명하고 있다.


카이로스라는 기회로서의 시간은, "오래 전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곳을 가리키는 공간의 자리였다." 그렇다. 사진미학의 완성자,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프랑스, 1908 ~ )의 사진첩 서문에서 장 끌레르(피카소 미술관장)는 카이로스를 공간의 자리라고 일러주고 있다. "예컨대 카이로스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글에서 때때로 생사가 달린 상처받기 쉬운 곳이자, 발병 지점인 아픈 신체 부위를 가리킨다."


그 발병 지점이 곧 내가 한때 칩거했던 엄정 독거 방이었다. 그 폐쇄 된 공간에서 칩거하던 때 내 엉치 뼈가 홀로 그 공간을 버텨냈다. 그 공간이 내게 있어 카이로스적인 공간이었다.


"죽음이 무엇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듯이 그 흉갑의 틈과 같은 것, 그런 치명적인 지점이 신체에서 카이로스에 해당 된다."


그러나 하늘 당신은 그 공간지기로 전락한 나를 못견뎌하셨다. 하여 카이로스, 내 신체 치명적인 지점으로 당신은 개입해 들어오셨다. 더 이상 앉아 버틸 수 없는 형편으로 나를 내몰았다. 공간이자, 시간이기도 한 당신의 카이로스로 나를 문밖으로 내몰았다. 그랬어도 영감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내 오감은 입때껏 하늘 당신이 내 환도 뼈를 짓무르게 한, 그 공간적 개입의 참 의미를 분간하지 못하고 살았다. 분간 못한 게 아니라,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눌려 있었다.


그 방에서 나와!


그랬어도 눌린 나는 나를 버티고 있었다. 버티는 만큼 치명상은 더 악화될 뿐이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당신.

나는 그런 당신이었다. 여전히 그런 당신이다.

그렇게 십여 년 세월이 흘렀다.


병원에서 돌아오다가 90도로 허리가 꺾인 노파의 곁을 스쳤다. 저 공간이 저리도 모질게 휘어져 버린 연유가 분명 그 어디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전략)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략)"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中-


그 언젠가 TV에 나온 정형외과 의사가 동일한 자세를 15분 이상 유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어떤 자세든 15분마다 자세를 조금이라도 바꿔줘야 정형(整形)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15분마다 움직여라, 다리를 꼬든, 비틀든, 떨든. 움직이지 않으면, 돌이 된다는 말이다.


그 카이로스로서의 공간에 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그 무엇에 난 분명히 15분 이상 매였던 게 분명하다.

지금도 그 무엇에 15분 이상 매여 있다.


내 영(靈)은 외친다.

풀어 놓아 자유케 하라!


더 이상 두려움에 매이지 않고,

일어나 전진할 수 있었던 야곱의 힘은,

비록 부러져 절룩거렸어도

그가 받아 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 새 사명에서 솟구쳐 올랐던가?


치명적인,

거기 환도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