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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독하게 버리고 간절하게 만나자"

2014.09.20 18:35

김성찬 조회 수:488 추천:8





영혼일기 1564 : "독하게 버리고 간절하게 만나자"

2014.09.20(토)

 

문우(文友) 연안부두 정삼열 목사가 성결네트워크에 칼럼을 쓴다. 매일 쓴다. 목회를 10년 이상 일찍 접고 향리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즐기며, 날마다 전원일기를 쓴다. 그의 전원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가 전원생활을 즐긴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다. 그는 대지와 사투를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인적인 노동 투쟁은 도에 지나쳐 보인다. 그러나 그는 노동하는 재미로 전원을 사는 사람이다. 정말 미욱해 보일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땅과 씨름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노동의 신성성을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땅의 정직성을 그를 통해 배운다. 땅은 대가를 치룬 만큼 반드시 보답을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의 땀과 정성으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엊그제 그의 칼럼,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읽었다.


“우리는 정리라는 단어를 너무 좁게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람관계에서나 새로운 곳으로 갈 때에도 남겨진 것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 '혹시 모르니까'라는 미련에 불필요한 것까지 껴안고 있었다면 삶이 점점 고단해진다.


사람 사이에도 정리는 필요하다. 휴대전화 번호 목록이나 명함 케이스에 가득 찬 명함이 자신의 인맥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흔에 꼭 만나야 할 사람 버려야 할 사람』의 저자 나카야마 마코토는 인맥 정리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독하게 버리고 간절하게 만나자"라고 말한다.”


나는 그가 인용한 나카야마 마코토의 강변, "독하게 버리고 간절하게 만나자"라는 구절에 눈길이 한동안 머물렀었다. 내가 그 구절에 눈길을 준 것은, 작금 내가 그 인적청산에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봄 사람들의 숲을 뒤집고 다녔었다. 나는 그 ‘사람 숲’을 헤쳐 오면서, 이제 내가 버려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별해 내게 됐다. 그들은 나에게 그 어떤 측면에서라도 빚은 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게 진 빚 때문에, 빚을 다소라도 갚아야 할 순간에 오히려 등을 돌렸다.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나를 외면했다. 내가 그들의 손에 쥐어 준 빚 문서가 외려 그들을 부담스럽게 했고, 어떻게든 빚을 지면서 내게 당한(?) 섭섭함만을 앞세워, 내가 피 흘려 베푼 그 큰 희생을 외면하면서 내게서 등을 돌렸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말씀 앞에 서보니 내 반성이 앞선다. 그래 반성한다. 말씀이 옳다. 오른 손이 한 일을 반드시 왼 손이 모르게 해야만(마태복음 5:39), 그 희생이 참 가치를 드러내는 거라고. 나는 분명히 저급하게 기브앤테이크 식으로, 내게 빚진 자들의 자발적인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었다. 그만큼 내 형편이 절박했고, 홀로 힘에 겨웠던가 보다.


그랬으나 다른 한 편의 위로가 있었다. 일면식도 없었고, 나와 그 어떤 거래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아무런 부담 없이 물심양면으로 나를 흔쾌히 도와 줬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는 자의 배려. 그것은 나에게 생경하고, 순수한 기쁨을 선사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나는 뜻밖의 지지와 환대로 매우 기뻤고, 행복했었다.


사람 숲을 헤쳐 나온 후, 나는 사람을 정리해야 했다.

사귐의 대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독하지 못하다.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앞 끝은 있어도 뒤끝이 없다. 이는 내가 의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인정에 약한 정적인 매우 무른 사람이라는 말이다.


오늘도 그랬다. 오전 일찍부터 산책을 다녀 온 후, 책상에 앉아 나를 영적으로 정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원했다. 나는 응당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난 나도 모르게 뒤끝을 흐렸다. 결국 나는 불려나갔다. 나는 그 누구도 독하게 버리지 못했다. 인적 청산은 지은 맘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내가 내게 환기시켜준 해프닝이었다. 맘 따로 몸 따로, 나는 갈지 자 걸음을 걷고 있다.


관계를 맺고 이어간다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나는 그 어떤 모임, 모임마다 어쩔 수 없이 구심점이 된 사람이다. 그동안 내가 관계한 모임에서 그 회원들의 지지와 기대와 격려 속에 그런 자리를 점해 왔기 때문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속에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활용해 합리적인 판단과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그들이 나에게 원한 것은, 내가 그들보다 좀 더 가진 관계와 정보에서 우러른 합리적인 판단과 새로운 혁신을 이룰 방안을, 늘 제시하기 때문이다.


“동지를 믿고 속아라.”


이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 중에 나오는 동지를 대하는 자세다.


대한 사람이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 대한 사람의 글을 믿는 날에야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얼굴을 반가와하고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으로 더불어 합동하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동지를 믿고 속아라.


만일 너도 한국을 사랑하고 나도 한국을 사랑할 것 같으면 너와 나와 우리가 다 합하여 한국을 개조하자.”


동지를 믿고 속아라. 그랬다. 동지란 믿고, 속는 존재다. 그러나 그런 존재라도 믿어줘야 하는 것은, 너도 나도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조국을 사랑하는, 신앙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일에 한 뜻을 갖는다면, 우리는 힘을 모아 조국을 개조해야 한다.


큰 뜻을 위해 나를 속인 이들을 품어야 한다.

그래, 나는 의(義)에 약하고, 대의(大義)에 늘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아 왔다.

그래서 오늘의 외출을 나는 그렇게 정당화 한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보다 외출을 삼가고, 나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나 아니어도 세상을 정화시키려드는 용사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성결고전읽기에나 매진하면서 성령 안에서 나를 침잠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잘될는지 모르겠다. 워낙 오지랖 넓게 천방지축으로 활보했으니,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적잖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 누구누구를 ‘독하게’ 이미 버렸다. 상대하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더 간절히 만나고 싶은 이들, 순수(純粹)를 좇는 가난한 이들, 심령만이 아니라 부귀공명에 있어 가난한 이들의 살가운 벗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천성을 향하여 가는 영적 도반들을.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이들. 그런 동지들을 나는 간절히 만날 것이다. 그런 동지들도 적잖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다시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다.

“세상에 마음 놓고 믿는 동지가 있다는 것처럼 행복이 또 어디 있으리오.”


그래서 난, 오늘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