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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 말씀의 덫과 닻

2013.05.15 22:42

김성찬 조회 수:576 추천:6

영혼일기 1295: 말씀의 덫과 닻

2013.05.15(수)

 

부숴 버릴 거야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는 자기를 버린 이종원을 향해 내뱉은 증오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듯, 그녀는 끝내 이종원을 부숴버렸다.

청춘의 덫에서 말이다.

 

나는 오늘 말씀의 덫에 걸렸다.

 

부숴 버릴 거야

내가 내 자신에게 발한 자기 주문을 아내가 눈치를 챘는지, 나에게 강권을 했다.  

말씀으로 강권했다. 

 

그런데 아내가 나에게 제시한 그 말씀은 내가 끼적거려 놨었고, 사자후를 토하며 그 누군가를 윽박질렀던 내가복음이었다. 아내는 지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주보에 실린 글을 내게 내밀었다. 제목은 '부활의 참 권능'이다. 나는 지난 부활주일 이후 계속해서 '부활의 참 권능'을 주제 삼아 주일마다 설교해 왔다. 

 

그럼, 부활의 참 권능이 뭐냐? 고 나에게 아내는 물었다.

그러면서 주보를 내게 내밀었다.

 

주보에 게재된 그 내용은 이렇다.

 

「부활의 참 권능」

월계수는 향기 나는 나무입니다. 자신을 찍어 대는 도끼 날에 향을 토해내는.

 

예수의 부활의 권능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데 있습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죽음의 권세를 예수께서 이긴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긴 예수의 초능력적인 권능만이 부활의 권능이 아닙니다. 부활의 참 권능은 그 초자연적 물리적 부활 이후에 드러납니다. 

 

빈 무덤의 신비가 만인의 부활이 되는 신비와 능력은, 자신을 찍어 대는 도끼날에 향을 토해내는 월계수의 향기에 있었습니다. 부활 이후, 부활의 참 권능은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임했습니다. 부활 그 첫날 저녁,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1.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20:19).” 

그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거듭거듭(요20:19,21) 평강을 빌어 주신 예수님의 용서에 부활의 참 능력이 있습니다. 

 

2.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아라(요20:22).” 

숨 막힌 삶을 살던 제자들의 숨통을 터주신 예수의 인공호흡에 부활의 참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는 데에 부활의 참 능력이 있습니다.

 

3.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요20:23).” 

부활은 용서의 권능임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용서가 부활의 권능임을 일러 주십니다.

 

4.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요20:29).”

 부활의 참 능력은 보지 않고도 믿어주는 믿음에 있습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 

부활의 참 능력은 허기를 메워주는데 있습니다. 평범한 식물에 비범한 부활의 참 능력, 사랑이 있습니다. 

 

 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네가 너를 사랑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참 권능은 나를 실망시킨 대상에 대한 가없는 인정과 신뢰에서 우러른 사랑에 있습니다. 

 

7. “내 양떼를 먹여라(요21:17).” 

부활의 참 능력은 실직자에게 일을 주는 것입니다. 사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부활의 참 능력은…….」

 

이상과 같은 내가 주보에 게재해 놓은 글을 내밀면서, 아내는 특히 「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네가 너를 사랑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참 권능은 나를 실망시킨 대상에 대한 가없는 인정과 신뢰에서 우러른 사랑에 있습니다. 」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댔다. 아내는 "부활의 참 권능은 나를 실망시킨 대상에 대한 가없는 인정과 신뢰입니다."라는 부분을 내 앞에서 힘주어 거듭거듭 낭독했다. 

 

난감했다. 그 말씀의 덫이 바로 당신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설교는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그렇게 코를 씩씩 불면서 시비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뭐냐? 당신 정말 설교할 자격이 있어? 설교란 삶과 일치 되어야 하는 것 아냐? 그런 항의를 나에게 쏟아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누구하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고도 했다. 그 어느 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붙어서 보살피는 자신을 사람들이 그 누구의 수호천사라고 부르지만, 그게 아니란다. 그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모를 그녀가 돌보는 이유는 그분의 심성이 매우 고와서, 자신이 그 사모님에게서 배울 점이 참 많고, 진심으로 그분의 말씀과 일치 된 삶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항상 내게 있어, 생각이 별로 없어 뵌 아내의 적용까지 완벽한 설교(?)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매우 놀랐다.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이같이, 내가 우습게 보는 아내의 입을 통해, 오늘 선포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제시한 말씀이 내가 정리해서, 열변을 토했던 말씀이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수호천사론이 낯설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인 그녀는 그 순간 나에게 은혜를 끼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그녀가 내게 끼친 감동이 어색하고, 찝찝했다. 그래서 자존심이 좀 상해서 내심 거부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그리되지 않았다. 외려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그녀의 헌신을 남들이 힘들어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헌신을 희생이 아닌 배움으로 셈하고 있으니 말이다. 타인의 장점만을 바라보는 저 눈. 그럼 나는 뭔가? 나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그런 정도의 일시적인 감동에 속아 두 번 다시 후회할 일을 하지 않을 만큼, 나도 두터워졌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영혼들에게 용서를 먼저 선포한다는 것이 과연 참된 화해의 방법인가? 우리는 묻는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주는 상호 자신을 내려놓은 작업이 선행되어야 참된 용서에 이르지 않겠는가? 일방적인 자기 위안으로서의 사죄의 선포란, 결과적으로 자기 위안에도 이르지 못함을 나는 경험했다. 말씀에 부딪혀 그 누군가를 용서해 줬더니, 외려 자기가 온당하고, 잘나서 내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며 떠들어 댄 인간들을 대했던, 찝찝했던 경험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았다. 구원(舊怨)이 얽히고설킨 사람들 사이에서 다신 인 시비에 대해, 입장이 다른 이들로 부터 자기를 이해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잘 살아야지. 주관을 갖고. 남을 음해하지 말고. 적법성 여부로 판정해 버리기에는 그들 사이에 오간 심지어는 물리적 폭력까지도 역사는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있다. 나도 잘 몰랐던, 그리고 날 놀래키는 가해자들의 악행이 만천하에 다시 드러나고 있다. 참된 용서가 전제되지 않는 화해와 일치란 그래서 없는 법이다. 

 

나는 아내의 설교를 들으며, 맘을 정리했다. 나는 나에게 절충안을 제시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 절충안은, 내가 내일 아침에 있을 그 회합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나로서는 큰 양보다. 사실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해서, 나를 까닭없이 음해했던 이들에게,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할 판이었다. 내가 이 정도로 오늘 마무리하는 이유는, 뒤끝을 남겨 둔 이유는, 그들이 내게 범한 죄질이 더럽고, 심각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만큼 물러섰다. 

말씀의 덫에 걸렸다. 아니, 말씀이 닻이 된 거다. 

풍랑이 거센 먼 바다가 포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