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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 5·18 국론 분열

2013.05.18 22:07

김성찬 조회 수:652 추천:6

영혼일기 1299 : 5·18 국론 분열

2013.05.18(토)

 

"드레퓌스 사건은 법정에서, 선거에서, 거리의 카페에서 그리고 세계의 신문 제목에서 언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프랑스 정치를 분열시켰으나 프랑스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5·18 국론 분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행사에서 부르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논란으로 5·18 민주항쟁 기념식이 두 쪽이 났다는 기사들을 대한다. 그뿐만 아니라, 종편 T.V 조선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 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광주 시민들을 선동 했다는 해괴망측한 탈북자의 근거 없는 폭로(?)가 방송을 타는, 5공으로 회귀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참모 본부에 근무했던 드레퓌스 대위가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독일 대사관에 팔아 넘겼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에 처하게 된 일이 발단 된 사건이다. 그러나 정작 그 정보를 독일 군에 넘기 사람은 프랑스 귀족 출신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대령이었다. 군사 기밀 누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던 중, 프랑스 참모 본부는 에스테라지 대령이 범인임을 알아차렸으나, 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유태인인 드레퓌스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음모는 발각 된다.

 

나는 막스 디몬트의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치를 분열시켰으나 프랑스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구절에 언더라인을 해 본다. (『유대의 역사』)

 

국론 분열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국론 분열이 해당 국가의 정치적 승리로 귀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론 분열이 정의를 가려내기 위한 분쟁일 경우는 더 그렇다.

 

그러나 국론 분열이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려면 적어도 프랑스 정도는 되어야 한다. 프랑스라 함은 국가적 음모를 파헤칠 혜안과 그 음모에 맞선 용기를 지닌 양심적 지성인이 존재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행동하는 양심을 지닌 지성인의 수는 단 세 사람이면 충분했다. 

 

한 사람 - 먼저, 프랑스에는 자신이 맡은 직무를 통해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알게 된 직업 군인인 정보부장 조르주 피카르 대령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카톨릭 교도였다. 그는 진실을 은폐한 군부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기의 지위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 비밀을 빼낸 스파이로 몰린 유대인 드레퓌스. 조르주 피카르 대령은 그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희생양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한 유태인의 무죄를 운운하기에 앞서 국가가 개인에 대해 음모를 꾸밀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옛날의 예언자처럼 자기 몸의 안전보다는 정의를 택했다.

 

두 번째 사람 - 유명한 소설가 에밀 졸라. 1898년 1월 졸라의 유명한 '나는 탄핵한다'라는 제목의 편지를 클레망소 신문 제1면에 실렸다. 파리 시민들이 앞을 다투어 사서 보았기 때문에 신문은 50만 부나 인쇄를 해야만 했다. 그 편지에서 졸라는 군이 자기의 오명을 가리기 위해 드레퓌스에게 고의로 모의했다고 정부와 군을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인간에 대한 대역죄'라고 규탄하고 허위와 정의의 타락을 비난했다.

 

세 번째 사람 - 언론인 조르주 클레망소. 「오로르」지(紙)의 발행인이며 아메리카의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즈 S. 그란트 장군에 대한 기사를 쓴 신문 기자. 

 

이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밝혀내는 데 몸을 내던졌다. 그들은 한때 국가와 군부에 의해 국론 분열주의자들로 매도 되었으나, 그들은 프랑스에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국가적 규모에서 정치적으로 조작된 최초의 반셈주의를 좌절시켰다. 1906년 프랑스 최고 재판소는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를 석방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최초로 인지했고, 자신의 지위를 걸고 의분을 발한 정보부장 피카르 대령은 그 후 빛나는 출세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장군이 되고 군사담당상이 되었다. 소설가 졸라는 두려움을 모르는 투쟁으로 말미암아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인 클레망소는 수상이 되고 베르사유 강화 회의에 프알스를 대표하여 출석했다. 

 

이것이 프랑스였다. 권선징악의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 같은 정치적 승리를 프랑스는 구가했다. 그런데 작금 해괴한 5·18 국론 분열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거꾸로 돌리는 5공 회귀를 찬양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지역차별주의자들과 극우반동세력들의 시대착오적 도발은 일본에도 영행을 미쳤는지,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조선반도 침략을 부인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다. 하기사 종군위안부에 대한 우리의 항의에 대해 그들은 룸살롱 운운하며 물타기를 해대고 있다. 그런 반론에 힘을 실어 준, 청와대 수석 대변인의 미국에서의 추행은 우리에게 할 말을 앗아 갔다.

 

나는 다시 한 번,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치를 분열시켰으나 프랑스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구절에 다시 밑줄을 힘주어 그어대보지만 확신이 임하지 않는다. 

 

여긴 프랑스가 아니고 후後 통일신라가 임한 봉건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이 땅엔 역사 앞에 양심적인 피카르 대령도, 에밀 졸라도, 언론인 클레망소도 없기 때문이다. 지성을 갖춘 용기 있는 기독교도 피카르도, 에밀 졸라도 없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 유대인과는 달리 최후의 심판을 믿는 이 땅의 기독교도들은 오늘 내가 침묵해도 좋은, 내일 내 손대지 않고도 해결되는 종말론을 신봉하고 있기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걸까? 역사 의식 없는 목사들이 득실거리는 판에 무슨 선한 것이 기독교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국가가 단지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희생양을 삼은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가 정의를 무시할 수 있는가 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1894년 그 때까지만 해도 한 개인에게 가한 부정이 세계의 비난을 살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역사는 퇴보를 거듭해 특히,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의 대한민국은 갈수록 혼미해져, 시간이 흐를수록 이 땅은 왜곡과 혐의 뒤집어 씌우기로 일관하는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교훈을 망각한 20세기 나치 독일은 천인공로할 인종차별주의 드라마를 완성했지 않은가?

 

1987년 이후 잠간 반짝였던 민주화 운동은

MB정권이후 숨통이 막힌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만이 5·18을 민주항쟁이라고 입증하는 것 말고는,

우리 안에 깨인 에밀 졸라는 없다.

 

옛날의 예언자처럼 자신의 몸보다 정의를 택한

목사들이 이 땅에는 없다.

 

산자의 하나님을 따르는 산자가 없다.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 유대인 

드레퓌스는, 

살아 

이 땅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06년 프랑스 최고 재판소는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리고 그는 소령으로 승진하고, 레지옹 드누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을 믿는 이 땅의 기독신자들은

5·18에 대한 평가를
내일로 미루며

오늘

불의에 자진 맹종하고 있다.

 

그 최후의 심판이 불의한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음도 눈치 채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