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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 성결네트워크 논객(?)들에게 고함

2011.10.22 12:16

김성찬 조회 수:2343 추천:26

영혼일기 832: 성결네트워크 논객(?)들에게 고함
2011.10.22(토)

성결네트워크 논객(?)들에게 고함

작금,「성결네트워크」 댓글 란을 뜨겁게(?) 달구는 학위문제에 대한 시비는, 사이버 언론 논객(?)들이 지녀야 할, 금도(襟度)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다고, 나는 여긴다. 심각하다. 당사자의 실명은 물론이고, 그분들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명까지 올려놓아 개인적 명예훼손을 물론이고, 그분들의 목회에 까지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행을 그들은 저지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사이버 언론 매체가 현대판 신문고(申聞鼓)이거나, 스크림 룸(Scream Room)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정당방위가 아니라, 악의적 도발에 가깝다.


전제하기를, 나는 국내외 학위과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하여 내 상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이의제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정리해 본다.

인터넷 댓글란을 뜨겁게 달구는 내용은 두가지다. 하나는 학부의 학과 기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원을 진학할 수없는 학과 출신들이 박사 학위를 받았으므로 그 박사학위가 다 가짜라는 이의 제기다. 

먼저, 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댓글들에 거명된 분들이 고의로 학부의 학과를 고쳐 쓰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건 편집과정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한다.

둘, 대학원을 진학할 수없는 학과 출신들이 박사 학위를 받았으므로, 그 박사학위가 다 가짜라는 이의 제기에 대한 답이다. 

그 댓글들에 거론 된 분들이 거의 미국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들 같다. 미국 학제의 경우 박사과정은 M.Div.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 M.Div.과정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학부를 졸업하던 시기에도 M.Div.과정이 있었으나, 학부에서 신학을 4년이나 공부한 이들에게 다시 동일한 교육과정을 3년씩이나 다시 이수하게 해야 하는 M.Div.과정은, 전혀 우리에게 매력이 없었다. 물론 그런 외면이 나중에 외국학위를 받는데 결정적 흠이 되었다. 그래서 그 후, 미국식 M.Div. 만능 학위과정을 신학대학교 졸업생들에게도 다시 이수하게 하는 기형적 교육체제가 한국에도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강제는, 여타학문과 비교해 볼 때, 그 수학연한에 있어 전혀 공평하지 않다.

한국 신학교에 오늘처럼 여유 있게 박사학위과정이 열려있지 않았던 시절, 우리는 거의 모두 자연스레 외국 학위를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M.Div. 학위 없이는 외국 D.Min. 학위를 취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신학교는 M.A나 Th.M 등의 석사학위를 가진 이들에게 M.Div. 이수 학점에 모자라는 학점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락해 왔었다. 그리고 학부의 학과 차별 없이 소정의 학부 학점만 인정되면 석사과정을 이수토록 했고, D.Min. 학위 입학에 필요한 학점만 갖추면 입학을 허락했다.

나는 그 댓글에 무차별적으로 거론된, 그분들의 전지구적 학위과정의 정당성과 면학에의 열정을 높이 산다. 그리고 그분들이 비록 나처럼 M.Div를 거치지 않았어도, 외국신학교가 인정해 줄 정도의 석사과정에 준하는 학점들을 적정하게 이수했으리라 믿는다. 만학의 학문적 노고와 열정으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느라 주경야독하여 이룬 그분들의 학문적 성취를, 나를 매우 높이 산다. 그런 학문적 노고와 열정이 있었기에 그분들은 오늘 그 자리에서 목회 현장의 신학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나름 기여하고 계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분들이 학위를 받은 신학교는 우리들의 귀에 익은 이름 있는 신학교가 아닌가?

지금 시각이 10월 22일 토요일 오전 10시 24분이다. 나는 「성결네트워크」를 클릭 했다가 이상과 같은 금도를 벗어난 댓글들을 보는 순간, 격정에 사로잡혀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오늘 메인 창에 뜬 이런 기사를 대한다.

강민호 (jmk3333@hanmail.net) 기자가 올린, 「성경 읽을수록 자유주의적(liberal) 된다」라는 제하(題下)의 글이다.

“성경을 자주 읽을수록 정치·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liberal)인 관점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中略) 예를 들어 성경읽기 빈도는 도덕적인 자세도 바꿔놨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사회적·경제적 정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란 질문에 성경읽기 빈도가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긍정적인 답변 비율이 35%씩 증가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복음주의자도 비슷한 결과를 나타냈다. 이들은 대학 졸업, 평균 수입,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22%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반면,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44%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後略)”

이게 ‘아하, 의 복음’이다. 만인의 무릎을 치게 하는, 세상을 변혁시키신 예수그리스도의 ‘아하,의 복음’이다. 사마리아로 직행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혈통적 차별까지 격파하셨다. 나는 지난「한국성결신문」2011년 6월 15일자 제808호「애오개」가 발한 ‘오적(五賊), 삼백삼장(三白三張) 〓 예부호(예성출신, 부흥사, 호남사람)’ 라는 적반하장격인, 교단을 반쪽 내려는 해괴망측한 등식(等式)에 대해, 「존경하옵는 조병하 장로님 전상서」라는 글에서 일차 ‘넛지(Nudge)’를 구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신문이 그 터무니없는 분열적 의도를 저버리지 않을 경우, 나는 개인적으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시정을 촉구할까 생각 중이다.

내가 이글을 이곳「성결네트워크」에 올려 달라고 의뢰한 것은, 「예부호」라는 근거 없는 신조어(新造語)를 창제(?)해, 교단을 편가르고, 그 어느 동네나 그 어떤 단체의 사람들을 악의 축으로 매도하는 기상천외한 곡필을 휘둘렀던, 「한국성결신문」「애오개」에 발했던 동일한 의분(義憤)으로, 그 댓글들에 숨겨진 비열한 저의, 학과 차별에 분노한 탓이다. 뿌리부터 차별적인 한국 학제에 짓눌려 재기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 한국 목회자들에게, 목회자의 계속교육을 허락한 미국신학교의 열린 학제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열어주신 학문적 기회다. 오늘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열린 학제의 값진 열매다. 검증을 하려면, 기계적 차별에 찌든 한국 어느 기관이 아니라, 미국 그분들에게 학위를 준 신학교에 물어보라. 한미 FTA 시대에 외국학위 감별은 그 해당 학교에 물어야 온당한 것 아닌가?


나도 적잖은 차별이 당연시된 동네에서 태어 난 사람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받은 그 차별이 말씀 안에서 외려 차별을 차별하는 긍정적 심리로 내면화되었다. 흰둥이가 될 수 없는 검둥이를 더 차별하는 것이 인간의 야수적 본능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아하, 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닌가? 이「성결네트워크」에 실리는 글들이 그 ‘아하, 의 복음’을 깨닫는 자기 성찰의 글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맑은 날이 속히 성결동산에 임하길, 나는 소망한다.

사족(蛇足) 같은 한마디.

인터넷 매체, 특히 교단과 관계된 인터넷 신문「성결네트워크」나 교단 어느 지방회 홈피에 종종, 내 홈피에 써놓은 글들이 자의반타의반, 게재 된 적이 있다. 그때 마다 터무니없는 나에 대한 인신공격성 댓글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참기 어려웠어도, 단 한 번도 익명으로나 실명으로 댓글을 그런 곳에 달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인터넷 매체를 활용하는 내가, 내 자신의 심령을 영적으로 올바르게 관리하는 최소한의 대처방식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 무차별적으로 타인을 공격해대는 만행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해치게 될 것이라,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댓글 무용론자이거나, 폐지론자는, 나는 아니다. 그러나 있는 사실을 검증하는 것과,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네가티브는 전혀 다름을 익명의 댓글 논객(?)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혹 사실 검증 차원이라 할지라도 무차별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은 그나마 내가 교통하는「성결네트워크」가 신문고(申聞鼓)나 스크림 룸(Scream Room)의 성격이 보다 농후하다고, 나는 여기고 있다. 여전한 기대를 이곳에 던지며, 나의 의사진행 발언을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해서(海恕)를 빌며,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