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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2011.10.31 22:04

김성찬 조회 수:1233 추천:29


http://blog.daum.net/sunghwa/2191188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그곳은 바로 전라남도 신안군이다. 크고 작은 섬들로만 이루어진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퍼센트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증도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이다.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주민 2,200여 명인 작은 섬에 교회만 11개가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섬사람들은 토속 신앙을 믿으며 살아왔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들로서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태양의 신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런 오랜 전통 때문에 섬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개신교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을 만들 수 있었을까? 증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의 눈물겨운 헌신의 삶이 있었기에, 그녀가 뿌린 숭고한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신안군과 증도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중동리교회당은 순교의 피묻은 현장의 모래로 만든 벽돌로 신축되었다.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는 양딸인 백 전도사에게 자기는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힐 수 없으니 자기가 죽으면 그 산 아래 밭의 한 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했다. 순교 1주기 때 이 얘기를 들은 정씨 문중에서는 전도받은 분들도 많아 문중회의를 열었다. 결국 문준경 전도사는 문중을 빛낸 분이니 선산 중앙에 모시자고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지금 묘는 정씨 문중 선산 한가운데에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나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文俊卿·1891∼1950)전도사의 경우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문준경전도사가 설립한 섬교회를 통해 배출하였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임자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우진리교회, 병풍리교회, 사옥교회, 장고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주후 1950년에 세워진 최초의 순교비

 

문준경 전도사 묘비, 묘

 

문준경 전도사 묘비

 

문준경 전도사 묘비 후면

 

문준경 전도사 묘

 

문준경 전도사 묘 이장비

 

1950.10.5. 중동리교회 뒷산에 묻혔던 묘를 2005.2.. 현 장소로 이장하여 순교지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후면 약력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후면 약력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 후면 약력  

 

순교비

 

순교비

 

순교비

 

문준경 전도사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19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당시 59세.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60배,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천국의 섬, 증도이야기  -임병진,유승준(가나북스)

 

전남 신안군 증도


면적 28.16㎢, 인구 1,906명(1999), 해안선길이 46.5km, 최고점 200m이다. 목포시에서 북서쪽으로 51km 해상에 위치하며 북쪽에 사옥도(沙玉島)와 임자도(荏子島), 남쪽에 자은도(慈恩島)와 암태도(岩泰島)가 있다. 1896년 지도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1969년 신안군에 소속되었다. 원래 대조리·우전리(羽田里)를 구성하는 대조도(大棗島)와 별개의 섬이었으나 두 섬을 잇는 제방이 축조되고 그 사이에 대규모 염전이 개발되면서 하나의 섬으로 통합되었다. 섬에는 100m 안팎의 낮은 산지가 늘어서 있으며, 산지와 산지 사이에 평지가 발달하여 논으로 개발되었다. 농경지가 비교적 넓기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유채·참깨 등이며, 주변 해역에서 농어·민어·갈치 등도 많이 잡히고, 김·미역·꼬막 등의 양식도 성하다. 선착장 바로 앞의 태평염전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염전으로 연간 1만 5천여 톤의 소금을 생산해 내며, 방축리(防築里) 도덕도(道德島) 앞은 사적 제274호로 지정된 송원대유물매장해역(宋元代遺物埋藏海域)으로 수많은 해저유물이 인양되었다. 지도에서 사옥도까지는 지도대교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통행할 수 있으며, 사옥도 지신개 선착장과 증도 버지 선착장을 오가는 철부선이 하루 5~7회 운항된다. 차량을 싣고 갈 수 있으며, 15분 정도 소요된다 (네이버 백과)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에 대한 성결교회사적 평가와 과제               허명섭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

 

순교는 흔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폭정과 부정의에 대한 항거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순교의 거룩성과 아름다움은 신앙의 수호를 위해 총칼보다는 사랑의 죽음을 택했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순교는 역사 속에 하늘의 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그러한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소란스럽던 증동리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갑자기 “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공산 폭도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문준경 전도사가 내뱉었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오늘도 거룩한 메아리가 되어 수많은 심령 가운데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자로는 첫 순교의 자리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헌신했던 수많은 여성사역자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난으로 점철된 성결교회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단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헌신했지만 유난히도 많은 시련을 겪었던 문준경 전도사 또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섬 지역의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에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 지역 최초의 교회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 지역과 주변은 복음의 처녀지(處女地)였으며, 그녀의 전도에 의해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산 폭도들이 문준경 전도사를 무참히 살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녀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며 “그냥 놔두면 더 많은 새끼를 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성결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성결교회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서 한국교회 및 성결교회 여성사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고 있다.

둘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가시밭의 백합화’로 상징되는 성결교회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상징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상징에 내포된 뜻 가운데 하나가 찢겨진 상처로 인해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의 속성처럼 성결인의 신앙은 세상의 시련 가운데서 더욱 강렬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이다. 성결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던 선교 초기부터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의 험난한 행로를 걸어야했다. 때로는 친일파라는 오해로, 때로는 상종 못할 이단사설이라는 오해로 여기저기가 뜯기고 찢어졌다. 더욱이 국가시책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성결교회는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 되었다. 이 와중에 문준경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에 불려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역하던 증동리교회도 경방단에 매각되고 그 대금 또한 국방헌금의 명목으로 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의 질곡 속에서도 성결인들의 신앙은 쇠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성결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이 민족의 해방과 함께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일제에 의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한편 각처에 새로운 제단들을 설립하면서 힘차게 약진해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약진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 민족이 동족상잔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아픔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절정에는 순교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의 박멸을 꾀하는 공산도배들의 폭거에 항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다 맞게 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도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전쟁의 와중에 저질러진 공산주의자들에 만행은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하려 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여기저기서 자행되었으며,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십자가를 져야 했다.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에서는 48명이,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이,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에서는 22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전쟁으로 성결교회는 110여 개의 교회가 파손되었으며, 목사 9명, 전도사 2명, 장로 5명을 포함해 160여 명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여기에 납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진다.

셋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목자 됨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모든 목양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를 통해 초기 성결교회 사역자들이 가졌던 그러한 정신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에게는 이 순교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떼들을 홀로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증동리교회를 찾아갔다가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순교의 사건이 있기 전 문준경 전도사는 양도천, 이봉성 전도사 등과 함께 특별 감시 및 교육대상에 차출되어 증동리에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을 압송하던 내무서원들은 세 전도사에게 친척집 등으로 가라고 이르고는 도망가 버렸다. 양도천 전도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에 머물렀고, 문준경 전도사는 잠시 친정을 방문한 뒤 공산당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성봉 목사는 증동리에도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에 있는 신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백 전도사가 제 대신 남아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어서 돌아가야지요. 한시라도 빨리요”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증동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반추해 펴보았다. 그녀의 순교 속에서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의 신비와 또 다른 생명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헌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순교자적 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고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앙에 대한 조명 작업이 교단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이러한 사업은 주로 관련 있는 몇몇 사람이나 혹은 기념사업회 등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아름다운 순교자적 신앙전통이 가족사 혹은 개교회사적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순교자들에 대한 조명 작업이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교단의 상징인 순교자적 신앙의 전통을 제고하기 위해 교단적인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사실 전통적으로 성결교회는 역사를 만드는 데는 여타 교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정리 보존하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면에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소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순교자적 신앙전통의 보존 및 승계를 위해 교단적인 차원에서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보고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학생들 그리고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쉴 사이 없이 클릭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만화, 영화, 공연 등의 볼거리를 찾아 몰려다니고 있다. 교회는 잘만 계발하여 사용하면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신앙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생애와 신앙은 그 대표적인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소재들을 만화, 영화, 인터넷 동영상 등으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사적지에 대한 보존 및 복구와 성지화 작업을 비롯하여 순교자기념관 등의 건립이 시급하다. 그리고 개교회의 야외활동, 청년 학생들의 수련회를 비롯한 각종 활동과 이들 장소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나 장로교 등에서는 이러한 작업들이 많이 진척되고 있다. 가끔 필자에게 성결교회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몇몇 장소를 안내하기는 하지만 매우 당혹스럽다. 마땅히 추천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성결교단은 이제 창립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역사의 정리와 보존 그리고 승계를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